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다
*
상설전시 4존 / 고도성장기 서울(1945~2002)
해방 이후 서울의 비약적인 성장과 변화를 돌아보는 공간으로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발전하기까지 서울의 변화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4존 / 고도성장기 서울
1945년 해방으로 주권국가의 수도가 되고 3년 뒤 특별시로 승격된 서울은 귀국한 해외동포와 월남민으로 붐비는 가난에 찌든 도시였다
그나마 6 · 25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두 세대에 걸쳐 진행된 국가주도 경제개발 속에서 그 엔진이자 주된 수혜자였던 서울은 현대화된 거대도시로 자라났다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수용하기 위해 상하수도 · 도로 · 지하철 · 주택 · 학교를 짓는 건설사업이 펼쳐졌고
그에 따라 시가화 지역은 한강을 넘어 강남으로, 수도권 지역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이 「한강의 기적」 속에서 산업고도화 · 경제성장 · 민주화 · 지방자치가 이루어졌다
한편으로 과밀 · 환경파괴 · 역사유산 멸실 · 사회양극화 · 일극집중 같은 「거대도시병」의 유산이 탈압축성장기 서울이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1945년 8 · 15해방을 맞은 서울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식민도시 경성에서 서울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으며,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헤방의 기쁨도 잠시,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서울에서는 미군 주둔에 필요한 시설 확충과 원조를 통한 도시건설 사업이 실시되었으며
미군을 통해 유입된 서양문화는 서울시민들의 생활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3일만에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 9 · 28 서울수복과 1 · 4후퇴 등
국군과 연합군 대 북한군 사이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서울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서울시민들은 고된 피난살이와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극도의 생존 위협을 겪었다
다시 일어나는 서울
1953년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전재 복구사업이 본격화되었다
부흥 · 재건 · 희망 등과 같은 이름의 주택이 건설되었고, 외국의 원조를 받아 재건에 필요한 시설과 건물을 지었다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급증하였다
전쟁 동안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겪은 서울 사람들은 염치와 체통을 버리고, 그 대신 살기 위한 실용과 현실주의에 눈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식을 교육시키기 위한 열정만은 대단하였다
한편, 전후 미국의 영향으로 미제물품을 선호하게 되고, 맘보리듬과 사교댄스 등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이 유행하였다
이처럼 생존을 위한 강한 의지와 뜨거운 교육열, 자유분방한 생활방식 등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짧은 시간 동안 서울이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는 데 든든한 밑걸음이 되었다
새로운 유행의 등장
전쟁을 겪으면서 유입된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맘보리듬이 유행하였다
우리 전통민요 가락에 맘보리듬을 붙인 「맘보타령」 · 「닐리리타령」 등이 등장하였고
춤바람을 불러일으켜 카바레 · 나이트크럽 · 카페 · 바 등이 서울 곳곳에 생겨났다
맘보는 음악으로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맘보바지 등 일상생활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서울은 만원이다
휴전 직후 1954년 124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960년 244만 명을 넘어섰다
1960년대 산업화 ·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1965년 347만 명, 1970년 543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만원 서울」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발생시켰다
교통 혼잡과 식량 · 물자 부족 현상이 나타났으며 특히 주택 부족으로 생겨난 무허가 판자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심각하였다
식수난 · 공용화장실 사용과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불편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화재나 전염병이 발생 할 경우 많은 인명 피해를 낳는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서울은 공사 중
6 · 25전쟁 이후 전재복구 사업은 1960년대 들어 도시개발사업으로 이어졌다
1961년 5 · 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1966년 3월 취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의 「돌격건설」깃발 아래 서울은 언제 어디서나 「공사 중」이었다
도시미관을 개선하고 부족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하여 도심의 슬럼지역을 현대화 · 고도화하였으며 교통 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였다
도심과 외곽, 외곽과 외곽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였고, 육교와 지하도를 건설하였으며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었고, 하천을 복개하여 도로와 주차장, 상가를 만들었다
나아가 한강과 여의도 개발이 시작되고,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를 건설하여 이제 서울은 강북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강남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삼일로 도로확장 공사(1967)
삼각지입체교차로(1967)
현대화된 교통
1950년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전차였다
그러나 점차 시가지가 확대되고 도로망이 확충됨에 따라 버스가 주요 대중교통 수단으로 등장하였다
전차는 궤도가 있어야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시역의 공간적 확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1968년 11월 30일 서울시내에서 사라졌다
이후 1980년대까지는 버스가 서울 시민들의 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시는 1971년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9.54km의 지하철 1호선 건설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8월 15일 개통하였다
이로써 지하철 대중교통 시대가 열렸다
버스, 지하철과 함께 택시와 자가용도 1960, 70년대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이후 서울의 인구 증가와 시가지 확대는 새로운 도로망 확충과 버스, 지하철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연결되었다
한강 개발
서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은 서울의 경관과 도시구조, 서울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처럼 한강은 해방 이후 서울의 성장을 상징하며 그 자체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강에서 넓은 백사장 · 나루와 배 · 습지와 샛강 등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또 한강은 고기잡이와 낚시 · 채빙(採氷) 등 생활터전으로 여름철 물놀이 · 겨울철에 스케이트를 타는 유원지로 서울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서울의 급속한 팽창으로 한강개발이 시작되고 여의도와 강남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이러한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둔치와 콘크리트 제방이 생기고 자동차도로와 거대한 교량 등 인공구조물이 들어섰다
강이 직선화되면서 기존의 섬이 사라지고 없었던 섬이 새로 생겨나기도 하였다
또 강변을 따라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들어서서 한강은 물론, 서울의 도시 경관과 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한강변을 택지로
1960년대 한강개발사업은 공유수면 매립과 강변택지 조성 사업이었다
서울시는 한강을 개발하면서 한강변의 공유수면을 매립하거나 강변의 제방을 옮겨 발생한 부지를 택지로 조성하였다
공유수면 매립사업은 1962년 동부이촌동 · 서빙고동 지구를 시작으로
1971년까지 반포 · 압구정동 · 구의 · 잠실 지구 등 총 19개소에서 시행되었으며 약 396만㎡의 택지가 조성되었다
이 사업으로 광대한 하천부지가 강변택지로 탈바꿈 되었다
여의도, 모래펄에서 「서울의 맨하튼」으로
여의도는 해방 이후 서울 성장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비행장이 있었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여의도는 대부분 모래펄이었다
그러나 1967년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면서 섬의 한쪽 봉우리인 밤섬이 사라지고
660만㎡의 모래펄은 둘레 7.6km의 제방에 둘러싸인 287만㎡의 인공섬이 되었다
여기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광장과 국회의사당 · 시범아파트 등이 들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개발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개발과정은 매우 즉흥적이었으며 순탄치 않았다
처음 수립된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없이 매우 이상적이었으며 그나마 정치적 · 국가안보적 고려로 인하여 변형되었다
그러나 1976년 이후 한국방송공사(KBS)를 비롯한 방송사 · 증권거래소 · 한국산업은행 등 금융기관 ·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회관 등 비지니스 센터와 대기업의 본사들이 들어섬으로써 새로운 도심, 「서울의 맨하튼」으로 부상하였다
비행장으로 활용된 여의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여의도는 비행장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3월 조선총독부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설치하고 일본과 만주를 잇는 중간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192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이곳에서 시범비행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여의도는 미군비행장 · 국방경비대 항공부대 창설(1948) 등 비행장으로서 기능을 계속하였다
이후 1958년 김포에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여의도비행장은 공군기지로만 사용되었으며
1971년 2월 여의도 개발 사업이 진행된에 따라 완전히 폐쇄되었다
영자의 전성시대
강남으로, 강남으로
강남개발을 촉진하기위해 강북의 명문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되고 도심에는 백화점 및 시장 등의 설치가 금지되었다
한편 강남의 획기적인 주택 공급을 위해 청담 · 도곡 · 잠실 일대에
아파트만 지을 수 있는 「아파트지구」가 지정되어 후일 아파트공화국 형성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강남개발에 따라 지하철 2호선이 강남을 관통하는 순환선으로 변경되었고 반포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이 자리잡게 되어 영동지구 개발을 한층 더 가속화했다
서울 지도
서울약도(1972)
1971년 지정된 서울의 그린벨트를 녹색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1969년 완공된 제3한강교는 평화교로 표시되어 있다
잠실지역은 아직 미개발지로 남아 있으나 영동 2지구인 도곡 · 역삼 · 논현 일대는 주요 도로가 개발된 상태이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서울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거대 행사였다
150개국 1만 3천여 선수단이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행사이자 16년 만에 동서 양 진영이 모두 참가한 화합의 행사로 평가 받았다
올림픽 경기의 주무대인 잠실에는 잠실종합운동장과 펜싱 · 역도 · 자전거 등의 경기 시설을 포함한 올림픽공원
그리고 선수와 기자를 위한 올림픽선수촌 · 기자촌이 건설되었다
원조 청일집
55년 전통의 음식점이다
서초 삼호아파트 9동 000호
111㎡(33평)의 복도식 15층 아파트로 방 4개 화장실 1개의 구조이다
전면 베란다와 부엌의 다용도실이 있으며, 방이 4개이다 보니 방과 거실이 작은 편이다
거실과 부엌은 라디에이터 스팀난방이며, 각 방은 온돌난방이다
각방에는 도배장판에 니스를 칠하였다
*
거실
TV가 놓인 곳은 라지에이터 위 선반이다
사실 이 선반 위에 장식장이 놓여 있었으나 전자제품이 점차 늘어나면서 없애버렸다
바닥 난방이 되지 않으므로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고, 겨울에는 전열기를 사용하였다
TV는 거실 한 벽면을 차지하면서 거실의 구조를 결정지었으며 소파는 텔레비젼 시청하기 편한 위치에 놓였다
종종 밥상을 따로 차려와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서 식사하기도 했다
안방
보통 부부의 침실공간으로 활용하는 안방은 침실의 기능도 하지만 장롱과 문갑이 있는 전통적인 한옥의 안방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국의 아파트에는 좌식과 입식문화가 섞여 있는데
이 집의 경우는 혼수로 해온 장롱(명동에 있는 가구점에서 구입)과 입식화장대가 안방을 차지하고 있고 한식이불을 바닥에 깔아 놓고 생활을 하였다
부엌
부엌 싱크대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보수한 곳으로 1990년대 말 상부를 교체하였다
부엌에 놓인 찬장은 결혼을 할 때 시어머니가 물려준 것이라고 한다
일자형 싱크대의 좁은 수납공간으로 인해 토스터기 · 전자레인지 · 전기밥솥 등 늘어나는 전자용품을 감당하지 못하자
일부는 식탁 위, 일부는 고장난 오디오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식탁은 주로 어머니가 혼자 식사할 때나 간단한 간식을 먹을 때 사용하였다
아들방
1974년생인 아들은 어릴 적 잠시 단독주택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아파트 키드 1세대이다
방 안에는 스탠드 조명이 부착된 책상이 있는데, 당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아들의 중학교 입학 기념 차 1989년 구입한 것이다
당시 해외문화개방의 영향으로 게임기와 조립식 완구 등이 새로운 놀이문화로 등장했고 홍금보와 성룡이 등장하는 홍콩영화가 유행하기도 했다
1990년에서 새천년으로 '개발시대'를 넘어서
성수대교 붕괴 · 삼풍백화점 붕괴 · 외환위기...
많은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30년간 지속된 국가주도 개발체제도 허물어졌다
그 자리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지방자치가 실시되었으며, 굴뚝 없는 신 산업이 자라났다
수도권 광역화로 서울의 인구가 줄고 도심은 공동화되었지만 강남은 계속 성장하여 강북과 비슷한 인구 규모가 되었다
지하철 5~8호선 개통으로 서울은 세계적 지하철도시가 되고 자동차시대에 걸맞은 도심 순환 자동차도로도 갖추어졌다
남산 제모습 찾기 · 북촌 · 인사동 · 전통마을 보존 · 정도 600년 기념사업 ·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등 서울의 뿌리찾기 노력도 커졌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개발시대의 유산인 난지도 쓰레기매립지에는
생태공원과 신산업단지 디지털미디어시티(DMC)가 들어섰고 고가도로가 철거된 청계천에는 다시 물이 흐르게 되었다
상설전시 5존 / 도시모형관 서울 · 오늘 그리고 내일
서울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밀한 모형과 첨단 IT 기술을 결합한 멀티미디어 전시 공간이다
최신 항공사진과 정밀 측량을 바탕으로 실제 서울의 자연환경과 도시 환경의 모습(605.25㎢)을 1,500분의 1로 축소한 놀라운 서울 모형이다
서울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317.29㎡ 넓이의 전시관에는 가로 21.5m× 세로 14.5m의 대형모형을 설치하여 서울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광화문 육조거리 모형
예전엔 광화문이 삼거리였다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시립박물관 근대가 찍어 낸 인천풍경 (0) | 2018.02.15 |
---|---|
인천시립박물관 (0) | 2018.02.15 |
서울역사박물관 3존 (0) | 2018.02.10 |
서울역사박물관 2존 (0) | 2018.02.10 |
서울역사박물관 1존 (0) | 2018.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