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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청송 송소고택

송소고택(松韶古宅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250호)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세손 송소 심호택(沈琥澤)이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옮겨오면서 지은 99칸의 저택으로 1880년 경에 건립되었다

2003년부터 고택체험 시설로 개방하였으며

2011년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체험형 숙박부분 최고의 상인 '2011년도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했다

현존하는 99칸 전통 한옥 중에서도 보존 관리 상태가 뛰어나며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함께 9대에 걸쳐 무려 250여 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고택이며 청송 심부자(沈富者)가 살았던 집이다

 

 

송소고택

청송심씨는 전통의 명문가로 시조는 심홍부이고,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을 지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증손인 심덕부와 심원부 형제부터 계보가 크게 둘로 나뉘어졌다

형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공으로 회군공신에 추록되어 가문의 영달을 연 인물이다

반면에 심원부는 이성계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

이때부터 청송심씨는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나뉘게 되었다

심덕부의 후손을 가리켜 경파 · 청송을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 퍼져 사는 심원부의 자손을 일컬어 향파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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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고택이 왼쪽에 있다

 

 

 

 

송소고택

강릉 선교장 · 보은 선병국 가옥과 함께 조선의 3대 99칸 집으로 꼽힌다

대문은 솟을대문에 홍살문을 설치하였다

 

 

 

 

송소세장(松韶世莊) 편액

송소고택의 대문 현판 뒤로 홍살문이 있다

 

 

 

 

큰 사랑채 · 행랑채(문간채)

심처대는 고려에 충절을 지킨 심원부의 자손이었다 하여 그 또한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선대가 살던 청송 덕천마을에서 호박골(청송군 파천면 지경리)로 분가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궁핍하고 힘든 살림이었지만 의와 정은 도타웠다. 무엇보다 효심이 지극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덕천마을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던 중 엄동설한에 눈밭에 쓰러져 있던 노승을 구했고

노승은 심처대를 근처의 산언덕으로 이끌었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자리였다

"이곳에 묘를 쓰시오. 하고, 지금 가진 심성을 잘 지켜 살아가면 대대로 발복할게요"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큰 사랑채

주인이 거처한 큰사랑채는 정면 5칸 ·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사랑이 오른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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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있다

 

 

 

 

큰 사랑채 대청마루

심대처는 고마웠지만 묫자리는 먼 훗날에나 닥칠 일이라 여기고 담담히 일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아내가 오래고 깊은 병에 시들대로 시들더니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심처대는 그 노승이 점지한 곳에 아내의 묫자리를 썼다. 그리고 늘 하던대로 성실히 일을 하며 집안을 지켰다

이후 심처대의 집안은 만사가 형통함은 물론이거니와 재산 또한 착실하게 불어났다

어찌나 거칠 것이 없었는지 만석에까지 이르렀고, 1960년대까지 무려 9대에 걸쳐 만석꾼을 배출했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못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

대청마루에는 들어열개 문이 있다

 

 

 

 

행랑채(문간채)

세월이 7세손 송소 심호택의 대에 머물 때였다. 심호택의 고민이 날로 깊어졌다

호박골이 너무 외진 데다 재물을 탐내고 달려드는 이가 날로 늘어나니 더 이상은 아니 되겠다 하여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살림터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심호택은 호박골과 덕천마을을 부지런히 오가며 땅을 물색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대목장이 내려왔고, 당시 궁궐 건축에나 쓰던 적송이 바리바리 실려왔고 당연히 거금이 오갔다

그러자 도둑들이 심호택 없는 날을 골라 그의 집으로 들어닥쳐서는 세간을 부수고 사람에게 횡포와 난동을 부렸다

그때 심호택의 노모가 나섰다 "재물만 가져가면 그만일 것을, 어찌 멀쩡한 집을 부수고 애먼 사람을 해치는가?

내 곳간으로 안내할 터이니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게"

그런데 그렇게 털고 그렇게나 쓸어갔는데도 심호택의 재산은 끄덕 없었다

덕촌마을의 집은 1890년 지어졌다. 99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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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 문 앞에서 봤다

 

 

 

 

우물

덕촌마을 이주 후에도 심호택의 부는 건재했다. 그만큼 나라에 세금도 많이 냈다

갑오개혁(1894) 즈음 나라에서 세금을 은화로 내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였다

심호택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계고을(의성군 안계면)에 있던 전답을 모두 처분해 은화로 바꿨는데

고을의 은화란 은화가 모두 심호택에게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양과 부피가 어마어마했다

하여 그 은화를 청송으로 실어오는 행렬이 무려 10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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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랑채 왼쪽으로 별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별채 문

심호택의 날숨이 길었다. 시국이 말이 아니었다

일제의 차관공세는 갈수록 노골적이었고, 1907년에 이르러 나라 빚이 1천 300만원에 달했다

심호택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국채보상회장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2009년 7월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새롭게 공개한 25종 자료에 따르면 심호택은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

큰 사랑채에서 별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별채 바깥문

그런데 피는 못속인다 했던가, 광복 이후에 농지개혁이 일어났을 때였다

심호택의 아들 심상원과 그의 아들 심운섭은 가히 선구적이라 할 중대한 결정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지역의 소작농에게 분배함으로써 지역에서 최초로 자작농이 창설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심부자는 9대째에서 「부자」를 내려놓았다. 실로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

별채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이다

 

 

 

 

별채

오른쪽은 누각으로 되어 있다

 

 

 

 

나무굴뚝

큰사랑채 뒷쪽이다

 

 

 

 

안채 옆 면이다

 

 

 

 

장독대

 

 

 

 

송소고택

대밭이 있다

 

 

 

 

굴뚝

 

 

 

 

안채 문

 

 

 

 

작은 사랑채

사랑채 옆문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있다

 

 

 

 

작은 사랑채

안채로 들어가는 문 양 옆에는 사람 얼굴 형상을 한 장독이 있다

 

 

 

 

안채

안주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 마당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 상류층 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안채 굴뚝

 

 

 

 

안채 우물

 

 

 

 

안채 문

큰사랑채로 나가는 문이다

 

 

 

 

방아갓채

 

 

 

 

화장실

 

 

 

 

옆문

방앗간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문이다

 

 

 

 

사무실

황기엿을 판다

 

 

 

 

행랑채(문간채) · 헛담

오른쪽에 조금 보이는 헛담은 큰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에 있는데

안채를 드나드는 사람을 사랑채에서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특히 남자들이 대문이나 사랑채에서 여자들이 있는 안채를 보지 못하도록 설치했다 해서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세면장 · 화장실 담

 

 

 

 

세면장

수건이 앞에 널려 있다

 

 

 

 

신처대의 11세손인 집 주인

송소고택과 고택체험에 대해 들어보았다

 

 

 

 

덕천마을 큰내 이야기 길 안내판

 

 

 

 

덕천마을 큰내 이야기 길 안내판

총 길이 약 6.2km, 총 소요시간 약 3시간

*

(2020,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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