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탄금대(彈琴臺 명승 제42호)는 해발 108m 정도의 야트막한 대문산에 위치하며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합수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탄금대라는 명칭은 악성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한데서 유래하였다
우륵 선생은 원래 가야국 사람이었는데 신라 진흥왕이 가야지역을 차지한 후
사민정책에 따라 충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시 신립 장군은 탄금대에서 8천여명의 병사들과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옛 전쟁터이기도 하다
탄금대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쳐지는 지점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 명승 제42호로 지정되었다
탄금정 인근에 고대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충혼탑과 팔천고혼위령탑 등의 현충시설을 갖추고 있다
충주문화원
시점이다
임란 충신 백기장군 조웅기적비(壬亂 忠臣 白旗將軍 趙熊紀績碑)
충주 출신의 조웅은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나누어 의병을 이끌고
한성으로 가는 길목인 충주 앙성면 태자우(현 능암리 대평촌)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격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사실을 충청도체찰사가 행재소의 임금에게 알려 충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조웅은 깃발을 모두 흰 것으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8도의 의병 중에 “호서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곽재우)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1592년 8월 왜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군이 항복을 권했으나 저항하다가 1592년 8월 4일 사지가 찢겨지는 고통을 겪으며 순절했다
악성 우륵선생 추모비(樂聖 于勒先生 追慕碑)
탄금대 사연 노래비
충주를 대표하는 향토가요로 37년 동안 시민의 사랑을 받아 온 「탄금대 사연」 노래비가
2005년 6월 29일 탄금대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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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 이병환 · 작곡 백봉 · 노래 주현미
땅 / 최은경 1994
충혼탑으로 가는 길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 / 김영란 1994
충주 충혼탑(忠魂塔)
1955년(을미년) 11월에 대한민국 상이군경 용사회 충청북도 충주분회와
대한민국 제대 장병 보도회(지금의 재향군경회)에서 광복 이후 전사한
충주 · 증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 군무원 · 군노무자 2,838위의 넋을 추모하고자 세운 것이다
2004년 5월에 충주시에서 위패봉안실을 마련하고, 그 위에 기존의 탑을 세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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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와 호국영령의 위패를 추가하여 2,910위의 위패를 모셨고
2014년에는 이중으로 모셔졌던 위패를 정비하였다
현재 1,953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매년 6월 6일 이곳에서 현충일 추념식이 열린다
충주 충혼탑(忠魂塔)
소재 화강암 · 높이 8.5m · 건립일시 1955년 11월
현존하는 전국 충혼탑 중 가장 오래되었고, 국내 유일의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충장공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
1592년 4월 28일(음력) 도순변사 신립이 휘하 장졸 8천여 명과 함께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전적지임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다
탑 상단에 형상화 된 혼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하고
아래 부분의 신립장군과 4인의 군상은 죽음으로써 국토를 지키는 불굴의 충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 바위와 바닥부분의 원반모양은 탄금대를 싸고 도는 남한강과 달천의 물결모양을 살려 구성한 것이며
탑 뒷부분의 부조는 당시의 탄금대 전투를 생생하게 느낄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율적(律積) / 이철수 1994
탄금대기로 가는 길이다
탄금대기(彈琴臺記)
충주의 역사와 지리 · 인물과 자연환경을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비석의 높이는 183cm · 폭은 66cm · 두께는 34cm의 화강석으로 1954년에 세워졌다
충주는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이다
또한 땅이 기름지고 교통의 중심지 이기 때문에 삼국시대 때부터 세 나라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세력을 다투었다
이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신라의 특수행정구역이었던 5서경중 하나인
중원소경이 설치되는 등 이처럼 충주는 예부터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져 왔다
또한 충주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의 고장으로 뛰어난 음악가 우륵 · 대문장가 강수 · 명필 김생 등이 배출되어
이 고장의 문화 예술을 꽃피웠으며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중 탄금대 전투 때 활약했던 신립 · 병자호란 때 활약했던 임경업 등이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 비석은 이 같은 과거의 영예로움을 이어 받아 문화의 원천이 되고 인재가 모이는 고장이 되려면
지역 주민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올바른 전통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비석의 글은 최남선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이 쓴 것이다
탄금정(彈琴亭)
탄금정(彈琴亭) 현판
신립장군순국지(申砬將軍殉國之址) 빗돌
열두대
탄금대 북쪽 남한강 변 절벽 위에 있는 바위로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이곳에서 강 아래를 열두 번이나 오르낙 내리락 했다고 하여 열두대라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의 격전지였고 1592년 왜군이 선산 · 상주 · 문경을 차례대로 진격했다
조선 최정예 부대의 장수였던 팔도대원수 신립이 전투에서 패하자 남한강에 투신했다고 전해진다
용섬
탄금대교 · 우륵대교가 너머로 보인다
용섬
충주 탄금대공원 수상스키장
우륵 선생 탄금대비
신라 진흥왕(551) 때 악성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탄주(彈奏)하면서 음악을 연마하던 곳이다
선생은 원래 가야국 사람으로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었으며
신라에 귀화하여 왕의 배려로 국원(國原 충주)에 살면서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가르쳤으며
이 때 가야금곡이 궁중악으로 되었다
탄금대 대흥사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
비의 받침돌은 거북 형태로 만들고 앞뒤 길이 260cm · 폭 147c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빗돌은 높이 197cm · 너비 79.5cm · 두께 28.5cm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
앞면에는 「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라 쓰고 뒷면은 한글로 비문을 쓰고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 뜻을 명확히 하였다
개석(蓋石)은 이수 형태로 너비 100cm · 두께 51cm · 높이 100cm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다
탄금대 대흥사
대흥사가 자리잡은 산을 대문산이라 불러왔으나
당시 가야국 악성 우륵이 이곳에 와서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하여 이후로부터는 탄금대라 불렀다
대흥사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의 창건주 미상의 용흥사가 있었던 곳으로
거란족의 난의 당하여 사찰이 소실되었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용흥사 폐허 후, 근 천 년 후 법우 큰스님께서 뜻한 바가 있어 1956년 3월 이 터에 대흥사를 재건하게 되었다
후에 2대 주지 지정 큰스님께서 1994년 6월 미륵부처님을 모시고
2003년부터 대웅전 불사를 시작으로 약사전 · 산신각 · 종각 · 법고각 · 요사체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또한 2019년에는 포교를 위해 충주 자유시장에 포교원을 개원하였다
현재는 3대 주지 스님께서 포교에 전력하고 있다
카페 웨지52(WEDGE 52)
커피 전문점이다
쉼터
매발톱꽃밭
용섬 데크 쉼터
탄금사정
국궁장이다
초하 / 엄태식 1994
여울-94 / 홍창기 1994
야외음악당
충주문화원 앞이다
마침점이다
충주 중원문화길 안내도
충주문화원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