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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운현궁

운현궁(雲峴宮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흥선군의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흥선군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운현궁(雲峴宮) 정문

 

 

 

 

운현궁(雲峴宮) 현판

 

 

 

 

수직사(守直舍)

운현궁 정문 오른쪽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당시 운현궁은 상당히 넓었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 궁에서 파견된 경관들과 관리하는 인원이 많았다

 

 

 

 

노안당(老安堂 사적 제257호)

흥선대원군(1820~1898)이 국정을 의논하던 사랑채로 T자형 평면의 건물로

처마에는 송판으로 만든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이곳에만 남아 있다

노안은 「논어」 가운데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 1) 3월에 상량하고, 같은 해에 완공하였다

 

 

 

 

노안당(老安堂) 편액

석파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난을 그리고 있는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친척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자와 그림을 배우고 묵란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추사는 그의 묵란을 가르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노락당 남행각

 

 

 

 

노락당(老樂堂 사적 제257호)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 1)에 지었다

정면 10칸 · 측면 3칸으로 평면 ㅡ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색이다

노락당은 운현궁 안에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익공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기법은 조선 말기 궁궐 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명성황후 부대부인 생신 축하방문

일반적으로 왕비는 궐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부모의 생신 · 병문안 · 상(喪)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 사가를 방문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여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명성황후는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은 평상복인 치마, 저고리에 마고자를 착용하고 있다

세자는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사규삼을 착용하였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오방장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착용하였다

(명성황후 · 부대부인 · 세자 · 이준용)

 

 

 

 

낙성식 축하 다례연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운현궁을 대대적으로 보수 · 증축하였다

1864년(고종 1) 9월 노안당과 노락당의 낙성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조대비와 철종비가 궁중 소례복인 보를 부착한 당의를 착용하고 부대부인과 함께 노안당과 노락당 낙성을 축하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방 안 / 철종비 · 조대비)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도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조대비)는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권한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당시 조대비가 만 평의 땅에 건물이 지어주었다 하나 현재 운현궁 크기는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방 바같 / 상궁 · 부대부인)

 

 

 

 

이로당(二老堂)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거처하던 곳으로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운현궁의 별당이다

 

 

 

 

노락당 북행각

 

 

 

 

이로당(二老堂 사적 제257호)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 6)에 지었다

*

운하연지(雲下硯池) · 노주석(露柱石)이 마당에 있다

구름 아래 벼루 물을 담아 둔 연못이라는 의미의 운하연지는 방화수통이고

노주석은 횃불을 올려놓는 시설로 요거석(燎炬石) · 정료대(庭燎臺) 등으로도 불렸다

 

 

 

 

석빙고 · 무승대(茂承臺)

석빙고는 얼음을 보관하던 곳이고, 무승대는 난을 올려 놓던 곳이다

 

 

 

 

노락당 · 노안당 뒤꼍

 

 

 

 

우물

 

 

 

 

경송비(慶松碑)

고종이 소년 시절에 자주 오른 노송(老松)에 즉위 후 정2품의 벼슬을 내렸다

 

 

 

 

이로당 동행각 뒷마당

 

 

 

 

노락당 · 이로당 담장

 

 

 

 

유물전시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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