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나루
과거 남한강 수운의 최대 중심지로 동과 서 · 남과 북의 문물이 집산되던 곳이다
목계나루는 1930년대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이기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의 내륙항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기도 · 경상도 · 강원도 일부의 지역과 연계소통하며
성황을 이루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나루이다
쌀이나 소금 등을 실은 배가 수시로 드나들고, 배가 들어와 강변장이 설 때면
각지에서 장꾼과 갖가지 놀이패와 들명이들이 왁자하게 몰려 난장을 벌이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의 5대 하항 중 하나라 해서 오목계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800여 호에 이르는 주민들이 상업 활동에 전념 할 정도로 번성했으며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현재 계승되고 있다
목계나루터 빗돌
산계동과 묵밭골의 명칭을 따서 목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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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 이효승송덕비가 옆에 있다
청람 이효승송덕비(淸嵐李孝承頌德碑)
이효승은 전주이씨 경명군파 12대손으로 1928년 엄정초등학교 10회 졸업 · 충주교현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41년 엄정면장을 역임하였고, 1952년에 초대 충청북도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도정에 참여하였다
1958년 최초의 직선제로 엄정면장에 당선되는 등 4회에 걸쳐 13년간을 엄정면장으로 봉직하였다
목계국민학교를 개교할 때 자신 소유의 토지 3,300m²을 기부하였고
마을 발전을 위해서도 토지 9,900m²를 희사하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였다
이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중앙이사 · 충주원예조합 이사 · 충주유도회 부회장 · 엄정초등학교 동문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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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효승의 높은 뜻을 후손에 길이 알리고자 주민들이 청람이효승송덕비를 세웠다
1992년 타계했을 때 지역을 위해 노력한 공적을 기려 엄정면 최초로 면민장을 거행하였다
목계장터 /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갠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허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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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발표한 충청북도 충주 출신 시인 신경림의 작품이다
장돌뱅이들의 터전이었던 남한강 대표적인 나루터이자 장터였던 목계장터를 배경으로 한다
장돌뱅이들의 삶과 애환을 느낄 수 있다
나루터 빗돌 / 목계주민 일동 2002. 7. 25
목계나루 조망대
목계나루터
목계교가 보인다
충주 목계솔밭 캠핑장
목계대교 · 남한강대교가 보인다
충주목계나루 안내판
청보리밭
유채꽃밭으로 가는 다리다
유채꽃밭 가는 길 안내판
엄정 목계나루 유채꽃밭
유채꽃은 거의 다 졌다
엄정 목계나루 유채꽃밭
엄정 목계나루 유채꽃밭
유채꽃밭 포토존으로 가는 길인데 꽃이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
목계교
수레국화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공격했을 때, 프로이센의 루이제 왕비는 어린 자녀들을 수레국화가 핀 들판에 숨기고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수레국화로 화관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그 자녀들 중 한 명이 프로이센 7대 국왕이자 초대 독일제국의 황제가 된 빌헬름 1세이다
빌헬름 1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황실 문장으로 수레국화를 정했으며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하자 수레국화는 자연스레 독일의 국화가 되었다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수레국화의 꽃말은 행복 · 섬세 · 유쾌다
움집
어린이 승마체험장
목계나루 부흥당(富興堂)
목계나루 성황당으로 여서낭과 산신 용왕신을 함께 모시고 있으며 서낭각시가 가운데 모셔져 있다
명칭도 특이한 부흥당에서는 매년 정월초 아흐레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목계나루 부흥당(富興堂)
목계는 남한강 중상류에 위치한 곳으로 예로부터 하상교통이 활발한 내륙 포구였다
상류로 제천 · 단양 · 영월 · 정선이 있고 하류로 원주 · 여주 · 양평 · 한양이 있어 하상교통의 중심에 목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육로로 충청은 물론 강원 · 영남으로 통하는 중심에 놓여 있어 목계는 하상과 육로교통에 요충이었다
그런 탓에 목계는 상업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권번이 있을 만큼 흥성해
「가흥은 울치레 목계는 기집치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목계나루 부흥당(富興堂) 현판
목계는 190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2000여 명의 주민이 밀집해 살았으며
전국 다섯 번째 안에 드는 곳이라 하여 오목계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물길을 이용하는 배꾼과 떼꾼들에게는 막희락탄 · 고유수탄 등의 험한 물길이 있어
목계는 일의 성패를 좌우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험한 물길을 무사히 지나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고자 목계 영산하의 서낭당에 제를 올리고 치성을 드렸다
목계나루 부흥당 유래비
청장(淸將) 이여송의 모사(謀士) 두사충(杜思忠)과 같이 다니며 풍수를 공부하고 다니던
금강산 수행승이 이곳에 와 부흥산이 불의 정기가 강하여 목계마을에 빈번하게 화재가 일어나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물길을 돌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마을 촌로에게 해주었고
이에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흙을 쌓아 작은 산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어 오늘에 목계 솔밭이 되었다
이렇게 남한강 물이 목계 부흥산 밑을 지나게 되어 남한강의 수신(水神)과 부흥산의 산신(山神)이 조화를 이루어
마을의 평안을 이루었으며 상극이 되는 산신과 수신을 위안하기 위해 서낭당을 지었다고 한다
거북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