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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3전시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개항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승하고 국민들의 자긍심과 염원을 모아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역사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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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시실 /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1961년~1987년)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다루고 있다

 

 

제3전시실 /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1961년~1987년)

1960대 초부터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추진해 수출을 늘려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힘썼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정부와 기업 · 국민의 노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무역대국 · 제조업 강국의 기반을 닦았다

경제성장에 따라 도시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고, 대중문화도 발달하였다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산업간 · 도농간 · 지역 간 격차가 커졌고, 국민의 기본권을 부인하고 민주주의를 희생시켰다

남북관계도 불신과 대립의 긴장 관계를 탈피하지 못했다

이에 야당 정치인 · 학생 · 지식인 · 근로 대중의 피나는 민주화 투쟁이 진행된 결과 마침내 1980년대 후반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루었다

 

 

 

 

1961년 5 · 16군사정변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6 · 29선언에 이은 민주 개헌까지 5년 단위로 설명되어 있다

 

 

 

 

정부 신청사 조감도 사진 · 1961년 9월 정부 신청사 낙성식 안내서

1961년 쌍둥이 건물로 지어진 2개동 중, 하나는 주한 미 원조행정처(USOM), 다른 하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1963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된 이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이어서 문화공보부 및 문화체육관광부 청사로 활용되었다

 

 

 

 

경제 개발의 추진

1961년에 군사정부는 경제 개발에 착수하여 경제기획원을 설립하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였다

수출 지향 공업화 전략을 고안하여 수출 진흥을 위해 저리의 수출 금융을 제공하고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등 수출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또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세우고 한일 국교 정상화, 베트남 파병으로 얻은 외화와 외국차관을 투자해 중화학공업을 단계적으로 육성하였다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 및 추진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고도성장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 호황 속에서 경제개발전략을 적극적으로 수립 · 실행하면서 이루어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경제 개발 체제의 핵심 전략으로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초기 경제개발 계획은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수립하였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는 시행착오와 난관이 많았다

정부는 경제개발 투자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경제개발 초기 내자 확보 노력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자금을 확보하려고 1962년 화폐개혁과 일반은행 국유화를 시행하였다

화폐개혁은 화폐단위를 환(阛)에서 원(圓)으로 바꾸는 화폐 교환을 하면서 민간에 숨어있는 자금을 찾아내 산업투자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시장의 혼란만 초래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부정축재 환수 조치의 하나로 기업인 소유의 일반 은행주식을 몰수하여 국유화하였다

이로써 국내 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고 정부가 계획한 투자자금에 집중적으로 배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국내의 자본 축적이 빈약한 상황에서 경제개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통화개혁 시기의 화폐(1962)

영국에서 제작해서 1962년 국내로 들여와 유통된 화폐다

1원 · 5원 · 10원 · 50월 · 100원 · 500원권으로 총 6종이었다

국외에서 제작하다 보니 지폐 인쇄에도 실수가 발생하였다

지폐 하단에 찍힌 「한국조폐공사제조」 중 조폐가 조페로 잘못 인쇄된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보급

정부는 과학기술진흥정책을 세우고 추진할 과학기술처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였다

정부는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여건에 맞게 과학기술자와 기능 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과학 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에 힘입어 전기 · 전자 · 자동차 · 제철 · 기계 · 조선산업 등이 발전할 수 있었다

또 통일벼 개발 · B형간염 백신과 유행성 출혈열 백신의 개발 · 새로운 나무 품종 개발 등을 통해 국민 생활의 질을 높였다

 

 

 

 

수출지향 공업화

1960년대 이후 자유무역 체제에 기반을 둔 세계무역이 급성장했다

선진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후진국은 노동집약적 공산품을 생산하여 선진국에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공산품의 수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 전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공산품 수출을 늘리기 위해 수출 지원 정책을 다양하게 펼쳐나갔다

1961년의 수출액은 4,100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1964년에는 1억 달러를 돌파했다

1970년대 말까지 연평균 40% 가까이 증가하여 1977년에는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그에 따라 경제가 고도 성장을 하게 되었다

수출의 성공으로 정부는 국민에게 수출입국을 강조하고 경제에 대한 자신감과 공감대를 확산시켰다

 

 

 

 

대표적 수출품이었던 가발 · 가발 틀이다

1963년 이후 수출품 중 공업 생산품 비중이 절반을 넘어섰다

1950년대 주요 수출품이 농산물 · 수산물 · 광산물 등 1차 산업 제품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커다란 변화였다

당시 수출품은 가발 · 의류 · 완구 · 신발 · 합판 등 노동집약형 공산품이었다

 

 

 

 

사상계

1953년 창간된 사상계는 1960년대 지식인층과 학생층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종합교양 월간지였다

함석헌 · 장준하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근대주의 · 민족주의 · 자유주의 담론의 유포처이자 공론장으로서 역활을 담당했다

사상계의 주요 필진들은 민족주의를 저항담론으로 수용했으며 한일회담이 본격화된 1964년 이후로는 박정희정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사진(1964~1965)

1951년 첫 논의 이래 14년을 끌어온 한일회담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한일 양국의 국교 회복 ·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문제 · 어업 · 평화선,·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 · 문화재 반환 등 복수의 의제가 다루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일본의 협력을 얻기 위해 회담의 타결을 서둘렀다

그 결과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불충분한 사과 등의 문제가 남게 되었다

야당과 대학가에서는 한일회담을 국욕 매국 외교라 하여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김종필 · 오히라 마사요시 메모(1962)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일본 외상과 가진 비밀회담에서 대일청구권 문제에 대한 합의 사항을 메모 형식으로 교환하였다

 

 

 

 

한일기본관계조약(1965. 6. 22)

1965년 6월 22일 한일양국이 《한일기본관계조약(4개의 협정과 25개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한일국교 정상화회담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가해 사실에 대한 사죄를 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이 청구권 문제 · 어업 문제 · 문화재 반환 문제 등을 양보하면서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산업 역군의 해외 진출 · 파독 광부와 간호사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총 8,000여 명의 광부와 11,000여 명의 간호사가 서독으로 파견되었다

대학을 졸업해도 변변한 취직자리가 없던 시절, 파독 광부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무더운 지하 막장에서 탄가루를 마시며 땀범벅이 되도록 일하였다

간호사 독일파견은 가톨릭교회와 재독 한인 의사들에 의해 소규모로 이루어지다가 1966년부터는 한국정부가 이 일에 직접 나서서 1977년까지 계속되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은 받은 월급의 대부분을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하였는데, 그 총 금액은 1억 달러가 넘었다

 

 

 

 

독일 광산에서 사용했던 가스등 · 독일 광부수첩 · 독일어사전 · 파독 광부 일기

입금전표 · 한국 송금 주문서 · 파독 광부 임금명세서 등이다

 

 

 

 

베트남 파병의 배경과 경과

1964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동맹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1964년 9월 비전투부대, 1965년 10월 전투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 철군할 때까지 약 32만 명을 지원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유지하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으면서 한국군을 현대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미국은 브라운각서(1966)를 통해 한국군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한국에 특별 원조를 제공하였다

파병으로 한국군은 5,000여 명이 전사했으며, 부상자가 많이 생겼다

 

 

 

 

베트남 전쟁의 경제적 성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평균 8%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룬 한 요인으로 베트남전쟁 특수를 들 수 있다

기업은 물품 군납과 현지 건설로 경제적 이득을 많이 보았고 1970년의 베트남에 대한 수출 비중이 8.4%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파병 및 건설사업으로 벌어들인 10억 달러는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자금으로 쓰였다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 피해

베트남전쟁 중 미군은 무성한 정글이 전투하는 데 장애가 되자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한국군은 헬리콥터용 제초제 살포기가 제작되기 이전까지 주로 분무식 살포기나 수동식 장비를 이용하여 직접 근거리에서 살포하였다

고엽제는 베트남전쟁 당시 군인 · 군무원 · 종군 기자 등으로 활동한 이들은 물론이고 2세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악성 질병과 심적 장애를 유발하였다

2013년 11월 말 기준으로 후유증 · 후유의증 환자는 8만여 명에 이른다

 

 

 

 

1960~1980년대 반공의 사회상

1970년대까지 반공은 국시(國是)나 마찬가지였다

반공 · 방첩 표어가 거리와 학교 곳곳에 나붙었으며 초등학교 도덕 교과 이름이 「반공 도덕」일 정도로 반공 교육이 강조되었다

제대 군인들은 향토예비군에 편성되어 후방 방위업무를 맡았으며, 임무를 마치면 다시 민방위대로 편성되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학교에서 교련이라는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전국민이 참여하는 민방위 훈련이 매월 실시되었다

하지만 반공주의는 반정부 인사를 「용공」으로 몰아 탄압하는 데 악용되기도 하였다

 

 

 

 

대립과 갈등의 남북관계(1953년~1980년대 중반)

1953년 휴전 후 1980년대 중반까지의 남북관계는 냉전적 대결구도가 지속되면서 체제대립과 군비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북한은 무장 공비 남파 · 비무장지대 땅굴 굴착 등 군사 도발과 정부요인과 민간인에 대한 폭력행위를 일으켜, 남북한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에서는 남북대화가 시도되었다

6 · 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회담이 진행되어, 1972년에 자주적 평화통일의 원칙을 천명한 7 · 4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남북 이산가족 및 예술단 교환 방문이 한시적으로 성사되기도 하였다

한편, 138일간 생방송으로 진행된 1983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특별방송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비극과 상처 그 치유의 필요성을 전 세계에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기아 3륜트럭 T-600(1969년 등록문화제 400호)

배기량 577cc · 최고속도 75km/h · 적재량 500kg으로 1969년 기아산업에서 일본 모델을 들여와 조립 생산한 3륜트럭이다

국내 용달운수업의 효시를 마련한 차량으로 1974년까지 총 7,726대가 생산되었다

 

 

 

 

중화학공업화와 유신체제

1960년대 노동집약적 경공업품 수출로 성장한 한국경제는 1960년대 후반 도약을 위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준비해야 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공업화에 필요한 원료 · 중간재 · 자본재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만성적 무역수지 적자를 겪고 있었으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수출 상품의 고도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와 더불어 1960년대 후반 북한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 닉슨독트린에 따른 미군 철수 등으로

안보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방위산업 육성 방침이 결정되었고, 그를 위해 중화학공업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계엄령 아래에서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제정하였다

 

 

 

 

10월유신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 출범 직후인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과 시책을 선언하고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여 중화학공업정책을 전면적으로 추진했다

철강 · 비철금속 · 기계 · 조선 · 전자 · 화학을 6대 전략 업종으로 선정하고 이들 산업을 수출 업종으로 개발하였다

중화학공업화로 한국경제는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서 자본 및 기술집약적 산업구조로 성장했다

중화학공업화를 뒷받침한 유신체제는 1인 장기집권을 위해 국민의 기본권과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훼손하였다

 

 

 

 

뉴스위크(Newsweek) 한국경제 특집호(1977 · 1985)

1977년 6월 6일자 '한국인이 몰려온다'

1985년 5월 13일자 '주식회사 한국이 온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0년 7월에 완공되었다

15시간의 이동 시간이 5시간으로 단축되어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바뀌었다

국내 여론이나 세계은행은 건설 계획에 부정적이었지만 정부는 연인원 892만 8천 명에 달하는 건설 인력을 투입하여

그들의 피 ·  · 끈기로 매우 짧은 기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공사를 마쳤다

 

 

 

 

대한민국 1호 전자 제품

1959년 11월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A-501이 탄생하였다

금성사(지금의 LG전자)는 일본 산요전기의 진공관 등에 국산 부품을 더하여 고유한 디자인의 라디오를 생산하였다

이후 전화기(1961) · 냉장고(1965) · 흑백텔레비젼(1966) · 에어컨(1968) · 세탁기(1969) 등과 같은 국산 1호 가전제품을 연달아 출시하였다

 

 

 

 

대한민국 1호 라디오 금성A-501'

전자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시기여서 국산 라디오 개발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으나 부품의 60% 이상을 국산화하며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후 금성사는 1962년 11월 18일 아이젠버그사에 라디오 62대를 수출함으로써 국산 가전제품 첫 수출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1호 흑백 텔레비젼 금성VD-191(1966년)

금성사는 일본 히타치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진공관식 19인치 제품을 생산했다

당시 흑백텔레비젼 가격은 제조업 생산직 근로자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고가였지만

이 텔레비젼에 대한 수요가 많아 공개추첨으로 판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자동차산업의 발전 / 1960년대 · 1970년대

1960년대 말까지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자동차 부품을 단순 조립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조립차는 수입하는 것보다 생산하는 비용이 더 들었다

새나라자동차에 이어 신진 · 아세아 ·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들이 자동차 조립에 뛰어 들었다

1970년대에 정부는 자동차 국산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자동차 산업을 육성했다

이에 기아산업이 1974년에 최초로 국산 엔진을 장착한 승용차 《브리사》를 개발했다

 

 

 

 

현대자동차 포니

현대는 국내 첫 고유 모델이 된 포니자동차와 포니쿠페를 출시했다

포니의 개발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 · 세계에서는 열여섯 번째로 고유 모델 자동차 생산 국가가 되었다

1976년 포니는 국내시장에 60%를 점유하고 에콰도르에 처음으로 수출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과 중동건설로 국내 경제가 호황을 맞으며 1970년대 말 자동차 산업은 급성장했다

 

 

 

 

대한민국 1호 초대형 유조선 / 애틀랜틱 배런호

1970년에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이 정부의 권유를 받아 조선업에 진출하였다

현대는 유럽 회사의 자문 · 설계와 정부의 보증을 토대로 하여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외자를 얻어 1972년 3월에 울산에서 조선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정주영 회장은 선박을 수주할 때, 당시의 500원권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을 보이며 선주를 설득하였다 한다

1년 후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해 1974년 6월에 애틀랜틱 배런호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한국 조선업은 3만 톤급에서 30만 톤급으로 도약하였다

 

 

 

 

생활의 변화

도시화의 진전에 따른 가장 뚜렸한 변화는 아파트의 등장과 같은 주거 환경의 변화였다

사람들은 입식생활 · 보일러 · 수세식 변기에 익숙해져 갔고 전기 보급이 원활해지면서 생활용품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이스크림과 라면이 출시된 것도, 현대식 의복이 보편화된 것도 이 시기였다

 

 

 

 

대중교통의 발달

1960년대 말부터 전차를 대신하여 시내버스가 서울 시민의 발 역활을 맡았다

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서울역과 청량리역 구간에 지하철리 개통된 후 여러 노선의 지하철이 속속 개통되었다

1985년 부산 지하철 개통을 필두로 하여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에도 지하철이 건설되었다

개통 첫 해에 0.37%에 불과하던 수도권 지하철의 여객 수송 분담률은 30년 뒤에는 27.4%에 달하게 되었다

 

 

 

 

가족 형태의 변화와 가족계획

인구의 도시 집중에 따라 가족 형태가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 형태로 바뀌어 갔다

전쟁 후 베이비 붐이 일어나자, 정부는 1960년대 초부터 산아제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50년대 6.3명이던 출산율이 1970년대에는 4.53명, 1980년대에는 2.83명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도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자 정부는 1990년대에 출산 억제 정책을 폐기하였고, 2000년대에는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다

 

 

 

 

성장의 그늘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그늘도 짙었다

농업과 공업 간 · 도시와 농촌 간 · 지역 간 격차가 커졌다

도시 내에서도 도시 빈민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71년 8월의 광주대단지 사건은 대표적인 예이다

또 수출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다 보니 근로자들의 권익은 무시되었다

 

 

 

 

1960~1970년대 섬유공업의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자살로 항의하였다

이는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린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성장위주의 정책을 유지하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아래 층은 허리도 못 펴는 낮은 공장이고 윗층도 역시 낮은 방이다

이곳에서 전태일은 하루에 14시간씩 1주에 7일을 일했으며 한 달에 2일만 쉴 수 있었다

 

 

 

 

당시 극장 모습

 

 

 

 

새마을운동

1970년경부터 낙후된 농촌을 살리기 위해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마을길을 넓히거나 초가집을 양옥집으로 바꾸는 것처럼 농가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근면 · 자조 · 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농민이 근검 · 절약하고 소득을 늘리는 사업으로 발전하였다

새마을운동은 농민들의 잘살아 보겠다는 의욕을 자극하여 농촌의 환경과 농민의 자세를 크게 바꾸었으며

농촌을 넘어서 도시 지역과 직장 · 공장 · 학교 등으로 확산되었다

 

 

 

 

TV · 스포츠 · 대중잡지

1970년대 흑백 TV가 보급되면서 대중문화가 급속히 확산됐다

1980년 12월부터 컬러텔레비젼 방송이 시작되어 컬러텔레비젼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스포츠는 텔레비젼 보급과 함께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했다

1970년대에는 고교야구와 축구 · 프로레스링 · 복싱이 최고 인기 종목이었다

1980년대 들어 프로 야구와 프로 축구가 출범하면서 인기를 이어 갔고, 민속 씨름도 프로화되어 전성기를 맞았다

1970년대를 주간지의 전성시대라 할 만큼 신문사들이 앞 다퉈 주간지를 발행했다

한국일보사가 1964년에 창간한 「주간한국」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다른 일간 신문사들도 주간지를 창간했다

 

 

 

 

1960~1980년대 대중음악

1960~1970년대는 가요사에서 뚜렸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1960년대 라디오를 통해 팝을 듣고 자란 세대들이 1970년대 텔레비젼의 보급과 더불어 새로운 대중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이 주류 음악으로 등장했다

새롭게 등장한 싱어송라이터들의 곡은 젊은이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으나 부정적인 사회 이미지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금지곡으로는 양희은의 아침이슬 · 김민기 친구 · 김추자 거짓말이야 · 이장희 그건 너 등이 있다

한편 1960년대 말에 등장한 남진과 나훈아가 남성 트로트 가수의 화려한 전성시대를 맞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가요제들은 대중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이를 통해 배출된 가수들이 1980년대 대중 음악계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음악다방 MUSIC BOX

 

 

 

 

유신반대운동 1

3선개헌 후 1971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40대의 신예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3선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 후 불과 1년여 만에 박정희는 군을 동원하여 자신의 종신 집권과 무제한의 권력행사를 위한 유신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실종되었다

이듬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은 후 가을부터 대학생들이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고 재야인사들은 개헌청원서명운동을 벌여서 큰 호응을 받았다

정부는 긴급 조치 1호를 발동하여 주도자들을 구속 · 처벌하였다

 

 

 

 

유신 반대운동 2

1973년 가을부터 1975년 봄까지는 대학생과 재야인사의 집회와 시위 및 개헌 서명 운동

기자들의 언론 자유 운동 · 야당의 투쟁 등으로 유신헌법을 철폐하라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1975년에 박정희 정부는 과거 인민혁명당 관계자 등 8명을, 학생운동 배후 조종 세력으로서 폭력혁명을 기도했다고 조작하여 사형을 처하기까지 하였다

월남 등 인도차이나 국가들이 공산화되자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일체의 반대 행위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피의자 현상 수배 전단지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년)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며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었다

이 사건으로 203명이 구속되었다

 

 

 

 

시민들의 격려 광고가 실린 동아일보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였다

당국은 이에 광고 탄압으로 대응하였으나 1975년 1월 1일부터 약 5개월 간 총 10,352건에 달하는 독자들의 격려 광고가 지면을 채웠다

 

 

 

 

3선개헌 반대 운동

집권 여당이 국회 의석 2/3이상을 차지한 1967년 총선거 후 대학생들이 여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렸다

여당이 1969년 초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계속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은 각계 인사들과 연합하여 반대 운동을 벌렸다

여당이 국회에서 3선 개헌안을 변칙으로 통과시킨 것에 야당과 대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했으나, 개헌안은 10월에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부 · 마 민주화운동과 유신체제의 종말

1970년대 말 박정희 정부는 경기 침체와 더불어 미국과의 외교 마찰로 흔들렸다

1979년 5월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이 새로 야당 당수로 선출된 후 정부에 강경히 맞섰다

그해 10월 집권 여당이 김영삼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자 

부산 · 마산 · 창원에서 학생들과 일반 시민이 함께 독재 타도와 유신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렸다

이후 시국 대처 방안을 둘러싼 권력 내부의 갈등 속에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함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았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서 대통령 시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 군부는 12 · 12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민주 인사들이 정치 활동을 재개한 가운데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과 더불어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신군부는 5 · 17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군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체포하였다

1980년 5 · 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는 계엄 해제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 · 시민을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살상하였고 이에 시민들이 무장하여 저항하였다

시민군에 밀려 후퇴한 계엄군은 수일 뒤 시내에 진입하여 시민군을 진압하였다

신군부가 자신의 집권을 위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무력으로 짓밟은 이 사태는

6 · 25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민중미술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나타났다

현실 참여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지닌 작가들이 소집단을 결성하여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관심과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걸개그림 · 판화 · 만화 · 포스터 분야로 미술 장르를 확대하고 시위현장이나 공장 등 생활 현장에 걸릴 수 있는 작품을 제작했다

걸개 그림은 주로 시위현장이나 대중 집회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려졌으며

대형의 그림을 짧은 기간 안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거칠고 투박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강직하고 힘이 넘치는 표현력을 가진 판화는 민중 미술의 현실성을 반영한 주제들을 전달하는 데 적합하였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의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계속 일어났다

전두환 정부의 유화 국면에서 치러진 1985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전 야당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을 따르는 정치인들의 신한민주당이 승리하였고, 그 후 이들은 직선제 개헌 투쟁을 시작하였다

급진 학생운동 세력은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노 · 학 연대 투쟁과 더불어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 대학생 전방 입소 거부 투쟁 등의 반미 자주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권모양에 대한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의 성고문을 고발한다(1986)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된 권인숙이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중 일어난 성고문 사실을 밝히고 가해 형사를 고발하는 내용이다

 

 

 

 

6월 민주 항쟁과 6 · 29선언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6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류탄을 맞고 뇌사한 사건이 터지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 · 시민이 「호헌 철폐 · 독재 타도」를 외친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집권세력은 국민의 저항에 굴복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였다(6 · 29선언)

그 후 여야 합의로 마련된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였고, 16년 만에 대통령 직접 선거가 실시되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사망사건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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