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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 중구 내동

인천항이 개항하기 이전에는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하였고

1903년 부내면이 신설될 때 싸리가 많은 고개인 싸리재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 안굴 또는 내리(內里)라고 하고 부내면에 편입되었다

1906년 내동이라 개칭하였으며 1912년 내동과 외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만든 경동을 분할하였다

1937년 서경정으로 개칭하였고 1946년 경동 일부를 편입하여 다시 내동으로 개칭하였다

1977년 내경동에 통합되었으며 1988년 내경동이 신설된 동인천동에 통합되었다

 

 

동인천역

시점이다

 

 

 

 

삼화고속 정류소

1970년 2월 23일 운행을 시작한 인천~서울간 고속버스 정류장이었다

예전 종로2가 사거리에서 출발하는 삼화고속을 타고 몇 번 온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부터 택시회사가 있던 곳이다

 

 

 

 

인천내동교회

현재 한국 최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목사가 세운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로 알려져 있지만

1922년 발간한 인천내리교회 역사에는 내리교회가 2년 앞선 1885년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펜젤러목사 · 김기범목사 · 존스목사(좌측부터)

아펜젤러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7월 7일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회 찬송이었다

*

1901년 5월 14일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기범목사

*

1888년 5월 14일 20세로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디딘 존스목사는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빼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제2대 담임목사직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한국선교120주년기념비  2005, 4, 5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1885년 4월 9일 제물포에서 미 북감리교 선교부에 보낸 서신 끝부분에서

 

 

 

 

제물포 웨슬리예배당

내리교회 제2대 담임목사였던 조지 헤버 존스와 내리교인들이 1900년 6월 건축을 시작하여

190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에 약 1천 명이 첫 예배를 드린 최초의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이다

웨슬리 예배당은 아펜젤러가 1891년 내동 29번지에 세운 10평 정도의 한옥예배소를 허물고 신축한 건물이다

한옥예배소가 멸실되고 웨슬리예배당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한옥예배소에서 얻은 폐자재를 활용하여

우각동(현 창령동)에 있던 선교사 주택을 약 2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에스베리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1900년 8월 26일 증축하여 임시로 사용했다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예배당을 1955년에 허물고야 말았다

이에 모든 내리교인들과 뜻있는 인천시민들이 애석하게 여기다가 인천광역시의 지원으로 꼭 111년 만인 2012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유항렬 저택

유항렬은 1937년 한국 최초의 도선사다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주식의 선박 선장으로 인천~칭따오~상하이간을 운항했다

서쪽으로 난 테라스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에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았다 한다

 

 

 

 

성공회 내동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성당인 내동교회는 1891년 9월 30일 축성되었으나 6 · 25동란시 소실하여

이곳에 옮겨 1955년 8월 28일 정초식을 갖고 1956년 6월 23일 준공되었다

지금 교회 자리는 랜디스가 세운 성누가병원으로 1902년 6개월간 러시아 영사관으로 사용되었고

1904년 제물포해전 당시 일본적십자병원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중학교 교사로도 이용하였다

 

 

 

 

고요한 주교 · 랜디스 박사 흉상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로 인천에서의 선교는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코프(고요한)주교와 내과의사인 랜디스(남득시)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코프 주교는 현 인성여자고등학교 체육관 뒤 송학동 3가 3번지에 있던 교회를 중심으로 포교를 전념하였고

랜디스가 성누가병원을 세워 의료구호사업에 전심하여 교세 확장하였다

 

 

 

 

 구 인천감리서 터 표지석

현 한진 SKY TOWER 아파트 자리에 1883년 개항 직후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인천감리서가 생겼고

나중에 인천부(현 인천시청) 역활에다 개항장 재판소와 학교까지 들어섰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는데 이 학교가 후일 인천고등학교다

 

 

 

 

옛 감리서 터 사진

인천개항장재판소에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신포시장 신포닭강정

개항기 당시 일본인과 중국인, 서양인에게 고급 채소를 파는 푸성귀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는 쫄면 · 신포우리만두 · 닭강정 등이 생각나는 시장이다

추운 날씨에도 신포닭강정을 기다리는 줄이 길다

 

 

 

 

구 표관 터(외환은행)

1900년 건물을 신축하여 개업한 상설영화관이다

주로 일본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하던 객석 수 797개의 극장이다

광복 후 미군이 Sea House Theater로 사용했으며 미군 철수 후 시립문화관으로 개칭하여 인천시가 직영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 키네마극장이 세워졌다가 현재는 외환은행이 들어섰다 

 

 

 

 

신포동주민센터 앞 사진타일

 

 

 

 

인천중동우체국(인천 유형문화재 제8호)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고종 21) 도입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시행된 것은 갑오개혁 이후 전국에 우체사를 설치하면서였다

1922년 12월 1일 착공하여 1923년 12월 10일 준공하였다

 

 

 

 

구 일선해운(선광)

1925년 창립한 일선해운은 군산 · 목포 · 진남포에 출장소를 두고 해륙 운송 · 중계 · 대리업외 금광채굴업을 경영했다

인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4층 규모의 근대 건축물로 현재 (주)선광 소유다

 

 

 

 

구 금파 터(지금의 청실홍실)

현재 신포동과 신생동의 경계이자 5거리에 위치한 모밀전문점 청실홍실 터에 있었던 카페 건물이다

1930년대 모던니즘의 유행과 함께 서양에서 들어온 카페에서는 간단한 서양요리와 커피 · 맥주 · 양주 등을 판매했고

요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여종업원과 술을 마실 수 있었던 탓에 성황을 이루었다

 

 

 

 

구 조선식산은행 터(신포공영주차장)

산업은행 전신인 조선식산은행이 있던 자리다

 

 

 

 

구 미두취인소 터(국민은행)

미두시장은 1896년 인천 일본인 거류민이 설립한 인천미두취인소가 그 효시였다

 

 

 

 

구 대한천일은행 터(인천등기소)

 

 

 

 

한진그룹 창업 터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1945년 중구 해안동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트럭 한 대를 갖고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한진(韓進)은 「한민족의 전진」을 줄인말로 한국의 진보를 꿈꾼다는 의지로 표현한 것이다

 

 

 

 

인천아트플랫폼

 

 

 

 

인화문(仁華門)

한중문화관과 인천화교역사관 입구에 있다 

 

 

 

 

구 인천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국가등록문화재 제248호)

인천 개항 초기부터 해운과 물류수송을 담당하였던 상선회사 사옥이다

1883년 미쯔비시우편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시작하여 1885년 공동운송회사와 합병된 후 1886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이 건물은 1888년 건립되었는데, 초기에는 붉은 벽돌 건물의 사옥과 사택 · 창고 등이 같이 세워졌다

건물의 건립 연도는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목에 기재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해운 및 유통산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제물포해전이 있었던 1904년 당시에는 일본병참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항만 관련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사용되었다

 

 

 

 

테마 박물관거리

 

 

 

 

대불호텔 터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목사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대불호텔은 1885년 4월 이전에 영업 중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목사도 1885년 이곳에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대불호텔 사진

1888년 일본인 사업가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서울에 건립된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다

1918년 중국인에게 매각되어 중화루로 활용되다가 1978년 철거되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이곳에 묵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축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불호텔 삽화

대불호텔은 1978년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데

2011년 발굴조사를 통해 방과 복도 · 지하실 등 건물의 평면구조와 축조방식을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현장보존을 결정하였는데 이 때 초기 대불호텔의 삽화도 공개되어 신축 이전에는 일식 목조 2층 건물이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개항박물관(구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금융기관은 1878년 6월 개설된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으로

인천은 개항 후 부산지점출장소로 개설되었다가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최초의 우편배달부

우리나라 우편제도는 1884년 11월 18일, 서울과 인천 간에 우편물이 교환되면서 그 막이 올랐다

본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에 남아있는 우체부와 우체통(1912년식)의 모습에 기초하여 제작하였다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이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구 일본18은행 인천지점)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18은행은 인천과의 무역량이 증대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1890년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이다

 

 

 

 

포토존

구 일본18은행 인천지점과 구 일본58은행 사이에 있다

 

 

 

 

구 일본58은행 인천지점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일본58은행은 인천전환국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1892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893년 부산, 1895년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대금의 결제와 무역금융에도 주력하였다

후에 야스다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인천광역시 요식업조합에서 사용하고 있다

 

 

 

 

중구청 건물(구 일본영사관 터)

이 건물은 인천부청사로 지어진 인천의 행정 중심지 역활을 해온 역사적인 곳이다

1985년 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기까지는 인천시청사로 지금은 중구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2층이었는데 1964년 3층으로 증축되었다

 

 

 

 

역사문화의 거리

중구청 앞이다

 

 

 

 

THE FIRST 제일 최초(第一 最初)

최초의 근대 주화 · 근대 공원 · 기관차 · 교회 · 자석식 전화기 · 축구경기 · 자장면 등이 인천 중구청 벽에 붙어있다

 

 

 

 

동국빌리지(구 오례당 주택 터)

 

 

 

 

오례당 저택(1953년 경 사진)

1882년 조선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관세주권을 보장받는다

이에 따라 일본만 무관세 지역으로 둘 명분이 사라진다

이에 조선정부는 1883년 제물포항 개항을 앞두고 개항장에 설치된 해관업무를 관장할 인물을 물색했다

그러나 세관 설치 운영 경험이 없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언을 구한다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은 일본의 전횡을 막으면서 청국의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국해관과 천진영사를 역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목인덕)를 천거하였다

1882년 겨울 조선에 입국한 그는 고종으로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벼슬을 받는다

오늘날로 치면 외교통상부 차관에 해당된다

그는 1885년 9월 해임될 때까지 약 3년간 조선의 세관 업무를 총괄한다

오례당은 묄렌도르프를 따라 조선에 들어온 해관요원 중 한 사람으로 중국어 · 영어 · 독일어 · 프랑스 등에 두루 능통한 세관업무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해관문서에 의하면 오례당은 1883년 4월 24일자로 왕명에 의해 종신직 해관 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 내한한 것은 인천해관 창설일인 6월 16일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인천제일교회

각국조례지 계단이다

 

 

 

 

인천제일교회

1946년 10월 19일 14명의 월남한 장로교인들이 서울 영락교회에서 파송한 한병혁 목사를 모시고 창립예배를 드림

 1950년 2월 1일 신축교회 70평을 기공하여 건축 중 6 · 25전쟁으로 중단하였다가 수복 후 완공하였다

 

 

 

 

답동성당 · 인천감리서 터(한진 SKY TOWER)

인천제일교회에서 본 동쪽이

 

 

 

 

송도신도시 · 인천항

인천제일교회에서 본 동남쪽이다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

 

 

 

 

홍예문(虹霓門)

인천시내 남북간 교통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철도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공병대가 1906년 착공, 1908년 준공했으며

처음에는 혈문(穴門)이라고 불렀다

축조양식은 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한 아치구조인데 그 당시 일본의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경인면옥

인천에서 평양 옥류관 평양냉면과 비슷한 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세대 경인면옥 주인장은 1944년 서울에서 냉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6년 인천으로 내려와 경인식당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열었고 대를 이어 오늘날 경인면옥에 이르고 있다

 

 

 

 

신포지하상가

 

 

 

 

동서대약국

인천기독병원 주변은 한 때 인천의 의료타운이라 할 만큼 십여 개의 개인 의원들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들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 강화 ·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로 사가곤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약국이 동서대약국이다

 

 

 

 

동서대약국

1946년 창업시 약국 전경 사진이다

 

 

 

 

학다방

지금도 커피숍이나 서양식 카페가 차고 흘러넘치지만 예전에는 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거의 쇠퇴해 사라지고 없다

특히 중구 신포동 · 용동 · 내동 · 인현동 · 시청이 있던 시절, 관동 ·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은성다방 · 짐다방 · 별다방 · 유토피아다방 · 신포다방 · 르네상스다방 · 흙다방 · 태양다방 · 상록수다방 · 우봉다방

삼미다방 · 소월다방 · 성지다방 · 미담다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재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은 신포동의 국제다방과 경동의 학다방 정도이다

 

 

 

 

동인천역 6번출구

마침점이다

 

 

 

 

개항장 · 차이나타운 · 송월동 동화마을 지도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7.3km, 소요시간 3시간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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