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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1존

유서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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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 1존 / 조선시대의 서울(1392~1863)

조선 건국 후 한양 정도부터 개항 이전까지 조선시대의 서울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한양의 육조거리와 시전을 중심으로 북촌 · 중촌 · 남촌 그리고 성저십리에 걸쳐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1존 / 조선시대의 서울 · 500년 왕도를 세우다

"이제 이 땅의 형세를 보니 왕도를 삼을 만하다. 더욱이 조운(漕運)이 통하고 전국에서 거리도 균등하니 사람들이 사는 일에도 편리한 바가 있으리라"

1394년(태조 3) 8월, 태조가 한양을 왕도로 삼고 한 말씀이다

 

 

 

 

1존 입구에서 봤다

 

 

 

 

연도와 날짜로 알아본 한양 천도

1393년(태조2) 권중화가 수도로 계룡산을 건의 · 수도 확정으로 건설 시작 · 하륜의 반대로 수도 건설 중지되고 새 도읍지 재검토 지시

1394년(태조 3) 하륜은 무악으로 천도 주장 · 한양 천도 결정 · 천도(한양으로 출발) · 한양 도착

1398년(태조 7) 왕자(이방원)의 난 · 1399년(정종 1)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 · 1405년(태종 5)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

 

 

 

 

조선팔도고금총람도(1673 보물 제1602호)

각 지역에 대하여 중요한 유적과 인물 등을 기록한 인문지리 지도이다

 

 

 

 

다양하게 제기된 수도 후보지

천도 논의 막바지에 수도의 후보지로 몇 군데가 더 거론되었다

1394년(태조 3) 7~8월에 서운관 등에서는 장단의 불일사와 도라산 · 적성의 선점이나 광실원 등을 추천하였다

태조는 이들 지역을 직접 둘러보거나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가보도록 하고는 마침내 한양으로 확정하였다

그만큼 수도의 선정은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주례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으로 「주례경도」에는 수도 건설의 이념이 나타나 있다

좌조우사(左祖右社)가 그려져 있다

 

 

 

 

경국대전(1603)

조선시대 기본 법전으로 한성부는 서울의 인구 · 토지 · 도로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수도 한양의 건설

1394년 한양 땅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졌다

새 수도는 우리의 옛 전통과 풍수지리,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건설되었다

먼저 우리 성곽 전통에 따라 산세에 의지하여 도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주례의 고공기(考工記)에 나오는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이념에 맞추어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수도의 성곽은 백악산을 비롯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으면서 평지 부분을 연결하여 완성하였다

임금의 궁궐은 백악산 기슭의 명당자리에 건설하고 왼쪽에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 오른쪽에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을 두었다

아울러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을 궁궐 앞에 배치하였으며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변에 건립하였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옛 전통과 유교적인 합리성을 함께 고려하여 건설한 수도였다

 

 

 

 

수선전도(1864)

서울의 행정구역 · 관청 · 교량 등을 자세하게 그려 목판으로 인쇄한 후에 산과 하천 · 주요 궁궐 등을 엷게 채색하였다

 

 

 

 

태조~세종에 이르는 도성 건설

1394년(태조 3) 10월 25일 태조는 개성을 출발하여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아직 궁궐은 완공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태조는 옛 한양부의 관사를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궐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1395년 9월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 체계를 완성하였다

이듬해에는 49일씩 2차에 걸쳐 총 98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20만 명을 동원하여 18.6km에 이르는 도성을 완공하였다

천도 2년 만에 왕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1398년 8월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은 한양이 불길하다며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에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창덕궁을 새로이 건설, 1405년(태종 5)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왔다

1412년에는 혜정교에서 동대문, 종루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구간에 약 2천 칸의 시전을 완성하였다

세종은 1422년(세종 4)에 다시 32만 명을 동원하여 38일에 걸쳐 도성을 보수하고, 도심지역의 도로를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왕조국가 수도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다

 

 

 

 

땅 속에 묻혀 있는 도성축조의 역사

 

 

 

 

한양의 재정비

1592년(선조 25)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궁궐과 관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도시 시설물들이 훼손되었다

1598년 전쟁이 끝난 이후 점차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궁궐 중건에 대한 논의는 선조 때에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복구 작업은 광해군 때에 진행되었다

 

 

 

 

수도방위체제의 정비

한양을 비롯한 전국을 오위로 구분하여 방어하던 군사체제는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급기야 왜란 중에 영의정인 류성룡의 건의로 수도경비를 위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어 극난극복을 도모하였다

 

 

 

 

한양도(19세기)

위백규의 환영지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궁궐 · 성곽 · 문루 · T자로 표현된 시전 행랑 등이 있다

 

 

 

 

도성삼군문분계지도(1751)

'어제수성윤음'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것으로 삼군의 경비 구역이 표시되어 있다

 

 

 

 

도성연융북한합도(19세기 전반)

도성 · 연융대 · 북한산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지도다

 

 

 

 

병학지남(1787)

정조의 명으로 장용영(壯勇營)에서 간행하였으며 17세기 이후 군사훈련의 기본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도성대지도(1754~1760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7호)

현존하는 도성도 중 가장 큰 지도이다

이 지도는 현재 가리개로 장황되어 있지만 본래는 8개의 부분으로 나뉜 절첩본으로 제작된 것이다

1754년 세워진 육상궁이 표기되어 있고 1760년 명칭이 변경된 북한산성 대남문이

옛 이름인 암문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54년에서 17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경산수화풍으로 묘사된 그림 속에 18세기 한양의 5부 43방 328계 및 주요 지명과 관청 등을 상세히 담고 있어 당시 한양의 상황을 살피보는데 유용하다

 

 

 

 

한양 사람들

한양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양반 관료가 있었고 의관 · 역관 등 전문직 중인들과 관청의 서리 그리고 훈련도감 등에 소속된 군인들이 살았다

한편 상인들은 운종가를 중심으로 남대문 밖 칠패, 한강변의 마포 등에 거주하였다

도성 밖에는 채소와 과일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살았고, 최하층에는 도둑이나 거지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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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인구는?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구를 파악했기 때문에 인구통계에 누락이 많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전체 인구의 30~40%가 통계에서 빠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428년(세종 10)에 조사한 한양의 인구통계는 10만 9천 명이었는데 사실상 이보다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이다

17세기 중반에는 20만 명이 넘었으며 18세기 후반에는 30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심의풍 호패(1827)

23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83세에 한성부 판윤에 오르다

호패는 왕족 · 관인(官人)으로부터 양인 · 노비에 이르기까지 16세 이상의 모든 남자가 패용하였다

 

 

 

 

넉넉한 마을 · 북촌

북촌 땅에는 햇볕도, 재부도 넉넉하였다

뒤로는 백악에서 응봉으로 흘러가는 산자락을 기대고 앞으로는 개천(開川 지금의 청계천)을 바라본다

아울러 동쪽에 위치한 창덕궁과 서쪽에 자리한 경복궁의 두 궁궐을 품에 안고 있다

대개 고위 관직에 있으며 재산과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모여 산 이곳은 서울 양반들의 중심 터전이었다

이들은 백악산과 인왕산의 기슭에다 정자를 짓고 문학과 예술을 꽃피우기도 했다

도성안 다른 곳에 비해 넓은 집터 사이로 난 북촌의 골목골목은 양반의 심부름을 하는 겸인과 노복들이 함께 생활하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도한 북촌은 궁궐의 그늘에서 권력의 긴장이 감도는 지역이기도 했다

 

 

 

 

한양의 상류계층 · 경화사족

한양에서 대대로 부귀를 누리며 살던 이들은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고 하는데 특히 북촌에 많았다

북촌의 사족들은 보수 세력으로서 당색은 대개 서인 노론계에 해당한다

이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면서 명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는 세력이었다

 

 

 

 

북촌 사대주 · 해주 오씨

북촌의 경행방(지금의 낙원동)에는 해주오씨 오태주와 그 후손들이 살았다

오태주는 형조판서를 지낸 오두인의 아들로 1680년(숙종 6)에 현종의 셋째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이곳에 살았다

오태주는 공주의 오빠인 숙종과 친하여 서로 간에 자주 시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명안공주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조카 원이 양자로 들어와 가계를 계승하였다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준호구

오태주의 준호구에 의하면 그는 1702년(강희 41)에 경행방 오순덕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오태주의 신상을 기록하고 부친 · 조부 · 증조부 · 외조부를 기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데리고 있는 노비와 그들의 가족관계를 기재하였다

 

 

 

 

사랑방

조선시대 남성의 생활공간으로 청재(淸齋)라고도 불렀다

사랑방의 가구들은 기품있는 가구와 소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랑방에는 경상 · 종이 ·  ·  · 벼루 등의 문방사우와 연적 등을 정리한 연상 · 책과 소품을 정리하는 문갑 · 사방탁자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벽에는 고비를 걸어 장식 효과와 함께 두루마리 한지 등을 꽂기도 하였다

또한 사랑방에는 남성들의 생활용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애호하는 서화나 골동 등이 수장되기도 했다

 

 

 

 

안방

양반가의 여인들만의 생활공간이다

어른을 모시고 자녀를 양육하는 등 가족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가정의 중심 공간이었다

바느질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바느질에 필요한 규중칠우(바늘 ·  · 가위 · 인두 · 다리미 ·  · 골무)를 담는 반짇그릇은 여성의 기본적인 혼수품이었다

규중칠우는 남성들의 문방사우와 대비되는 것으로 남녀의 역활을 상징적으로 대변해준다

 

 

 

 

새로운 궁궐 · 창덕궁과 경희궁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궁궐은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였는데 경복궁은 복원하지 않고 창덕궁만 재건하였다

창덕궁이 완성된 다음에는 새문동에 경희궁을 건설하여 창덕궁은 법궁 · 경희궁은 이궁인 새로운 양궐체제가 성립되었다

경희궁은 숭정전을 중심으로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궁궐이었으나 여러 임금이 거처하였다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여나 상당기간 이곳에 거주하였으며, 경종도 이곳에서 태여났다

그리고 영조는 경희궁에 가장 오래도록 거주하였던 군주였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고, 이후 고종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살게되면서 조선의 궁궐은 기존 창경궁과 함께 5개의 궁궐이 되었다

도성 내의 여러 곳에 궁궐을 건설하였던 점은 조선이 가진 궁궐 문화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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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의궤(1828 進爵儀軌) / 왼쪽

조선시대에 왕 · 왕비 · 왕대비 등에 대하여 작위를 높일 때 행한 의식을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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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헌당 어제 어필 화재첩 / 오른쪽

영조가 춘추(春秋) 강독을 마친 것을 기면해 승정원 · 홍문관 관원들에게 경헌당에서 술을 내린 일을 기록한 첩이다

 

 

 

 

경복궁 · 창덕궁

왕조국가 시대에 궁궐은 통치의 중심이었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공간이며, 신하가 임금을 뵙고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선포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한양의 도시 구조는 궁궐을 축으로 형성되고 운영되었다

조선의 궁궐은 처음에는 경복궁 하나였는데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여 창덕궁을 새로 지우면서 두 곳이 되었다

경복궁은 법궁이었고, 창덕궁은 뒤에 건설된 창경궁과 함께 이궁이 되었다

경복궁은 인정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자연적인 지형이나 산세에 따라 배치되었다

아울러 두 궁궐은 모두 큰 길로 한양의 동서대로와 연결되어 임금의 교화가 잘 전파되도록 하였다

 

 

 

 

국립대학 성균관과 중등학교 사학

수도 한양은 정치 · 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교육의 도시이기도 했다

유학을 최고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두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1398년(태조 7) 숭교방(지금의 명륜동)에 건립한 성균관은 생원과 진사들을 교육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들에게 제사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명륜당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하였고,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과 10절 ·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셨다

1411년(태종 11)에 건립된 사학(四學)은 오늘날의 중등교육과정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성균관 관원이 파견되어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부학당은 관광방(지금의 중학동)에 설치하였으며 · 동부학당은 창선방(지금의 종로6가)

서부학당은 여경방(지금의 태평로 1가) · 남부학당은 성명방(지금의 남학동)에 두었다

 

 

 

 

정축입학도첩(1817)

순조의 세자(뒤의 익종)가 학문을 시작할 때 행했던 의례 중 작헌(酌獻) 장면으로 성균관에 있는 공자의 신위에 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서학 장의 추천서(조선 후기)

이병숙 등 3명을 서학 서재의 장의로 추천한다는 문서이다

서학은 한양의 사부학당 중 하나이다

 

 

 

 

국가의 중추 · 육조거리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대로를 육조거리라고 하였다

이 거리의 동편에는 의정부 · 사헌부 · 병조 · 형조 · 공조가 늘어서 있었다

이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의 뼈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주변으로는 실무 관청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관청들은 궁궐 안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궐내각사에 견주어 궐외각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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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관리한 한성부

한성부는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한다

도성의 백성들을 보살피고, 도시시설을 설치 · 운영하는 곳이다

한양의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며 군사나 치안 업무 등에 대해서는 병조의 삼군문이나 포도청 · 형조 등과 분담하였다

또한 수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긴급한 사태가 일어날 때에는 국왕과 궁궐을 수호하는 역활까지 도맡았다

또한 한성부는 6조와 같은 정2품 품계의 관청으로 한양을 관리하는 일 이외에도 호적 업무나 토지 소송 등에 대해서는 중앙관청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양을 관리하는 사람들

한성부의 수장은 한성부판윤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판윤은 정2품 중앙 관직으로 6조의 판서와 같은 품계이다. 좌윤과 우윤(종2품)은 제1 · 2부시장에 해당한다

그 아래에는 서윤은 이방 · 판관은 호방 · 주부 2명은 각각 예방과 병방 · 형방과 공방의 일을 맡았다. 곧 6방 체제로 운영된 것이다

소속 관청으로는 중부를 비롯하여 동 · 서 · 남 · 북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오늘날의 구청에 해당한다

각 부의 수장으로는 영(令 · 종5품)을, 그 아래에 도사(都事 · 종9품)을 두었다

또한 부의 아래에는 방(坊)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계가 있었다

고종 때에는 5부 아래에 47방과 340개의 계가 있었다

 

 

 

 

한성부 입안(19세기 경)

한성부에서 충주에 있는 김해택에게 발급해준 일종의 증명서이다

충청도 청풍군 읍내면 도촌리 망월봉에 있는 김해택 산소 근처의 나무를 마을의 한 주민이 함부로 베어서 황폐화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타인이 그곳에 산소를 쓰거나 나무를 벤다면 충청감영이나 해당 관청에서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토지와 관련된 민사상의 일에 대해서는 한성부에서 전국을 관할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운종가의 독특한 거래관행

한양은 조선 후기에 늘어나는 인구 유입으로 점차 상업도시이자 소비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런 현상을 뒷받침하는 요소는 시전이었다

시전은 궁궐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고 이를 대가로 금난전권을 얻어 상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였다

시전상인들은 허가받은 행랑에서 상업을 하면서 한양의 상품유통구조를 장악하였다

이런 까닭에 화려한 간판이나 진열대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대개의 시전은 상품을 상점 안에 들여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이때 '여리꾼'이라는 호객꾼이 운종가를 활보하며 손님과 상인을 연결해주고 중간이득을 취하였다

거래를 할 때는 그들만의 은어인 '변어(變語)'를 사용하였으며 유독 눈에 띄는 복장을 하였다

이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경박스러웠다고 비하되기도 하였다

 

 

 

 

조선 제일의 번화가 · 운종가(雲從街)

운종가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거리라는 뜻으로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에 있었다

운종가의 양쪽으로는 국가에서 지은 장랑이 이어져 시전(市廛)으로 쓰였다

본래 시전은 궁궐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역활을 하였으나 점차 민간 판매가 늘어나면서 한양의 대표적 상점가가 되었다

 

 

 

 

운종가 모형

운종가의 중심에는 종루가 있었다

종루는 큰 종을 달아 도성의 대문을 열고 닫는 때를 알리는 시설인데 서울의 한가운데를 가르키는 표지이기도 했다

종루의 양쪽 옆으로는 여섯 곳의 큰 상점인 육의전이 있었으니

각각 비단을 파는 선전 · 명주를 파는 면주전 · 면포전(무명) · 저포전(베) · 지전(종이) · 어물전 등이었다

 

 

 

 

책사(冊肆) · 서화사(書畵肆)

광통교를 중심으로 개천 주변에는 책사 · 서화사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책사에서는 방각본(坊刻本)의 유통이 활발하였는데, 방각본은 민간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여 판매하는 책자를 말한다

한양의 무교동 · 미동 · 유동 등 광통방 일대에는 판매를 목적으로 책을 찍는 출판업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서화사에서는 그림을 애호하던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였으니 산수도 같은 그림이나 입춘에 쓰이던 액막이용 세화(歲畵)가 주로 거래되었다

한산거사의 「한양가」에는 광통교 주변에 있는 서화사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전문직 마을 · 중촌

중촌은 개천을 중심으로 지금의 청계천과 종로 일대를 말한다

근처에 궁궐과 주요관청 · 시전이 있어 생활이 편리하였다

이곳에는 주로 역관 · 의관 · 법률가인 율관 등 전문직 관리나 관청에서 근무하는 서리인 경아전(京衙前)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동네였다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이가환은 「옥계청유권서」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챙기고 문학을 가벼이 여긴다"고 중촌사람들을 표현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용적이거나 경제적인 활동에 전념한 전문직업인이었다

역관으로는 수진방(청진동 주변)의 천녕현씨와 장통방(관철동 주변)의 무인박씨가 있었고 의관으로는 대묘동(종묘 주변)의 안산이씨가 알려져 있다

한편 시전 상인들은 다동과 상사동(청진동 주변) 등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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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과 평민 사이 중인

중인은 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층으로 대개 역관과 의관 등 전문직 종사자를 지칭한다

여기서 관청의 실무자인 경아전이나 양반의 첩 자식인 서얼(庶孼)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중인 중에서도 전문직 중인들은 대대로 후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며 직업을 세습하였다

서얼은 문관으로 출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역관처럼 전문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밖에 지방 관청에 행정실무자인 향리도 중인 계층에 속하였다

중인은 많은 수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전문성을 바탕으로 쌓은 지식과 교양으로 예술과 문학 등의 분야에서 당대의 문화를 주도하였다

중인 계층은 점차 무시할 수 없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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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극복의 열망 · 통청운동

조선 전기에는 서얼금고법으로 문무관 진출이 막혀 중인이 할 수 있는 기술관으로만 진출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지나 인조 때에 납속허통, 즉 곡식을 내면 소통이 허용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금고법이 폐지되면서 마침내 법적인 차별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수백 년 지속된 관습으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724년(영조 즉위년) 서얼 260여 명이 주요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통청운동」을 시작하였고

1722년에는 3천여 명, 1823년(순조 23)에는 만 명이 집단으로 상소하였다

1851년(철종 2)에는 한성부의 각 관청에 소속된 중인들 1,600여 명이 국왕에게 차별 철폐의 요청을 시도하였다

중인 계층은 점차 무시할 수 없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장통방의 역관집안 무안박씨

중부 장통방에는 역관 집안인 무안박씨가 살았다

이 집안은 조선 중기 이래로 여러 대가 청계천 일대에 살았는데 1591년(선조 24) 장원으로 역관이 된 박대근과 그의 후손들은 대개 역관직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혼인도 역관 집안과 맺어 그들만의 전통과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 집안사람들은 16~18세기 중반까지 왜학을 전공하였고,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학을 전공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독일어를 전공하였으니 1901~1902년에 관립덕어학교(독일어) 다닌 박재순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하였다

중세에서 근대로 들어오면서 시기에 따라 전공을 바꾸어가며 전문성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고고한 선비의 마을 · 남촌

남촌은 목멱산의 아래쪽에 위치했던 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 회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계천 이남을 말한다

한양의 북쪽은 궁궐과 주요 관청이 있었던 반면, 남쪽에는 일반 관청이나 군영들이 주로 눈에 띈다

주자동에는 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가 있었고, 인근에는 균역청이 있었다

또한 남산 기슭에는 남별영과 남소영 · 금위창과 어영창 · 금위화약고와 수어화약고 등 군사시설이 있었다

 

 

 

 

조선시대 남촌에는 남인을 비롯하여 소론 · 소북 등 대체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렴한 관원과 고고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명문가도 이 일대에 여럿 있었다

먼저 회현동에 살았다고 하여 회동정씨라 불린 동래정씨 일가는 정광필 · 정원용 등 12명의 정승을 낳은 명문가이다

또한 일두 정여창 · 표암 강세황도 이곳에 살았다

건천동(지금의 인현동 일대)에는 류성룡 · 이순신 · 원균 · 허균이 거주하였으니 같은 시기 유명 인사들이 한 마을에 살았던 것이다

그 외에 명례방(지금의 명동 · 남산동 · 회현동 일대)에는 김종직 · 정탁 등 지방에서 올라온 인물들이 머물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도 이 지역에 거주하였으니 남촌은 조선의 인재들이 이웃한 마을이었다

 

 

 

 

남주북병

남촌 사람들은 술을 잘 빚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잘 만든다

술은 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빚은 장흥방과 회현방(지금의 충무로 1가와 회현동)의 것이 최고였다

반면 맛 좋기로 소문난 북촌의 떡은 삼청동의 찰떡을 지칭하였다

 

 

 

 

남보

남인에 속하는 성씨들만을 대상으로 계보를 정리한 것으로 총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성밖 한양 · 성저십리

조선시대 한성부는 도성 안과 함께 성 바깥 약 10리(약 4km)까지를 관리하였다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현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가 그 범위에 속한다

조선 전기에는 도성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후기가 되면 한양 인구의 약 50%가 거주하게 된다

성 밖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들이 많았다

마포 · 용산 ·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는 한양사람들이 소비하는 채소 등을 재배하는 근교 농업의 중심지였다

도성 밖 성저십리는 조선 후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남대문 이야기

남대문은 한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었다

5경 3점(새벽 3시~5시)에 파루(罷漏)의 종을 치면 성문을 열고 초경 3점(저녁 6시 30분~8시 30분경)에 인정(人定)의 종을 치면 성문을 닫았다

성문이 개방된 시간에는 도성 안팎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로 들끓었다

또한 성문 바로 안쪽에는 대동법 시행 이후 선혜청이 설치되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이나 공물을 보관하고

포(布)나 전(錢)을 출납하게 되면서 상품 유통이 활발해졌다

인근에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니 바로 남대문 밖 칠패(七牌)시장이다

또한 대문 안팎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다보니, 속칭 「남대문입납(南大門入納)」이라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도성으로 가는 정문 · 숭례문

시골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한양에 들어오면서 처음 보고 놀라는 것이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한 한양도성의 남쪽 성문이며 흔히 남대문이라 불렀다

이문은 중앙부에 홍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이층의 문루를 세워 도성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숭례문을 통하여 한양과 조선팔도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오는 10개의 길 중에서 삼남지방과 이어진 5개의 길이 이곳을 지나갔다

따라서 남쪽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상당 부분이 숭례문을 통해 운종가의 시전 등으로 공급되었다

숭례문부터 서울의 중심부인 종루까지는 일찍이 대로가 건설되었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든 길은 한양으로

조선시대 서울 한양은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곳이었다

한양과 지방을 잇는 간선도로망은 18세기 중엽 6대로에서 18세기 후반 9대로, 19세기 후반 10대로로 증가하였다

10대로는 한양~의주 · 한양~경흥 · 한양~평해 · 한양~동래 · 한양~봉화

한양~강화 · 한양~수원 · 한양~해남 · 한양~보령 · 한양~통영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간선도로망의 확대는 지방과 한양이 그만큼 밀접해졌음을 말해준다

이들 도로망에는 기존의 여행하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식을 제공했던 역과 원이 점차 쇠퇴하고

상인이나 일반 여행객들이 이용하는 점막(店幕)들이 늘어났다

특히 의주~평양~개성~한양을 잇는 관서대로는 사행로(使行路)이면서 중국의 물자가 반입되는 중요한 도로였다

또한 남쪽의 물산들은 삼남의 길목인 광주(廣州) 송파장(松坡場)에 모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마포와 경강산업

경강은 전국 해로유통권의 중심이면서, 전국 최대 시장인 한양의 관문이었다

경강지역 중에서도 서강과 용산이 세곡 운송의 중심지였다면 마포는 상품유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다양한 상업세력이 터를 잡고 있었는데 선상(船商)을 접대하고 매매를 주선한 대가로 돈을 받았던 여객주인

세곡 운송을 전담하였던 경강선인, 우월한 수송능력을 토대로 상품유통을 전개했던 상인들이 있었다

18세기 후반 여객주인업 · 선운업 · 선상업은 권력 가문과 결탁한 대상인들이 차지하였다

특히 경강상인들은 2천 석을 싣는 경강대선을 앞세워 전국의 상품유통망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신속한 수송능력과 정보력을 기초로 지역간 가격 차이와 독점 상업행위인 도고(都賈)를 통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이들 경강상인은 큰 상인이란 의미인 강상대고라 불리며 조선 후기 상업자본을 가장 많이 축적한 세력이 되었다

 

 

 

 

백성들의 바람 · 제사와 신앙

성저십리에는 백성들의 소망을 담아내는 장소가 있었다

유학을 기반으로 예치(禮治)를 표방했던 조선의 유교의례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민생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종묘나 사직과 같은 대사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적 제사들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도성 밖 성저십리에는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제사 중에서 중사(中祀) · 소사(小祀)에 속하는 제사 시설들이 있었다

명산대천에서 지내는 산천단을 비롯하여 농사신과 잠신에게 각각 제사하는 선농단과 선잠단

기우제를 지내는 우사단 · 곡식과 농사의 별에 제사하는 영성단 · 말의 조상에게 제사하는 마조단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에게 제사하는 여단 등의 제단이 마련되었다

한편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는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다

 

 

 

 

왕십리 무 · 청파 미나리

조선 후기 한양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도성주민 대다수는 찬거리를 시장에서 구입해 먹는 도시민으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도성 밖에는 근교농업이 성행하였다

동대문 밖 왕십리에서는 무 · 살곶이다리 인근에서는 순무 · 서대문 밖 석교에서는 가지, 오이, 수박

연희궁 주변에서는 고추, 부추 · 남대문 밖 청파에서는 미나리 · 이태원에서는 토란 · 한강의 밤섬에서는 약초 등이 재배되었다

이밖에 마늘 ·  · 호박 · 수박 · 연초 등도 도성 밖 곳곳에서 재배되었다

근교농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은 곡물 생산의 10배가 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채소 재배에 종사하였다

근교농업에 필요한 비료는 도성 안 주민들의 인분을 활용하였다

예덕선생 엄행수라는 사람이 이 일대에 인분을 공급하였는데 1년에 60냥을 벌었다고 한다

이 시기 상업적 근교농업의 성행을 잘 말해주고 있다

 

 

 

 

동호에서 서호까지

조선시대 한강에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명승이 많았다

호수 같은 강과 금빛 모래섬 · 갈대 무성한 습지 · 전망 좋은 언덕 등은 강에서만 접할 수 있는 풍광들이다

한강변의 명소들은 한도십경 · 서호팔경 등 여러 경관을 노래한 시에도 빠짐없이 들어있다

지금의 동호대교 인근인 동호(東湖)에는 거대한 모래섬인 저자도와 한명회의 별장인 압구정이 있었고

양화대교 인근의 서호에는 잠두봉과 선유봉이 최고의 명승으로 꼽혔다

이곳은 양반들의 누정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시인 · 묵객들이 즐겨 찾는 풍류와 문예의 현장이었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서호를 유람하고 보기 드문 경관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진 한강의 명승들은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 등의 진경산수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양의 풍속과 놀이

한양사람들은 다채로운 놀이를 즐겼다

만리재에서 치열하게 벌이던 편싸움(석전 · 石戰) · 청계천변에서 열리던 연날리기(방연 · 放鳶) 등은 남자 어른이나 아이들의 놀이였다

화창한 봄날 담 밑에 모여앉아 했던 풀각시놀음이나 교외나 야산에서 진달래 꽃잎을 얹어 지져먹던 화전놀이

집안 뜰에서 담장 밖을 훔쳐볼 수 있었던 널뛰기 등은 여자들의 놀음이었다

여름날 탕춘대나 삼각산 밑 벽송정 아래에서 발을 씻던 탁족은 양반의 놀이였고 동네 마당에서 즐기던 윷놀이는 서민의 놀이였다

또한 대보름날 남산에 올라 달을 보고 소원을 빌던 영월과 밤새도록 청계천 다리들을 밟고 다니는 답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겼다

놀이는 보통 세시 혹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봄철에는 새 생명의 기운을 누리는 마음에서 놀이를 하였다면, 여름에는 더위를 씻고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겨울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풍속으로 행하였다

 

 

 

 

출생

조선시대 사람들은 조상의 생명이 후손의 몸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여겨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을 큰 불효라고 생각했다

특히 가계계승을 위하여 아들을 낳기 위해 지극히 노력하였는데 굿을 하거나 바위나 계곡을 찾아가 정화수를 올리기도 하고

기자도끼라 하여 은도끼나 쇠도끼를 속옷 끝에 차고 다니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자하문 밖 기자암이나 인왕산 서쪽 선바위에서 아들을 비는 신앙행위를 하곤 했다

산모가 아이를 가지면 마음과 행동을 바로 하여 태교에 힘썼고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태항아리에 넣어 묻거나 깨끗한 곳에 따로 묻어 소중하게 보존하였다

아이가 태여난 지 100일 후에는 백일잔치 · 1년 후에는 돌잔치를 하여 축하하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기원하였다

 

 

 

 

도끼노리개(조선 후기)

 

 

 

 

혼례

혼례는 남녀가 성인이 되어 가정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의례로서 양가의 결합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결혼이 성사되려면 먼저 양가를 잘 아는 중매쟁이를 통해서 배우자를 구하였는데 정혼을 하게 되면 서로 사주단자와 택일기를 주고 받았다

여자 집에서 혼삿날을 정해서 보내면 신랑집에서는 혼인 전날에 혼수 예장을 넣은 혼수함을 보냈다

혼례날 신랑은 나무기러기를 가져와서 두 번 절하는 전안례를 치르고

초례상을 차린 후 집례자가 읽는 홀기에 따라 교배례(交拜禮)와 합근례(合巹禮)를 하였다

 

 

 

 

관직

양반가 자식들은 5세 때부터 과거공부를 시작하였다

과거는 보통 30~35세가 되어야 합격하였으니, 거의 25~30년 동안 과거에 전념하게 된다

서울에서는 문과시험의 경우 3차에 걸쳐 모두 열렸는데, 1차 초시는 서울 사는 유생과 생원, 진사를 위한 시험이었고

2차인 복시는 초시합격자 중에서 33명을 뽑았으며, 3차 시험인 전시는 복시합격자의 성적을 매기는 시험이었다

여러 관문을 힘겹게 통과한 합격자들은 임금으로부터 홍패와 어사화 · 술과 과일 등을 하사받았고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하여 시가행진을 하였다

 

 

 

 

제례

제사는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식이며, 조상에 대한 효행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거행하는 기일제와 설 · 단오 · 추석 · 동지 등 사명절에 묘소에서 거행하는 절일제가 있었다

또 먼 조상에게 1년에 한 차례 묘소에서 지내는 세일제와 한식이나 추석 때의 성묘 등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와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가 있었으나

후기에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도 부계 중심의 종법제도가 확립되면서 제례도 4대봉사가 확립되고, 맏아들이 제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한양의 금장구역과 은평구 이말산 비석

한양에서는 도시의 보호를 위하여 도성 밖 일정지역까지 금장구역을 설정하여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 구역을 벗어나면 묘지군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곳이 은평구 이말산(지금의 은평뉴타운 지역)이다

이곳의 발굴조사를 통해 5,000여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전시되어 있는 보모상궁김씨 비석 등은 이말산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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