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개항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승하고 국민들의 자긍심과 염원을 모아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역사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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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 대한민국의 태동(1876년~1948년)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좌절 ·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과 8 · 15 광복을 다루고 있다
제1전시실 / 대한민국의 태동(1876년~1948년)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기에 뒤늦게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에 나섰으나 청과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은 한국인을 억압하고 차별하였으며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위해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다
한국인은 전 민족적인 3 · 1운동을 일으키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한국인은 1945년 감격스런 8 · 15광복을 맞았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을 점령하여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7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1940년대까지 설명되어 있다
자주적 근대국가의 꿈과 노력
개항과 근대화의 모색 ·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선포 · 국권 상실과 회복 등으로 이어진다
개항과 근대화의 모색
19세기, 조선 연해에 서양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며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은 자국 선교사의 순교나 선원의 피살을 구실로 삼아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조선군 부대는 1866년에 프랑스 함대 · 1871년에는 미국 함대와 격전을 치렀다
그 후 조선 조정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에 나선 이후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였고
국내에서도 개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조선은 결국 개항하게 되었다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
유길준이 1889년 원고를 쓰고 1895년 출판된 서양 기행문이다
우리의 근대 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각 분야별로 분석한 개화파의 「근대화 방략서」이다
세계 각국과의 조약 체결
조선은 일본과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 정부가 일본인 치외법권과 같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 후 조선은 청의 알선으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이어서 영국 · 독일 · 러시아 · 프랑스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들은 모두 불평등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청 · 일본뿐 아니라 서양 열강과의 교역이 시작되었다
서울 정동 일대에는 러시아 · 영국 · 미국 등의 영사관 건물이 들어섰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
1876년 2월 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고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 정책의 추진
개항 후 조선은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외국의 문물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하였으며, 정부 기구를 개편하고 신식 군대를 창설하였다
급진개화파는 1884년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여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에도 신문 간행 · 계몽 서적 발간 · 근대 학교 설립과 교과서 간행과 같이 개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는 재정 일원화 · 도량형 통일 · 양반 · 상민제와 노비제의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갑오개혁으로 이어졌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서술한 책(1947년)
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의 역활을 서술한 책이다
처음으로 양복을 입은 모습 · 청년시대의 사진이다
서양 생활문화의 도입
문호를 개방한 이후 새로운 생활문화가 들어왔다
정부와 서양선교사들이 세운 신식 학교에서 근대 학문을 가르쳤으며 서양식 건축과 전기 · 전화와 전신 · 교통 시설 · 우편 제도 · 금융 제도 등이 도입되었다
서울과 인천 간에는 기차 · 서울 시내에는 전차가 운행되었다
서울과 인천 간에는 전화가 가설되었고 우정총국이 우편 업무를 시작하였다
상투를 자르고 양장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한성전화소에 설치된 전화교환시설
독립협회 활동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돌아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정부 고관들과 지식인들은 외세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자는 취지로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사업으로 내걸고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독립협회는 교육 진흥 · 산업 개발 · 자주 독립 등을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개최하여 민중을 개몽하였다
더 나아가 독립협회는 상소와 대중집회(만민공동회)를 통해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고 국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으로 자유민권사상을 품고 독립협회에 투신하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다
대한의원 개원 칙서
대한의원 개원일(1908년 10월 24일)에 순종 황제가 내린 칙서로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기관임을 선포하는 문서다
대한제국 수립
일본에 의해 명성 황후가 시해당하는 사건(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친러파 정권이 성립하였다
조선의 자주독립과 고종의 환궁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1년여 만에 환궁한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반포된 대한국국제는,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이며 황제가 무한한 군주권을 갖는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대한제국은 황제의 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1899년 8월 17일 대한제국이 공포한 국가 제도 법령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정체와 군권 등의 국제를 제정하고 대내외에 밝힌다는 필요성에서 법규정소에 만들 것을 지시하고
법규정소 총재 윤용선 · 의정관 서정순 등이 전문 9조로 기초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아 확정되었다
자주 독립국으로서 조선 왕조를 계승한 황제의 전제권과 전제 군주 체제를 표방하고 있다
헌법이 아닌 국제라는 명칭 사용은 국회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으로 제정 · 반포되었기 때문이다
칙명지보(勅命之寶)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국의 지위에 맞게 만든 옥새 중의 하나다
대한제국 애국가(1902년)
대한제국 군악대 지휘자로 초빙된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다. 민영환이 작사하였다
악보는 500부를 제작하여 세계 각국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국내에는 전시된 악보를 포함하여 2개의 원본만 전해진다
특히 이 악보는 표지에 윤치호의 도장이 찍혀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자
러시아는 독일 ·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해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게 하였다(삼국 간섭)
이후 조선 왕실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사태의 반전을 꾀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함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이후 한동안 러시아와 일본이 대치하였으나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였다
청 · 일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사진이다
구한말 러 ·일 전쟁 당시 사진엽서다
일본의 국권 침탈
러일전쟁 후 영국 · 미국 · 러시아 등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을사늑약)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오늘 목 놓아 통곡한다」라는 논설을 실어 이를 규탄하였고, 민영환과 조병세는 이에 항의 자결하였다
을사늑약에 따라 설치된 통감부는 내정까지 장악하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되찾으려고 네델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구국 외교 활동을 펼쳤으나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을사늑약문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체결한 한국 외교권 양도에 관한 (불법)협정문이다
애국 계몽 운동
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내정까지 간섭받는 상황에 이르자 국권 수호를 위해 힘을 기르자는 계몽 운동이 일어났다
대한자강회는 교육 진흥과 산업 육성 등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수호 운동을 벌렸다
신민회는 대성학교 · 오산학교 등 근대 학교를 설립하고 산업 진흥 활동을 벌렸으며 일본군에 맞설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국외 독립군기지 건설에도 나섰다
일본에 대한 국가 채무를 상환하려는 국채 보상 운동도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등의 신문과 소년 등의 잡지도 국민을 계몽하였다
소년 · 대한자강회보 창간호
소년은 1908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잡지고 대한자강회월보는 대한자강회에서 발간한 계몽잡지로
교육과 계몽을 통하여 민족적 주체의식을 고취시켜 독립 자존의 힘을 양성해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데니 태극기(왼쪽) · 김구 서명문 태극기(오른쪽 위) ·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오른쪽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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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 태극기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조선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에게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던 벨기에 출신 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준 태극기다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한국 광복군 제3지대 2지구대에서 활동한 문웅명(일명 문수열)이 1945년 2월 경 광복군 동료 이정수로부터 선물 받은 태극기이다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조선 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다
중앙에 불원복은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의병 항쟁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의병이 봉기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의하는 을미의병과 을사늑약에 항의하는 을사의병 그리고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의하는 정미의병이 차례로 이어졌다
해산한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 투쟁은 1908년에 최고조에 달하였고 일본군은 1909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대토벌 작전을 벌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 이재명이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등
침략자인 일본과 매국노 · 일본 협력자에 대한 응징이 잇따랐다
안중근 의사 유묵(보물 제569-22호)
국가안위노심초사는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다
내용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이다
오른쪽 위에 '증 안강검찰관(贈 安岡檢察官)'이란 글로
안 의사가 옥중에서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 딸 우에노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하여 1976년 2월 11일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기증되었다
말미에는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라 낙관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 난징 · 창사를 거쳐 충칭으로 옮겨졌다
상하이(1919) - 항저우(1932) - 난징(1937) - 한커우(1937)- 창사(1937) - 헝양(1938)
광저우(1938) - 류저우(1938) - 구이양(1939) - 치장(1939) - 충칭(1940)
황국신민서사지주(皇國臣民誓詞之柱) 비석 (1940년)
황국신민화를 강제하고자 조선총독부가 조선 곳곳에 세운 비석이다
창씨개명 사실을 드러내는 호적부
일제강점기에 한국 고유의 성명을 일본식 성명 제도로 바꾸게 하기 위해 창씨 개명을 실시하였다
이때 바뀐 이름은 광복 후 고유의 성명으로 복귀되었다
토지조사사업 자료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한국 강점과 탄압의 핵심 기관이었다
조선 총독은 입법 · 사법 · 행정의 3권과 군사권을 모두 가진 절대 권력자였다
일본군 현역 대장인 초대 조선총독은 헌병 · 경찰의 무력으로 한국인을 억압하고 이에 항거하는 애국지사들을 박해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 토지 소유 관계를 분명히 하여 일본인이 쉽게 토지를 사들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김순덕 할머니가 그리신 '끌려 가는 날'
수많은 한국인이 일제의 침략 전쟁터로 끌려갔다
1938년부터 지원병 및 학병제 · 징병제 등으로 젊은 남성들이 병사로 끌려갔다
많은 노무자가 모집 · 알선 · 징용의 방법으로 탄광 · 공사장 · 공장에 동원되었다
또 젊은 여성들은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질병 · 사고 · 폭격 때문에 불구자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고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또 일제는 헐값에 정부에 판매하는 공출이나 강제 헌납 등의 방식으로 쌀 · 보리 · 금속류 등의 물자를 수탈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 포스터(1940년 경)
일제강점기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발행한 포스터다
조선어 사용금지와 창씨개명 · 강제징집 등을 추진하면서 "훌륭한 군대로 나가기 위해 국어(일본어)생활을 실천하자"는 내용이다
이 연맹은 1940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직한 친일단체다
3 · 1독립선언서
3 ·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낭독한 독립선언서다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주의에 기초를 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독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계 15인 · 기독교계 16인 · 불교계 2인 등 33인의 민족 대표가 서명하였다
3 · 1운동과 독립의 열망
3 · 1운동은 한민족 각계각층이 참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일 시작되어 석 달 넘게 계속되었다
일제는 평화적으로 진행된 만세운동을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3 · 1운동 후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세운 여러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 · 1운동은 핍박받는 세계 여러 민족에게 용기를 주었고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 아래 있던 아시아 지역의 민족운동에 선구적 역활을 하였다
국내의 민족운동
3 · 1운동 이후 국내 각 분야에서 한국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인 교육을 확충하기 위한 학교 설립 운동 · 문맹 퇴치를 위한 문자 보급 운동 · 한글 운동 · 언론 운동 · 일제의 민족 차별을 거부한 청년 · 학생 운동
어린이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소년 운동 · 농민 생존권 확보를 위한 농민운동 · 인력 수탈에 항거한 노동운동
경제 자립을 추구한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하나의 목소리였다
조선어 독본 음반 (1935)
오케이(Okeh) 음반에서 우리말의 독법을 위해 취입한 4학년용 조선어 독본의 음성교재
이 음반에는 「혹 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새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 조직과의 연계 활동과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지만 일제의 탄압과 열강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의 향후 진로를 놓고 독립운동 세력 간에 갈등이 생겨,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에서 이탈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침체에 빠졌으나, 국무위원 김구가 지휘한 한인애족단의 의열 투쟁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 난징 · 창사를 거쳐 충칭으로 옮겨졌다
윤봉길 의사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1932년 보물 제568-1호)
대한민국임시약헌
1927년 3월 5일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3차 개정헌법의 현존 유일 국한문 정본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첫 번째 헌법을 공포한 이래 1945년까지 5차례 헌법을 개정하였다
제3차 개정헌법에서는 임시정부 수반을 없애고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을 최고기관으로 선언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했다
붉은 색 첨삭 내용은 1940년 제4차 개헌 작업을 위해 임시의정원 의장 김붕준이 기록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을 최고기관으로 선언한 내용이 삭제되었다
해외의 독립운동
독립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서전서숙(瑞甸書塾)에 이어 명동학교가 민족 교육에 주력하였고,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부대는 각기 봉오동과 청산리 일대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일본군 부대를 격파하였다
미국에서는 구미위원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였다. 임시정부는 김규식에게 파리강화회의의 선전 활동을 맡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 진공을 준비하였다
김좌진 장군 약력서
1930년 3월 김좌진 장군 장례식에서 낭독한 장군의 약력을 기록한 글이다
1945년 8 · 15광복의 기쁨과 열망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의 사진으로 만든 「숫자 8 · 15」의 모자이크다
38선 설정과 민족 분단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냉전 속에서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단을 맞게된다
전면에 38선 팻말과 바닥의 38선 표시를 연출하였고
오른쪽에서는 남한에서의 사태 전개를, 왼쪽에서는 북한에서의 사태 전개를 사진과 실물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북한에서의 사태 전개
광복 후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소련군의 후원 아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신탁통치에 반대한 우파는 축출되었다
이후 북한을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작업이 독자적으로 진행되어
1948년 3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이 단행되었으며 8월에는 중요 기업체들이 국유화되었다
또한 인민의원을 뽑는 선거도 시행하여 독자적인 북한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신탁통치 지지 전단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전단으로 반탁운동을 배격하고 삼상회의를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삼상회의 지지 전단(1946년)
북조선노동당 창립 대회 소책자(1946년)
김일성의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 신민당의 합당에 관한 내용에서 시작하여 당 강령 · 당 규약 등 9개의 항목을 기록한 책이다
3년간의 미군정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통치기구를 접수하여 직접 남한을 통치하는 군정을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법령을 대부분 유지하는 현상 유지 정책을 썼다
미군정은 인플레이션과 물자부족으로 곤란을 겪는 남한에 식료품 · 피복 · 의약품 · 석탄 · 석유류 등의 행정 구호 원조를 하였다
아울러 경제 부흥 원조로서 철광석 · 중유 · 면화 · 건축 자재 · 화학 약품 등을 지원하였다
기초 생활을 위한 식료품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으로 비료를 비롯한 각종 농업용품 · 피복류 · 석탄 · 석유류 순이었다
신탁통치 반대 혈서
조선민주당에서 활동한 김병수가 하지 중장(미군정청 사령관)에게 보낸 신탁통치 반대 혈서다
광복 후 복간된 신문(서울신문 1946 · 동아일보 1945)
광복 직후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 잔재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성명복구령〉을 시행하여 잃어버린 자기 이름을 되찾게하였고 한글 교과서가 간행되어 그 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한글을 되살렸다
여러 한글 잡지들이 쏟아져 나왔고, 폐간되었던 동아일보 · 조선일보가 복간되고 조선인민보 · 대동신문 등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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