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한양 천도와 함께 종로지역은 도성 동서남북 4대문의 통로를 연결하는 십자가(十字街)가 되었으며
여기에 국가공인의 유일한 시전인 육의전 등의 시전상가가 형성되어 종로지역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상가로 발전하였다
한편 종로네거리에 도성의 각 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는 종루(鐘樓)가 세워진 후에는
이 거리를 종루십자가라 하여 종로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연유하였으며
또한 도성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진다 하여 운종가(雲從街)라고도 하였다
종각역 4번출구
시점이다
보신각(普信閣)
종로사거리에 있는 누각으로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조선 태조 5년(1396) 창건하였고, 고종 때 보신각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1980년 시멘트 2층 건물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잔디밭 앞쪽에 사각돌이 〈수도권 전철 수준점〉이다
보신각(普信閣)
누각 2층에 옛 보신각 동종(보물 제2호)을 대신할 새로운 종이 걸려있다
옛 보신각 동종은 두 번의 화재로 원형이 손상되고 음향이 다소 변한데다 균열로 인해 종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안식하고 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년 11월 1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수도권 전철 수준점
모든 지하철 깊이의 척도가 되는 원점으로 1971년 서울시장이었던 양택식 시장이 표시했다
종로타워(예전 화신백화점 자리)
지하 2층 · 지상 33층 · 높이 133m의 건물로 최상층 33층에는 연인들의 프로포즈 장소로 유명한 레스토랑 〈탑클라우드〉가 있다
건물 23층과 톱클라우드 사이에는 빈 공간이기에 원칙대로 따지면 톱 클라우드는 33층이 아니라 24층이라고도 한다
조선중앙일보 건물(지금 농협중앙회)
1926년 7월 5일 신축하여 일제치하 동아일보 · 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1933~1937)의 사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의 후원으로 몽양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 정간 처분을받았다가 1937년 폐간되었다
수진궁 터(壽進宮址) 빗돌
수진궁은 조선시대에 후사없이 죽은 왕실 자녀들의 혼을 모아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다
본래 세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저택이었다
한국의 만화 여기서 시작하다 조형물
이곳은 대한민보가 있던 자리로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 1면 중앙에 실린 삽화를 형상화했다
「만화」라는 표현이 아직 들어오기 전의 작품이기 때문에 「삽화」라고 명명했다고 본다
만화를 맡은 이도영은 25세의 동양화가로 조석천과 안중식의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하였으며 휘문의숙에서 미술교사 활동을 하였다
삽화는 연미복을 입은 신사를 통해 앞으로 대한민보가 나아갈 길에 대해 밝히고 있다
종로구청(예전 수진측량학교 터 壽進測量學校址)
한말 개화사상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국비유학생인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908년 수진궁을 빌려 설립하였던 측량전문교육기관이다
사복시 터(司僕寺址) 빗돌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수레 · 말 · 마구 · 목장을 맡아보던 관청 터다
궁중에는 내사복시 · 도성에는 외사복시 · 지방에는 목장을 두었다. 여기에 있던 외사복시는 1907년 폐지되었다
중부학당 터(中部學堂址)
사부학당은 조선시대에 한성부의 중부 · 동부 · 서부 · 남부에 설치한 중등교육기관이다
북부 관광방(觀光坊)이었던 이곳에 중부학당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폐지되었다
동십자각
이 목조누각은 1867년(고종 4) 경복궁 복원 당시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한 궁궐의 망루였다
동십자각에는 원래 망루를 오르는 계단이 있었고 경복궁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앞으로 길이 나면서 길 한가운데 동십자각만 달랑 남게 되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빗돌
평화의 소녀상(平和─ 少女像)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민간단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중심이 돼 서울 종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27곳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립공원 등 해외 3곳에도 세워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부부 작가(김운성 · 김서경)의 작품이다
사포서 터(司圃署址) 빗돌
사포서는 궁중의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던 조선시대의 관아다
원래 북부 준수방(지금 종로구 통인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제용감 터(濟用監址) 빗돌
조선시대 궁중의 모시 · 마포 등 옷감의 직조와 의복의 제조 · 공급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던 곳이다
목은 선생 영당(牧隱先生影堂)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이색(1328~1396)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이곳의 영정은 조선 숙종(1711)에 다시 그린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쫓아내자 창왕을 즉위시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애썼지만 실패하고 유배되었다
정몽주 · 길재와 더불어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불리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꼽힌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사옥 터 빗돌
1904년 7월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한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항일 민족 언론이다
이후 이곳에서 중동학교가 문을 열었다
화가 심전 안중식 비
「한국의 만화 여기서 시작하다」에 나온 화가 이도영의 스승이다
뒷면은 화가 고희동이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라 써있다
옥파 이종일(1858 ~1925) 동상
1873년(고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894년에는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2세교육에 힘썼다
1919년 3 · 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2월 27일 밤 장효근 · 김홍규(金弘奎) · 신영구(申永求) 등과 협력하여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독립선언문 3만5천 장을 인쇄해 인종식(印宗植)간사를 통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3 · 1운동으로 3년 복역 중 2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1922년 3월 1일 또다시 보성사팀과 같이 천도교인 등의 단독으로 제2의 3 · 1운동을 계획, 실천하던 중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지조를 지키다가 아사하였다
중동학교(中東學校) 옛터 빗돌
종로구 수송동 85번지 · 개교 1906년 5월 10일
이전주소 강남구 일원동 618번지 · 이전 1984년 3월 1일 · 총동문회
빗돌 뒷면에 써있다
신흥대학 터
일제 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이 1949년 3월 20일 정식 대학으로 인가 받아 개교한 자리다
신흥대학은 1955년 회기동으로 이전하여 1960년 「경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옛터 빗돌
서울 종로구 수송동 80번지 · 개교 1906년 5월 22일, 이전 1980년 2월 25일
이전지 강남구 도곡동 91번지
보성사를 기념하는 조형물
대한민국 종교계와 문화관광부가 3 · 1운동 80주년을 맞아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하였던 옛 보성사 터에 세운 기념물이다
보성사 터(普成社址)
보성사는 1919년 3 · 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곳이다
보성사는 전동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으며,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의암 손병희의 특명으로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 받아
사장 이종일 · 공장감독 김홍규 · 총무 장효근이 1919년 2월 27일 밤에 3만5천 매를 인쇄하였다
일본 측 형사에게 발각되는 위기도 있었으나 족보책이라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
3월 1일에는 윤익선 · 이종린 · 이종일 · 김홍규 등이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1만 부를 발행하였다
일경은 보성사를 즉시 폐쇄하였으며 6월 28일 밤에는 불을 질러 태워버려 이후 터만 남아 오늘에 전한다
조계사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직영 사찰이다
1910년 전국 교구본사의 의연금으로 창건된 「각황사」를 1937년 현재 자리로 옮기고
이듬해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밟아 절 이름을 「태고사」라 하였다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 제정과 함께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하여 1954년 불교정화운동을 벌이며 「조계사」로 개칭하였다
대웅전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사적비
불교중앙박물관
2016년 특별전 준비로 휴관이다
우정총국
우리나라 근대 우편 사업의 발상지다
1884년 4월 22일(고종 21) 칙명으로 우편총국이 설치되고 초대 총판 홍영식이 임명되어 그해 11월 18일부터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동년 12월 4일 우종총국 개설안이 계기가 되어 갑신정변이 일어나 총국 업무는 중단되었다
이 사적은 우정총국 개설 전에는 조선왕조 초기부터 전의감으로 사용되었다
도화서 터 빗돌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으로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이자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전의감 터 빗돌
조선시대 궁중에 쓰이는 의약을 제조하고 약재를 재배하던 관아 터다
조선 말에 우정총국이 들어섰다
민영환 집터 빗돌
집터가 조계사 경내로 조계사 입구에 있다
인사동
언제나 활기찬 인사동이다
쌈지길
쌈지길 옆 골목 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천도교당
천도교는 수운 대신사 최제우께서 창명한 우리나라 자생 종교로 창명 당시 이름은 「동학」이었다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교세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반봉건 · 반외세운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1894년에는 동학혁명을 주도하여 한국근대사를 전환시키는 큰 획을 그었다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였다
천도교당 내부
독립선언문 배부터 빗돌
천도교당 정문 오른쪽에 있다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빗돌
방정환(1899∼1931)은 아동문학가이자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어린이의 날을 제정했다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그 해에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천도교당 정문 왼쪽에 있다
운현궁(雲峴宮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흥선군의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흥선군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 ·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관립교동소학교(지금 교동초등학교)
1894년(고종 31) 9월 18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다
다음 해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어 한성사범부속소학교로 지정되었다
1910년에 교동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고, 1927년 대 화재 후 현재 건물이 개축되었다
지석영 집터 빗돌
지석영은 종두법 보급과 서양 의학을 도입하고 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낙원악기상가
탑골공원 삼일문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파고다공원〉이라고도 불리운다
원각사는 고려 때 흥복사라 불린 절로 조선 전기에 절을 넓히면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으로 인해 연산군과 중종 때 절이 폐사되었다
1897년 한성부 판윤 채연이 탁지부 고문 영국인 브라운의 협력 아래 서양식 공원을 세웠다
처음엔 황실공원으로 제실 음악연주 장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나, 1913년부터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또한 1919년 3월 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 · 1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삼일문 현판
삼일문이란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이다
2001년 11월 23일에는 탑골공원 정문 현판인 삼일문이 떼어지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민족정기가 서린 탑골공원에 일제시대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글이 올라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이유다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1861년 청주 출생, 1882년 동학에 입도, 1883년 동학의 제2교조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로 수도에 전념
동학군의 통령으로 경기 · 충청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합세한 뒤 공주 이인에서 관군 격파
우금치전투에서 현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혁명이 좌절되자 함경도 · 평안도로 피신
1897년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3대 교조가 됨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꿈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전국적으로 30여 개의 학교를 인수 · 운영하거나 지원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을 주도 ·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
팔각정
3 · 1운동 당시 학생들과 시민이 이 앞에 모여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시대에는 시민들이 울적해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우물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성역화)사업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행한 시굴조사 때 발견된 우물 가운데 하나다
당시 우물 내부는 바닥까지 모래와 마사토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 4대문 안에서 민간용 우물이 발견된 사례가 드문 사정에 비출 때, 이 우물은 조선 후기 한양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각사비(보물 제3호)
1471년(성종 2)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 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케 하였다
피맛골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탄 고관들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서민들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한길 양쪽에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습속이 생겼는데, 피맛골은 이때 붙여진 이름이다
단성사(지금 단성골드주얼리센터)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 ·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웠다. 주로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중반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19년 10월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 〈의리적 구토〉를 상영하였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한국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 · 현상 · 편집에 성공하였고
1926년 나운규의 민족영화 「아리랑」을 개봉하여 서울 장안을 들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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