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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2전시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개항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승하고 국민들의 자긍심과 염원을 모아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역사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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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실 / 대한민국의 기초 확립(1948년~1961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 6 · 25전쟁의 참혹한 실상 · 근대국가의 토대 구축을 보여준다

 

 

제2전시실 / 대한민국의 기초 확립(1948년~1961년)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냉전 아래서 국내 좌우 정파의 대립과 미 · 소간의 대립의 결과 한반도에 2개의 정부가 세워졌다

북한은 공산주의를 택했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택하였다

정부수립 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의 전면적 남침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은 자유진영 국가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휴전 후 정부는 한 · 미상호방위조약으로 안보를 튼튼히 하였으며 미국과 유엔의 원조로 경제 복구와 부흥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장기집권과 독재에 기울었고 결국 3 · 15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의 4 · 19혁명으로 무너졌다

그 후 내각책임제 개헌 후 민주당 정부가 세워졌지만 군부의 젊은 장교들이 5 · 16군사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UN결의와 남한 총선 결정 · 5 · 10선거와 헌법 제정 · 대한민국 정부 수립

 

 

 

 

UN결의와 남한 총선 결정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유엔 총회에서는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 실시 · UN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을 결정했다

1948년 1월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다만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지역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전 한반도 선거는 무산되었고

1948년 2월에 열린 유엔 소총회의 결정으로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감시하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1948년 5월, 위원단에서 찬성 4 · 반대 2 · 기권 2로 선거안이 가결됨으로써 남한만의 선거 실시가 결정되었다

 

 

 

 

제주 4 · 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1948년 발생한 4 · 3사건의 진상조사 보고서다

미군정기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 4 · 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6 · 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비극적 사건이었다

2000년 1월 12일 제주  4 · 3특별법이 제정 · 공포되면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되어 2003년 《제주 4 · 3 사건 진상보고서》가 채택되었다

 

 

 

 

5 · 10총선거

유엔의 결의에 따른 5 · 10총선거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최초로 선거권이 부여된 직접 · 평등 · 비밀 · 자유 원칙의 민주 선거였다

남북한의 좌익은 5 · 10총선거를 저지하려 하였으며 일부 중도파는 남북협상 후 총선거에 집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5 · 10총선거는 투표율 95.5%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한국인은 5 · 10총선거에서 처음으로 민주국가의 주권자로서 주권을 행사하였다

 

 

 

 

5 · 10총선거 포스터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남한 총선거의 벽보용 선거 홍보물이다

그림 속 독립문 상단에 「총선거로 독립문은 열린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으며 당시 군정청 건물로 사람들이 투표하러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5 · 10총선거 투표함

1948년 5 · 10총선거 당시 사용했던 목재 투표함이다

 

 

 

 

1번, 2번, 3번 대신 Ⅰ, Ⅱ, Ⅲ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한 배려였는데 196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제헌국회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이 가운데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4석 · 한국민주당이 29석 · 무소속 84석이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개원했으며, 이날 의장 이승만 · 부의장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7월 12일에는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같은 달 20일에는 이승만과 이시영이 제1공화국 정 ·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회에서는 정부조직법 · 반민족행위처벌법 · 양곡매입법 · 국가보안법 · 지방행정조직법 등 20여 건의 법안이 제정 · 통과되었다

 

 

 

 

단기 4281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공포 기념사진이다

이 날이 제헌절(制憲節)이다

 

 

 

 

관보 제1호

1948년 9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제1호로 발행한 관보다

대한민국 헌법 · 정부조직법 · 국무총리 임명에 관한 건 · 초대 내각 명단 · 대통령 취임사 같이 새 국가의 기본 틀이 되는 내용이 게재되었다

 

 

 

 

대한민국 국호 제정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23일 헌법 안을 작성하여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헌법안 심의과정에서 국호 문제는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다

한국과 대한민국은 물론, 옛 왕조시대의 국호였던 고려와 조선까지 거론되어 논쟁이 있었다

결국 국호는 헌법기초위원회의 헌법 안 심의 7월 7일 격론 끝에 표결에 부쳐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17표 · 고려공화국 7표 · 조선공화국 2표 · 한국 1표를 얻어 대한민국이 국호로 결정되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여 반민족적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정했다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되었다

반민족 관련 죄 ·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 · 특별재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 초대 국회는 대통령에 이승만 ·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였다

초대 내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로 구성되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해 12월 유엔으로부터 "선거 감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수립된 유일한 정부"로서 승인받았다

그 후 1950년 3월까지 미국을 비롯한 26개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하였다

 

 

 

 

대한민국 정 · 부통령 및 초대 내각 명단

대통령 이승만 · 부통령 이시영 ·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 무임소장관 이청천 · 이윤영

내무부장관 윤치영 · 외무부장관 장택상 · 재무부장관 김도연 · 법무부장관 이인 · 문교부장관 안호상

농림부장관 조봉암 · 상공부장관 임영신 · 사회부장관 전진한 · 교통부장관 민희식 · 체신부장관 윤석구

 

 

 

 

공포식령(대통령령 제1호)

정부 수립 후 처음 대통령령으로 공포한 정부 공문서식에 관한 규정이다

 

 

 

 

북한의 남침, 6 · 25전쟁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된 후 소련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으나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 · 중국의 마오쩌둥과 무력 통일 계획을 의논하여

1950년 4월 스탈린에게서 남침 계획을 승인받고 마오쩌둥에게서 지원을 약속받았다

단기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자신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다

 

 

 

 

스탈린이 스티코프에게 보낸 기밀 문서(왼쪽)

1950년 1월 말 스탈린이 북한 주둔 소련 군정청 총사령관 스티코프에게 보낸 문서다

스탈린은 무력 남침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은 김일성과 대화하고 도우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공격을 승인하는 과정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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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기밀 문서(오른쪽)

1950년 5월 13일 베이징에서 김일성이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승인했음을 밝혔다

마오쩌둥이 이를 스탈린에게 문의하자 스탈린은 자신이 북한 김일성의 남침계획안에 동의하였으며

이 문제는 중국과 북한이 사전 협의하여 처리되어야 한다고 회답하였다

 

 

 

 

UN군 참전과 반격

6월 25일 한국을 기습 남침한 북한은 6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했고,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되어 북한의 전투행위 중지 및 군대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한반도에 파견된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하는 한편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육군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한국의 해병대는 9월 15일 새벽에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하고 다음날 인천을 함락시켰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전세를 역전시켰다

유엔군은 9월 26일에 서울에 진입했고, 10월 1일에는 38선을 넘어 북상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원산 · 평양 등의 점령에 성공했고, 압록강의 국경지역과 청진 등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1950년 6월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채택한 북한의 전투행위 중지 및 군대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문

빨간 사각 틀안에는 장면 대사가 유엔안보리 긴급회의에 참석한 모습이다

 

 

 

 

6 · 25전쟁 당시 남북군사력 비교

 

 

 

 

마지막 흥남탈출

1950년 12월, 국군과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 때에 10만의 북한 주민들도 함께 탈출했는데 이 작전에 마지막으로 투입된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였다

선원 60명의 7,600톤급 화물선으로서 2,000명 정도가 승선 한도였던 이 배는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나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었고 오히려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탄생하였는데

미국인 선원들은 이 아이들에게 김치 원에서 김치 파이브까지 차례로 이름을 붙였다

 

 

 

 

환기도 되지 않는 배 밑에서는 돌아눕거나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세 살짜리 아이가 젖을 빨고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고 변을 보아도 기저귀를 갈아줄 엄두를 낼수가 없었다

 

 

 

 

교착상태에서 정전으로

중국군의 개입 이후 공산군의 남진은 계속되었으나 공중 공격 등을 통한 유엔군의 반격도 효과가 있었다

유엔군은 1951년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14일에 서울을 재탈환했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4월에 들어서면서 공산군의 재반격도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역공세가 되풀이되면서 전쟁이 전체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들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휴전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진행되었다

1951년 7월 10일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래 양측은 경계선의 책정문제 · 포로송환 문제 등을 이슈로 여러 차례 갈등했으며

중립국 감시위원단 구성 및 포로 중립국 송환 등의 안이 제시되었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휴전협정이 체결된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중지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정전협정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군사령관이 맺은 군사협정문이다

 

 

 

 

군용물자를 재활용한 생활용품

군용물자나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을 재활용한 생활용품이다

 

 

 

 

판자촌 생활

전쟁의 포화가 집중된 서울에서는 많은 주택이 파괴되었는데 전후 월남민과 이농민 때문에 인구는 더 늘어나 주택난이 심각하였다

새 이주민들이 인왕산 · 안산 · 남산 · 낙산 등의 산지나 청계천 등 하천 주변에 몰려들어

판자와 천막을 재료로 판잣집을 지어 일대에 거대한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이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 주요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판잣집에서는 간이 부엌이 붙은 방 한 칸에서 여러 식구가 같이 생활하였다

 

 

 

 

전후 복구와 원조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는 1953년 국민소득의 1.7배나 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한국인은 엄청난 피해에도 좌절하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전후 복구와 재건에 나섰다

미국은 총 27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여 한국을 도왔다

원조 물자에는 시설재도 있었지만 비료 · 원면 · 석유 · 밀 등과 같은 소비재와 원자재가 더 많았다

 

 

 

 

교육의 재건과 인력양성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는 데에 교육을 통한 인력양성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초등학교 의무교육의 실시가 큰 역활을 했다

의무교육제는 헌법에 명시될 정도로 일찌감치 중시되었으나 6 · 25전쟁으로 그 실시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4년부터 6개년 계획으로 본격 추진되었다

교육시설이 부족함에도 1950년대 말에 초등학교 취학률이 95%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도 증 · 신설되었다

성인을 위한 문맹 퇴치도 이루어져 1950년대 말 문맹률은 20%로 떨어졌다

1950년대에 축적된 인적자본은 1960년대 이후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당시 교실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다

 

 

 

 

교실 모형

당시 한 학급 학생 수는 80~100명으로 현재 학생 수의 3배 정도였다

 

 

 

 

당시의 책상 · 걸상

 

 

 

 

당시 교과서

 

 

 

 

광복 후 학생 수의 변화

 

 

 

 

국방부 과학연구소 설립

1954년 설립된 국방부 과학연구소는 종래 병기 · 탄약의 무기개발에서

군용식량 · 의복 · 유 · 무기재료 · 로켓 등의 기초과학과 공업까지 확대 연구하여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경제 부흥의 기반 구축

경제 부흥을 위한 제도적 · 물적 기반이 구축되었다

유상 몰수 · 유상 분배 방식의 농지 개혁으로 지주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하여 자작농이 대거 창출되었다

원조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초의 체계적인 개발 계획인 경제개발3개년계획이 수립되었다

아울러 철도 · 도로 · 통신 · 항만 · 발전소 등의 경제 기반 시설이 복구 · 확충되었다

전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소가 복구 · 증설되었고 원자력에 대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또 탄광 개발과 석탄 운송을 위해 영암선 · 문경선 · 영월선이 개통되었다

 

 

 

 

1950년대 화폐

한국은행은 1950년 6월 12일 설립되어 한국은행권의 발행을 준비하던 중 6 · 25전쟁을 맞이하였다

정부는 공산군의 경제교란 행위를 봉쇄하기 위하여 1950년 8월 28일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제1차 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1951년 10월 한국조폐고시법의 발효와 더불어 1952년 10월 한국 조폐공사가 신 천 원권과 신 오백 원권을 인쇄하면서부터

은행권 인쇄를 모두 한국조폐공사가 전담하게 되었다

 

 

 

 

전쟁 후 대중문화

6 · 25전쟁 후의 대중문화는 전쟁의 비극과 이산의 아픔을 표현하거나 참담한 생활 속의 절망과 자조를 주제로 한 것이 많았다

실향과 이별의 아픔 · 전쟁의 비참함을 표현한 대중가요가 인기를 끌었으며 전쟁이 남긴 상처와 정신적 공황을 다룬 문학작품이 나왔다

극장에서는 서부영화와 같은 수입된 미국영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국산영화도 점차 인기를 끌었다

종합 교양지 「사상계」가 발간되어 한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대중가요 음반

1950년대에는 굳세어라 금순아 · 이별의 부산 정거장 · 단장의 미아리고개 · 전선소야곡 · 고향의 그림자 처럼

실향의 아픔과 전쟁의 비참함을 담은 곡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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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부기는 로멘스 그레이라는 별명을 가진 윤일로의 음반이다

전후 한국사회에는 가난과 곤궁한 삶의 문화도 있었지만 청춘을 예찬하고 인생을 즐길 것을 권하는 문화가 상흔 속에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흥겨운 대중문화는 6 · 25전쟁 이후 대량으로 공급된 미국의 대중문화를 자양분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발자동차(始發自動車)

1955년 8월에 생산하기 시작한 첫 국산차이다

전쟁 후 파괴된 자동차의 부품을 활용해서 자동차를 만드는 재생업이 활발하였는데

최무성씨 3형제가 미군 지프의 부속품을 새로 깎아 만든 국산 부품을 결합해서 시발자동차를 만들었다

시발 자동차는 1955년 10월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 국산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택시로 인기를 끌었다

 

 

 

 

공업화의 첫걸음

시설 복구에 필요한 시멘트와 판유리 · 식량 생산에 필요한 비료 등 중요 중간재를 국내에서 생산하기 위하여

인천 판유리공장 · 문경 시멘트공장이 준공되었고 충부 비료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소비재 산업으로 면방직 · 제분(밀가루) · 제당의 3백(三白) 산업이 발달하였다

이 3백 산업은 과거의 수입품을 국내 생산하여 자급한 1950년대 대표 공업이었다

 

 

 

 

전후의 사회

1950년 중 · 후반의 많은 한국인은 6 · 25전쟁의 폐허 위에서 겨우 생존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질적, 정신적인 황폐함 속에서 다시 사회를 재건하는 일은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다른 한편, 1950년대 중 · 후반은 왕성한 생명력이 약동하는 시기였다

6 · 25전쟁으로 파괴된 물질적 조건은 빈부간의 격차를 줄임으로써 개인의 더 나은 삶과 발전된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공했다

사회적으로는 6 · 25전쟁 이후 더 강화된 반공주의가 사회를 이념적으로 지배했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행태와 부패 풍조도 사회 전반에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새로 유입된 가치 · 이념이 새로운 문화의 전파를 추동하기도 했다

미국 등을 통해 유입된 서양문화는 사람들의 생활 · 문화를 여러모로 변화시켰으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등 사회적 관계의 변화도 나타났다

 

 

 

 

구직(求職)

사진가 임응식의 1953년 작품이다

원작과는 달리 주위가 트리밍 되어 있다

 

 

 

 

1950년대 정치상황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1960년 2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한국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 선포와 국회의원 구속 등의 폭압적인 조치를 통해 소위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연임의 근거를 만들었다

1954년 11월 이승만은 대통령 임기가 중임으로 제한된 기존 헌법을 변화시키기 위해 억지논리를 통해 개헌안을 가결시켰다

이것이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 부통령 후보에 장면을 내세웠고

큰 지지를 얻었으나 갑작스런 신익희의 사망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쉽게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있었던 정부와 여당의 광범위한 선거 비리는

부패와 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확대시켰으며 이는 마침내 4 · 19혁명에까지 이르렀다

 

 

 

 

제3 · 4대 정 · 부통령 선거 벽보(1956)

민주당이 내건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는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세에 몰린 여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라는 구호로 응수했다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 후보는 갑자기 사망했고 장면 후보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4 · 19혁명

1960년 3 · 15부정선거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난 데 이어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180여 명이 숨지는 유혈 참사가 일어났다

학생과 시민의 시위가 계속되자 결국 이승만은 사임하였다

국민이 정권의 부패와 독재를 준엄히 심판한 4 · 19혁명은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

 

 

 

 

1960년 4 · 19혁명 발발 이후부터 1961년 5 · 16군사정변 전까지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