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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김유정기념전시관

김유정기념전시관에는 김유정 선생의 생애와 연대별 작품집과
사진과 서한 등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유정기념전시관

 

 

김유정 생가 · 김유정기념전시관

 

 

김유정 상(金裕貞 像)
1908년 1월 11일 춘천 실레(증리)마을에서 출생
재동보통학교 · 휘문고보 졸업 · 연희전문 · 보성전문 중퇴했다
1937년 3월 29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김유정기념전시관 옆에 있다

 

 

실레마을 · 김유정문학촌
이곳 실레마을은 작가의 생가가 있고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가 되는 살아 있는 문학기념관이다
전국의 많은 문학기념관 중 유일하게 촌(村)자가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유정기념전시관

 

 

세월은 참 쏜살 같아
헤어진 지 벌써 반년이 되었구먼
엽서는 잘 받았네
그간 탈없이 지냈는지 궁금하네
야학당은 순탄하게 진행된다니 다행일세
요즘도 글 쓰는 일은 여전할테고
소식이나 끊지 말고 지내세그려
바빠서 이만 붓을 놓겠네
아우(친구 사이 겸양의 표현)가 씀
*
유품 1호
1936년 2월 11일 대구에 사는 친구 김학수가 춘천 실레마을 김유정에게 보낸 엽서

 

 

김유정, 그 쓸쓸하고 짧았던 생애 · 말더듬이 멱설이에서 한국 문학의 대작가로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과 계몽활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서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쓰기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박녹주(1905~1979 · 미친 사랑의 노래)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 출생으로 12세 때 박기홍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송만갑 · 정정렬 · 유성준 · 김정문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 1945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현재 〈흥보가〉 무형문화재인 박송희 명창과 무형문화재이며 박녹주 명창의 수양아들인 조상현 명창으로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와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세 살 연하의 김유정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강원도아리랑
유난히 김유정의 작품에는 아리랑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강원도 아리랑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만무방
응칠이의 입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빚만 늘어나 소작마저도 어려워 야반도주를 하고 수수 일곱 되에 같은 농민끼리 살인도 마다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소설 「안해」에서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려는 따라지와 만무방들의 모습을 애절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만무방들이 살았던 농촌과 김유정

 

 

해학
작품 속의 만무방과 따라지 같은 주인공보다 독자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 터진다
독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내려다보며 마음껏 웃는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왠지 모를 비애와 동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한 산골나그네 김유정

 

 

청풍김씨 세보
청풍김씨의 족보로 아버지 김춘식과 형 김유근 · 김유정이 올라 있다
김유정은 일명 김나이로 불렸다

 

 

휘문고보 학적부
신장은 척(尺) · 체중은 관(貫)으로 쓰여 있다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소화(昭和) 5년 학칙에 의해 제명처분했다는 글이 있다

 

 

김유정의 가족
김유정 23세 때(1931) · 김유영(둘째 누님) ·  김영수(조카)

 

 

신춘문예 소낙비 1등 당선 축하 단체 사진(중앙 우측의 ×표가 김유정)
조선일보 1935년 1월 20일

 

 

장편소설 신배녕

 

 

김영수 신배녕 육필원고
김유정과 생활을 함께 했던 조카 김영수의 소설 습작 장편소설이다
내용은 농촌소설로 글과 글씨체는 김유정과 거의 흡사하다

 

 

전시실 내부

 

 

김유정 작품연보 · 김유정의 가계도 등이 있다

 

 

김유정 작품연보

 

 

김유정의 가계도
첫째 누이 유달 · 김치에 깨소금을 넣었다고 시집에서 쫒겨나 일찍 사망함
둘째 누이 유형 · 아이를 못 낳아 소박을 맞고 혼자 피복공장에 다녔는데, 김유정이 얹혀 살았음
셋째 누이 유경                                                                                                     
넷째 누이 유관 · 정승댁으로 시집을 갔는데 재산을 떼어 오라는 시모의 구박을 받다가 친정에서 병들어 죽음
다섯째 누이 유흥 · 경기도 광주 과수원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김유정은 그 집 토방에서 최후를 맞음
누이동생 부흥 · 인물이 좋고 똑똑했던 누이동생은 숙명여고 재학 중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자
남학생들이 편지를 보내고 집까지 따라다녀 김유근이 꾸중을 하고 머리를 깎았는데
그때부터 말을 하지 않다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와 나중에 수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

 

 

김유정 그의 삶을 더듬다
부친 김춘식과 모친 청송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한다
10대조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한 실학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은 현종의 국구(임금의 장인)였고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다. 그의 어릴 적 아명은 멱서리였다
아버지 김춘식은 춘천 실레마을의 6천석을 웃도는 지주였고, 서울 운니동에 백여 칸 되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1915년 7세 때 어머니, 9세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운니동에서 관철동으로 이사하여 3년 간 한문공부와 붓글씨를 익힌다

 

 

김유정 그의 삶을 더듬다
1929년 21세, 이때부터 누이 유형의 집에 얹혀 지낸다
둘째 누이는 김유정의 작품 중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 〈따라지〉 · 〈연기〉 · 〈슬픈 이야기〉 등에 독특한 캐릭터로 형상화 되어 있다

 

 

1935년 스물일곱 살
단편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당시의 김유정의 모습

 

 

김유정의 필적과 사진(소낙비 원고)
1938년 삼문사에서 발간한 동백꽃 속표지 다음 장에 실린 것임

 

 

오월의 산골작이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 섯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씨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1960년대의 금병산 자락의 실레마을
사진의 좌 하단이 생가터이다

 

 

봄봄

성례를 안 시켜주는 장인 봉필과 드잡이하는 광경을 인형으로 표현해 놓았다

 

 

작품 배경지도
김유정의 소설 속의 1930년대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박녹주 · 박태원 · 이상 · 채만식 · 김문집 · 안회남

 

 

박녹주(1905~1979)
판소리 명창.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홍보가) 예능보유자
1930년대 유행했던 창극 심청전 · 춘향전 등에서 모두 주연을 맡을 정도로 당대의 스타였다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첫눈에 반해 2년여간 구애했지만 거절당하고 문학의 길로 전념한다

 

 

박태원(1910~1986)
193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소설가이다
필명으로 구보(仇甫) · 구보(丘甫) · 몽보(夢甫) · 박태원(泊太苑)이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하면서부터 예술파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작품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여인성장 · 장편 천변풍경 등이 있다
김유정이 세상을 떠난 직후 〈백광〉에 「고 유정 군과 엽서」를 발표하여 애도를 표현하였다

 

 

이상(1910~1937)
시인 겸 소설가이다.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재를 일으켰고 같은 해 동해, 봉별기 등을 발표했다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박태원 · 김유정과 친하게 지냈다
이상은 김유정과 마찬가지로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1936년 가을 어느 날 김유정을 찾아가 동반자살을 제의하지만 유정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리고 다음 해 봄 · 김유정이 사망하고 열아흐레 되던 날
이상도 일본 도쿄(동경제국대학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문단에 전해진다

 

 

채만식(1903~1950)
소설가이며 호는 백릉(白菱) · 채옹(采翁)이다
중앙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예과에서 수학했다. 사립학교 교원과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퇴사했다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단편 「세 길로」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작품으로 레디 메이드 인생 · 탁류 · 태평천하 등이 있다
김유정이 사망한 후 「밥이 사람을 먹다 - 유정의 굳김을 놓고」를 〈백광〉에 발표하면서
유정의 죽음을 통해 문단의 궁핍함을 탄식하였다

 

 

김문집(1906~1979)
대구에서 태여났으며 평론가이다
1936년 평론 〈민족적 전통에의 방향〉에서 한국적 개성을 발굴하고 창작해야 한다는 논지를 발표하고
조선 언어예술의 극치로 김유정의 작품을 꼽았다
김유정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자비를 들여 병고작가후원금을 걷기도 하는 등 김유정을 아꼈다고 한다
그는 "가치의 창조가 작가의 생명이라면 가치의 재창조는 비평의 혈혼(血魂)이다"라고 하면서 비평의 창조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비평집으로 「비평문학」(1938) 등이 있다

 

 

안회남(1910~미상)
소년과 기생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1930년대 신변소설의 대표적 작가로 꼽힌다
일제징용 경험 이후 작품경향이 현실 지향으로 변화하였다
본명은 필승(必承)이며,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쓴 안국선의 외아들로 태여났다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지금의 휘문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김유정과 같은 반으로 각별히 친하였으며
「겸허-김유정전」이라는 실명 소설을 통해 작가 김유정의 짧은 생애를 생생히 그려냈다
그 외에도 「작가 유정론-그 1주기를 당하여」, 「악동」이란 산문으로 죽은 김유정을 회고한 글을 남겼다

 

 

김유정 소설展 / 야앵
아이구! 꽃두 너머 피니까 어지럽군!

 

 

김유정 소설展 / 두꺼비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김유정 소설展 / 가을
헛웃음이 나온다

 

 

김유정 소설展 / 봄과 따라지

 

 

김유정 소설展 / 애기

 

 

김유정 소설展 / 따라지

 

 

김유정 소설展 / 땡볕

 

 

김유정의 문학광장 · 김유정과의 만남

 

 

김유정의 1933년 · 1934년 · 1935년 · 1936년 · 1937년

 

 

김유정과 동시대에 활동햇던 작가들
채만식 · 이석훈 · 정인택 · 최정희 · 안회남 · 이상 · 김문집 · 현덕

 

 

구인회
김기림 · 정지용 · 이효석 · 이태준 · 이무영 · 조용만 · 박팔양 · 박태원 · 김환태

 

 

1930년대의 한국소설
당시 우리 농촌의 살림은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고 일제의 징세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와 폭동이 꼬리를 물었다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서울에는 근대 자본주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풍속이 생겼다

 

 

필승 전(前)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문우들이 말하는 김유정
1937년 3월 29일 새벽 김유정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문우들에게 알려진 것은 10여 일 후 자주 문병을 갔던 현덕에 의해서였다
김유정의 글을 가장 많이 실었던 잡지 조광 5월호에는 추모특집이 실렸다
이어 백광에서도 5월 특집으로 문우들의 추모글을 실었다
이때 김유정과 친분이 있던 작가들은 김유정과의 인연 · 고인의 인품 · 작가로서의 면모에 대해 술회하였다
김유정과 휘문고보 동기동창이며 사이가 각별했던 안회남을 비롯하여
이석훈 · 채만식 · 박태원 · 이상 등으로, 이들은 당대 내노라하는 작가들이었다

 

 

봄 · 봄
김유정 작품 선집

 

 

동백꽃

 

 

동백꽃

 

 

김유정 단편선

 

 

봄 · 봄, 동백꽃

 

 

만무방

 

 

봄봄 외

 

 

동백꽃
1940년 세창서관 간행 오리지널 디자인 초판본 동백꽃

 

 

김유정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활동
1968. 5. 29 김유정문인비 건립
1978. 3. 29 김유정기적비 건립(실레마을 금병의숙 터)
1993. 10. 9 제1회 김유정백일장(현재까지 강원도민일보)
1995. 10. 7 제1회 김유정소설문학상 공모 및 수상(이후 현재까지 강원도민일보)
2002. 8. 6 김유정문학촌 개관

 

 

전시실 내부
나오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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