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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2존

유서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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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 2존 / 개항 · 대한제국기의 서울(1863~1910)

서울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새 바람을 돌아보는 공간으로서

자주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식민지화를 위한 압력이 엇갈리는 가운데 일상생활에 파고든 새로운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존 / 개항 · 대한제국기의 서울

전통을 딛고 황도를 꿈꾸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서울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1865년 정부는 임진왜란 때 불탄 뒤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다시 짓기로 결정하였다. 왕도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의지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이듬해, 한강에 프랑스 군함이 나타났다. 제국주의 열강의 서울 침투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후 서울은 자주적 개혁을 위한 노력과 식민지화를 위한 압력이 엇갈리고

한국적 전통과 서구적 근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사람살이의 모든 면이 격변하는 공간이 되었다

거듭되는 정치적 변란 속에서도 서울에는 서양식 건물이 늘어갔고 전기 · 석유 · 성냥 · 유리 등 새로운 물질들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었다. 더불어 서울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개조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황궁이 되고 그 정면에는 동양적 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이 건립되었다

여러 도로가 신설 · 확장되었으며 종로에는 전차가 놓이고 공원이 생겼다

서울은 동양적 전통과 서구적 근대가 조화 속에 공존하는 도시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1904년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대한제국이 서울에 담으려 한 이상을 짓밟았다

 

 

 

 

세계의 문을 열다

1876년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규 체결 이후 외세는 조선사회의 변화 방향을 좌우하는 기본 요인이었다

정부는 처음 일본과 중국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경험을 참고하고 배우려 하였다

신문물 도입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사회 내부에서 대립과 갈등이 격화하였으나

정부는 반대 세력을 짓누르면서 미국 · 러시아 · 영국 등의 열강과 통상관계를 확대하였다

188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늘어났다.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도 생겼다

서울은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 다른 도시들에 관한 정보도 들어왔다

도시 공간 곳곳에, 그리고 서울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차츰 이국적 요소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국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는 서울 공간과 서울사람들의 삶에서 서로 갈등하면서도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도성 원형의 회복

정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에 회복하지 못했던 조선 초기의 도시 원형을 회복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가장 힘썼던 것은 경복궁의 중건이었다

고종이 등극한 후 1865년에 시작한 경복궁 중건은 7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경복궁은 다시 중심이 되었다

도성의 정비는 궁궐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의 사대문을 연결하는 성벽이 허물어진 곳을 정비하였고 동대문인 흥인지문도 보수하였다

새로 정비한 육조거리에 의정부 등 관아도 신축하였으며

1895년, 숭례문과 운종가를 잇는 곳에 자리하여 도시의 중심이 되어 있던 보신각을 재정비하고 액을 달기도 했다

북궐인 경복궁과 동궐인 창덕궁이 병존하고 숭례문과 흥인지문으로 대표되는 도성이 정비된 것은 도성 구조가 재정비됨을 뜻하였다

 

 

 

 

집조(19세기 말) · 대한민국 여권 · 훈시문(1904)

 

 

 

 

개항과 개시장

1882년 조선과 청국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청국 상인들은 서울과 양화진에서 자유롭게 거주하며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1885년 영국이 맺은 통상조약을 계기로 다른 나라 상인들에게도 허용되었다

1885년 조선 정부는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서울에 외국인 거주지를 지정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은 남산 북쪽 기슭 · 청국인들은 청계천 수표교 주변 · 서양인들은 정동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다

청국과 일본의 상인들은 서울에서 상권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이들의 손을 거쳐 양품(洋品)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양의 잡화 · 중국 비단 · 일본 면포 등이 서울에 수입되었다

조선 상인들은 외국 상인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라고 요구하며 장사를 중단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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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개화

정부는 1880년 일본에 사찰단을 1881년 청국에 유학생단을 파견하였고 이듬해에는 미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냈다

외교사절단원 중 일부는 유럽까지 순회하고 돌아왔다

세계의 실정을 확인한 정부는 신문물 도입을 위한 정책을 서둘렀다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별기군 · 육영공원 · 박문국 · 제중원 · 전환국 · 잠상공사 · 전운국 · 우정국 등

군사 · 교육 · 출판 · 의료 · 산업 · 통신 등 각 분야에 신식 정부기구와 제조장을 신설하였다

그런데 개혁에 반대하거나 개혁에 찬성하면서도 속도와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이 의견 대립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폭발하였다

신문물을 접한 서울사람들도 처음에는 호기심 · 놀라움 · 감탄 · 두려움 등의 복잡한 감정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였으나

곧 그것들이 편리하고 쓸모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국 대사관 모형과 서울 속의 각국 대사관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였다

대한제국은 동양의 전통적 제국인 동시에 만국공법이 인정하는 근대적 제국다운 면모를 두루 갖추려 하였다

이에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작한다'는 뜻의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강령으로 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국가 의례가 재정비되고 근대적 교육과 산업 · 교통시설이 확충되었다. 서울을 제국의 황도에 걸맞게 개조하는 사업도 진행되었다

1880년대부터 각국 공사관과 신식학교 · 종교 시설이 모여 있던 정동은 서울의 새 중심지가 되었다

옛 대로와 경운궁을 잇는 새 도로가 만들어졌으며, 작은 도로는 확장되었다

경운궁에는 서양식 건물도 여럿 들어섰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과 정동은 전통과 근대 ·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공존을 추구한 대한제국의 개혁 이념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제국의 상징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양적인 제국의 상징과 더불어 만국공법적인 국가의 상징을 함께 채택하였다

전통적인 상징으로 황제의 지위로 격상한 의례를 채택하여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내면서 황제의 복식인 12장복을 갖추어 입었다

곤룡포도 적색에서 황색으로 바꾸어 전통적인 황제 복식으로 바꾸었다

경운궁에는 중화전 답도와 천장에 황제를 뜻하는 용을 부조하여 넣었다

서구적인 제도를 도입하면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상징물도 새로이 만들었다

1882년에 제정한 태극기는 전통적 상징인 태극을 근대적 제도인 국기에 도입한 예이다

우표나 주화 · 훈장 · 건축물 등에는 태극뿐만 아니라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李花)이나 황제를 상징하는 매의 문양을 넣었다

황제는 군가권을 통솔하는 대원수복을 서양식으로 입었다

또한 외교관의 대례복에는 국토를 상징하는 무궁화문양을, 서구식 군복에는 태극과 오얏꽃, 무궁화문양을 활용했다

대한제국 상징에는 전통적 표상과 근대적 표상 방식이 공존하였다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 바로 옆에 방치되어 있던 경운궁을 수리하여 이어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명성황후 빈전과 선원전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기고 새로운 전각들을 신축하여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궐내에는 석조전 · 돈덕전 · 정관헌 등 양관을 건축하여 고종의 구본신참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1900년에는 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을 건설하고 정문을 인화문에서 대안문으로 변경하였으며

경희궁과 연결하는 홍교를 건설하고 인화문 앞에는 운교를 설치하여 경운궁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1904년 경운궁은 대화재로 인하여 전각들이 상당수 소실되었으며 2년 뒤 중층이었던 중화전은 단층으로 축소하여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은 대한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07년 돈덕전에서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번영과 쇠락을 함께 맞이한 중심적 공간이었다

 

 

 

 

대한제국 국제(1899년 8월 22일 관보)

 

 

 

 

신정분도 대한제국지도(1908)

중등 지문학 · 천문학 · 생리학 · 신찬 소물리학 · 초등 대한역사 교과서(1900년대)

 

 

 

 

졸업증서와 토지측량법 책(1908)

통상공부 소관 각 학교에서 측량학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총설 · 세부측량용 기계 · 세부측량 · 제도 · 잡예 등 5편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증 ·  · 철제 컵홀더

 

 

 

 

덕어학교 상증

상증에 교사로 표기되어 있는 불야안(彿耶安)은 독일인 이다

1898년에 설립된 관립덕어학교는 북부 대안동(현재 안국동 37)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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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으로 공책 한 권 · 연필 세 자루 · 만년필 한 자루 · 잉크 한 병이다

 

 

 

 

1900년 세계박람회 · 독일식품회사 광고 카드 · 한국을 소개한 외국 신문

 

 

 

 

정동

1883년 미국공사관이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정동지역에는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건립되었다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등이 정동지역에 대지를 확보하여 공사관을 건립하였다

미국은 기존의 한옥을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나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등은 양관을 건축하였다

공사관 주변으로는 알렌 · 언더우드 · 아펜젤러 등 선교사와 의사의 주택들이 들어섰고

이들은 다시 정동교회와 러시아정교회 · 성공회성당 등의 종교시설 및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의 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양관들은 정동을 이국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손탁이 운영한 손탁호텔에서는 외교관뿐 아니라 조선의 고위관료들도 모여 정동구락부를 형성하였다

정동지역은 대한제국의 정치 · 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정동의 외국인

외국공관이 들어서자 정동은 일종의 외국인거리가 되었다

1897년 서울에서 유럽과 미국 등 주요국 외국인 수는 226명이었으며, 1910년에는 307명으로 증가하였다

정동을 드나들던 외국인은 초대 미국공사인 푸트를 비롯하여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플랑시

고종의 아관파천을 협조한 베베르 등의 외교관이 있었으며 알렌 · 아펜젤러 · 언더우드 · 스크랜튼 · 분쉬 등의 선교사와 의사들이 있었다

대한제국 근대화에 일조한 초기 고문관 묄렌도르프 · 애국가를 작곡한 에케르트 · 해관의 총세무사 겸 탁지부 고문 브라운 등이 정동에 드나들었다

또한 새로운 문물의 기술자로서 전기전문가 · 조폐전문가들도 서울에 머물렀다

서울을 여행한 로제티 · 비숍 · 게일 등은 정동의 모습을 담은 책을 출판하여 서울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손탁호텔

손탁은 알자스로렌 출신으로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맡으며 고종과 명성왕후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1895년 서울 정동에 한옥 한 채를 하사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1898년 서양식 건물인 손탁빈관을 지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2년에 이를 다시 2층으로 지어 정부 직영 영빈관 격인 손탁호텔을 운영하도록 했다

손탁호텔은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가 되었다

 

 

 

 

개화백경

서양식 건물과 첨단 교통수단이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는 한편에서 작은 기계와 도구 · 생활용품들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었다

서울은 신문물의 전시장이었다

신문과 잡지는 정보 전달의 범위를 넓히고 속도를 높였을 뿐 아니라, 교양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또 지면의 일부를 상업광고에 할애하여 신상품의 시장을 넓혔다

일부 공용 건물과 주택에 사용된 판유리는 채광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으며 사진기와 거울은 외모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된 후, 서양식 의복과 모자 · 신발 소비가 급증하였다

새 복식의 확산에 따라 서양식 지팡이나 선글라스 · 양산 같은 소품도 보급되었다

도시 곳곳에 이발소와 목욕탕이 생긴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 시대 문명의 총아는 전기였다. 전보와 전화 덕에 거리는 정보 전달의 장애가 되지 않았다

전차는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전등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렸다

사람들은 더 오래 활동하고 더 멀리 이동하여 스스로를 바꿔갔다

 

 

 

 

개화의 거리 종로

1896년 가을, 「한성 내 도로의 너비를 규정하는 건」을 발표하여

서울의 중심대로였던 종로와 남대문로 변에 빼곡히 들어서 있던 상업용 가건물을 철거하였다

대로 변 건물들의 높이와 양식 · 건축 재료에 대한 지침도 만들어 가로 경관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였다

원각사 터에는 근대적 공원을 조성하였다

1898년 종로에 전차선로가 부설되었다

동대문 옆에는 발전소가 건설되었으며 대로를 따라 전신주가 늘어섰고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전차를 이용하면서 서서히 중세적 차별 의식을 극복해갔다

천체와 인체를 기준으로 하던 시간과 속도에 대한 관념도 자동 기계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로변에는 서양식 건물들도 하나 둘 늘어갔다

서울 사람들은 종로에서 근대 문명을 체험하면서 근대인다운 의식을 갖추어갔다

 

 

 

 

한성전기회사(1890년대)

중앙 돔에 시계가 있어 약속 장소로 많이 이용했다

당시에는 하늘을 보고 시간을 짐작했다고 한다

 

 

 

 

탑골공원 원각사지 10층석탑(1904)

10층 석탑 중 상층부 3층이 기단부 옆에 있다

 

 

 

 

흥인지문(1904)

흥인지문 지붕 위의 연기는 발전소에서 나오는 연기다

 

 

 

 

사진관

광무 9년 1월, 후지라와사진관이 저경궁(인조의 잠저 · 지금의 남대문로 3가) 앞에 사진관을 열고

싼 가격으로 잘 찍어주니 많이 와서 찍으라는 내용을 실은 광고지이다

우리나라에 사진관이 생긴 것은 1880년대이고, 189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서울에서 사진관을 열기 시작했다

1900년대 이후 초상사진이 유행하여 사진 찍는 일이 대중화되었다

 

 

 

 

환구단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즉위식을 거행했다. 고종이 천자로서 황제로 즉위함을 하늘에 고하는 의미의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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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공간에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과 사상, 권력의 의지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표현된다

경운궁 주변의 정동과 소공동은 다른 근대국가의 도시들과 어께를 견줄 만큼 짙은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서울 곳곳에는 환구단 · 독립문 · 칭경기념비전 · 탑골공원 팔각정 · 창충단 등

나라의 독립과 황권의 존엄성 · 위민사상을 표현하는 특징적인 장소와 상징적 건조물이 들어섰다

한성전기회사 · 한성은행 · 대한천일은행 등의 기업들도 서양식 사옥을 지었다

대한제국은 이들 여러 요소를 아울러 서울을 전통과 근대가 조화 속에 공존하는 도시로 개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대한제국의 도시 개조 구성을 좌절시켰다

 

 

 

 

조선(철도)호텔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대륙침략의 발판이자 식민지 확장을 위해 각종 사업을 수행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주요 철도를 거점으로 철도호텔을 지어 인적 · 물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산 · 신의주 · 평양 등에 철도호텔이 생겨났다

경성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의해 1914년 조선(철도)호텔이 설립되었다

이는 일제가 시정 5년을 기념하고 강제 병합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내외국인을 숙박시킬 호텔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1913년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공간인 한구단을 헐고 그 터에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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