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양요 · 신미양요 · 운양호사건 등 인천 앞바다에 외국함대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에 대한 대비로 1879년(고종 16) 연희진과 같이 인천 동구 화수동에 화도진이 설치되어
인천 해안선을 둘러싼 묘도(만석동)포대 · 호구(논현동)포대 등 31문의 포대를 관할하는 야전사령부 역활을 했다
그러나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고종 19) 6월 28일 연희진은 폐지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에 귀속된다
그후 1894년 갑오경장으로 군제가 개편됨에 따라 화도진도 폐쇄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는 인근지역이 매립되면서 화도진은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으나
1988년 9월 10일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를 토대로 화도진을 복원하고 그 주변을 공원화하였다
동인천역
화도진은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지난 4월 7일 연희진지를 다녀온 후 다시 보고픈 생각이 났다
*
시점이다
동인천역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거리
냉면가게 수에 놀라고 · 냉면그릇 크기에 놀라고 ·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놀란다
화도진공원
화평동 냉면거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잠시 걸으면 왼쪽에 있다
화도진
왼쪽이 내사 · 오른쪽 앞 건물이 사랑채 · 건물이 동헌이다
화도진
화도진공원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안내소가 있고 그 옆에 내사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앞에 보이는 문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내사로 들어가는 문이다
내사
안주인의 거처로 안채라고도 부른다
내사 뒤뜰
낮은 굴뚝은 남을 위한 배려와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내사 담
내사에 있는 여러 개 방 중 하나로 반닫이장 · 화장대 · 화로 등이 놓여 있다
내사 행랑채
작은 문(협문)
동헌에서 내사로 통하는 문이다
육모정(六茅亭)
병사들의 휴식처로 내사에서 동헌으로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있다
짝수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하여 팔각정처럼 짝수로 지었다
동헌(東軒)
통상 수령 등이 정무를 집행했던 곳으로 현감 · 수사 · 병사 · 감사가 주재하는 관아의 본 건물이다
조선 후기 무관 이석구 장군 애마시(愛馬詩) 병풍
"천하를 내달리면 바람과 구름이 일고 한 번 울부짖으면 천지가 진동하니 말의 위용은 백수의 우두머리요
그 공덕을 논하자면 가축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
동헌 왼쪽 방이다
수령 집무실
동헌 가운데에 있다
동헌 오른쪽 방
고종 19년(1882) 5월 22일 고종의 전권대신 신헌과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제독 사이에 한 · 미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이 서구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구미 여러 나라에 대한 문호개방의 효시가 되었다
그 당시 바다에 떠 있던 미국 〈스와타라함〉에서는 21발의 축포를 쏘았다 한다
전시관
동헌 오른쪽에 있는 행랑채를 전시관으로 개조하여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신헌 장군의 영정을 비롯해
불랑기 4호 · 5호 · 대완구 등 무기류와 집기류 등 50여 종의 군사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미국 전권대신 로버트 슈펠트제독
고종의 전권대신 신헌과 한 · 미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신헌 1810~1888 (순조 10~고종 25)
조선시대의 무신 · 외교가로 1876년에 강화도조약과 1882년에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전권대신 슈펠트제독과 한 · 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판삼 군부사가 되었다
신정희(1833~1895 · 순조 33~고종 32)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판중추부사 헌의 아들이다
1878년(고종 15) 8월 고종황제는 당시 어영대장 신정희에게 화도진 축조공사를 맡겨 그 이듬해 7월 완공하였다
1894년 친군통위사 한성부판윤을 거쳐 독판내무부사로 일본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이와 내정개혁안이 결렬되자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고 그후 통위사를 역임하는 등 조부 의직 · 선친 헌과 더불어 3대가 무관 출신이다
화도진도
바닷가 성곽과 바다 건너 작은 섬 월미도 그리고 화도진이 그려져 있다
한 · 미수호통상조약 정본
고종 19년(1882) 5월 22일, 우리나라와 미국간에 국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체결한 조약이다
이후 영국 · 독일 등 유럽국가와 체결하는 수호조약은 거의 한 · 미수호통상조약을 준용하였다
무관 상복
3품 당상관은 쌍호 · 당하관은 단호 흉배를 달았다
천자총통 등의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동헌 우물
동헌 앞 행랑채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랑채
일반적으로 큰 사랑은 바같주인의 거처이며 학덕이 높고 사회적 지위나 가세가 넉넉할 수록 사랑채의 규모가 크고
당대 사회 문화의 척도로서 주인의 정신적 성향 · 경제적 능력을 말해준다
수군 기지였던 화도진에서의 사랑채는 병사들이 거처하던 병영 건물의 하나였다
사랑채
여러 개의 방 중 하나다
화도진(花島鎭) 삼문
솟을 대문이다
한 · 미 수교 100주년기념비
1982년 5월 22일 한 · 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었으나
1988년 9월 10일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를 토대로 화도진을 복원하고 공원화하면서 주변을 정비하고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홍이포 · 중포 · 소포
화도진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화도진공원
석지가 옆에 있다
석지(石池)
전통 건축의 정원이나 건물 사이에 배치하여 물에서 자라는 식물을 기르거나 맑은 물을 담아 투영미를 감상하는데 사용하였다
이곳에 전시된 석지는 화도진영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화평동성당 성모자상
화도진공원에서 화도진도서관과 화평동경로당을 지나 오른쪽에 있다
만석부두로 가는 길이다
할머니 쭈꾸미집
만석동 쭈꾸미거리에 있다
인천역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4.1km · 소요시간 1시간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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