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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 중구 용동

인천 중구 용동은 전철 동인천 남부역 길 건너편 왼쪽으로

인천항이 개항하기 이전에는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 지역이었으며

1903년 제물포지구에 부내면을 신설할 때 용처럼 생긴 용고개 마을이라 하여 용현 또는 용동이라 하였다

 

 

동인천역 1번출구

시점이다

 

 

 

 

대한서림 방향이 인현동이고 내리교회 건너편 방향인 왼쪽 편이 용동이다

동인천역 앞에서 봤다

 

 

 

 

동인천역

대한서림 앞에서 봤다

 

 

 

 

동인천역 지하보도 5거리 안내판

동인천역 지하아케이드 5번출구로 나간다

 

 

 

 

예전 건준 인천지부 터(현 농협)

인천 좌익의 핵심 박남칠이 운영하던 인천미곡조합은 사무장 이승협의 탁월한 조직 활동으로 크게 성장하였고

그것을 근간으로 광복 후 인천미곡상이 중심이 되어 건준 인천지부가 신속하게 설립되었다

 

 

 

 

예전 비강조합 터(성환상회)

현재 채미전 거리 초입에 있는 성환상회 자리에 죽산 조봉암이 운영하였던 비강조합이 있었다

비강조합은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모아 연료로 공급하는 곳이다

그 옆엔 인천 좌익의 핵심 박남칠이 운영하던 인천미곡조합(현 농협)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칭 '깡시장'

1930년 공설청과물시장이란 이름으로 송림동 · 숭의동 · 용현동 등지의 과수원에서 수확한 과일을 팔았던 곳이다

특히 여름에 서울 오류동에서 달기로 소문난 오릿골 참외나 청참외를 팠았다

이로 인해 이 시장을 참외전거리라 불렀다

지난 1982년 동인천과 숭의동간 2km 가량의 도로 확장과 1998년 인천시가 주차장 마련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다수의 상인들은 송림동 동부시장과 숭의철교 인근 청과물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인천에서 배다리로 가는 길이다

 

 

 

 

화순상회(和順商會)

오래된 건물에 세 자리 전화번호가 시멘트로 성형되어 있다

페인트 칠도 오히려 아래층보다 깨끗하다

무슨 건물일까?

 

 

 

 

화순상회 전화 667번

전화 국번도 없이 3자리 전화번호다

 

 

 

 

삼강설렁탕

1950년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해 해장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평양옥과 더불어 국밥류를 파는 음식점으로는 인천에서 제일 오래된 집이다

3대에 걸쳐 영업하고 있다

 

 

 

 

배다리

철길 밑으로 예전에 배가 들어와서 배다리라 한다

 

 

 

 

항도백화점

1954년 인천고무공업사 장범진 사장이 인천 최초의 백화점을 세웠다

당시로서는 드문 3층짜리 건물에서 진귀한 양품류만 팔았으나 잘 팔리지 않아 1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

고주박사란 간판이 걸린 건물이다

 

 

 

 

경동여인숙

집에서 자는 것 같아 좋을 듯하다

 

 

 

 

이춘희미용실

주차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칼국수거리 · 길병원 갈림길

 

 

 

 

칼국수거리 초가집칼국수

80년대엔 칼국수거리란 팻말이 들어설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젠 타산 맞추기 힘들어 문 닫은 집이 많다

이 집도 60년 전통이다

 

 

 

 

인천흥업주식회사

건축 연도가 1910년대라는 설과 건축양식이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 인천미두취인소 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1930년이라는 설이 있다

인천흥업은 일종의 대부업체였다

 

 

 

 

인천흥업주식회사(仁川興業株式會社) 간판

 

 

 

 

가천길대학부속 동인천 길병원

1958년 5월 이길여박사는 친구와 함께 이길여산부인과를 개원했다

병원은 적산가옥 2층 10평 남짓한 목조 건물이었다

 

 

 

 

용동(龍洞) 큰우물

1883년 인천 개항 무렵 조성된것으로 전해지는 지름 2.15m, 깊이 10m의 우물로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인천시민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용동(龍洞) 큰우물 현판

1967년 기와 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현판은 이때 인천 출신 당대의 최고 서예가였던 동정 박세림이 썼다

 

 

 

 

우현 고유섭 생가 터 빗돌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했다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해 어린시절 조부모와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말이 없는 의기소침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3 · 1운동 때는 태극기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돌리고

용동 일대에서 만세를 부르며  돌다가 붙잡혀 3일간 구류를 당한 적도 있을 만큼 강한 성격도 있었다

 

 

 

 

용동권번(龍洞券番)

1901년 5월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용동권번,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대중가요 가수로 스타가 된 이화자와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김일타홍, 일본인보다도 일본 노래를 잘 불러 일본요정으로 단골 출장을 다닌 이화중선

아리랑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오향선,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 일 넘기게한 박미향 등이 있다

인천 출신 기생 중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생들이다

 

 

 

 

용동권번(龍洞券番)

일본 유학까지한 인텔리 여배우 복혜숙도 토월회 활동 때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토월회가 인천 공연에 나섰다가 흥행에 실패하자 남자 단원들이 밀린 여관비와 식비를 마련하겠다고 그를 남겨놓고 서울로 떠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복혜숙은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익과 권번 개혁에 앞장섰다

*

2011년 동사무소는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하지만 지역문화단체로부터 한소리 듣자 며칠 후 시멘트를 벗겨내었다

 

 

 

 

소화 6년 수축(昭和六年 修築) 각자

1897년 1월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이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냈다

또 1925년 7월 부천군(현 인천 남구)부근 수해를 입자 용동권번에서는 식료품으로 그들을 도왔고

1946년 4월 15일엔 인천권번 대표 김본건이 광복 후 중국에서 귀환한 전재민 동포들이 있는 수용소를 방문해

기생들이 모은 구호금 1만 원을 전달했고 동명학원에도 1만 원을 기부했다

이밖에 영화보통학교 운동장 확장 비용도 마련하는 등 사회 참여도가 높았다

 

 

 

 

신신예식장(현 삼성요양병원)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예식장으로 이 부근에 용동권번이 있었다고 한다

 

 

 

 

능인사

인천 능인사의 역사는 곧 개항으로 시작된 인천 근대 불교의 역사다

1883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을 시작으로 외세 각 열강들이 인천으로 진출하고

인천은 세계 각국과 교통하는 조선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옛 지명인 제물포 · 배다리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인천 연안부두의 명성과 함께 중국 등으로 통하는 항구가 번성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도 스님들의 해외 방문이나 중국 교류 등을 위해 인천 거점의 사찰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곧 오늘날 능인사의 시작이다

 

 

 

 

애관극장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국내 최초의 극장이다

1907년에 개관한 단성사보다 12년이나 앞선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되던 시점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부산 출신 인천 갑부 정치국에 의해 개관된 협률사는 개항장 인천 이미지에 맞춰 「축항사」로 이름을 바뀌었다가 1926년경에 애관으로 개명했다

애관극장은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었다

미스터 유니버스선발대회 ·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 피아노 연주회와 1945년 8월 18일의 조봉암 주도로 결성된 인천 건준 행사도 열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에서 당대의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인사하던 날 경동 일대는 교통이 마미되었다고한다

 

 

 

 

인천 내리교회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7월 7일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회 찬송이었다

 

 

 

 

용동 큰우물먹거리 아치

 

 

 

 

대한천일은행 지점(지금 우리은행)

대한천일은행은 구한말 대한제국 관료 층과 상업자본가들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민족은행이다

현재 우리은행(상업은행→한빛은행→우리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광무 3) 1월에 설립했다

우리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 5월 10일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지점이다

 

 

 

 

인천 학생6 · 25참전관

얼마 전까지 신포시장 옆에 있었는데 이전했다

 

 

 

 

인천 학생6 · 25참전관 서해문화

1950년 12월 18일 인천의 중고등학생 3천여 명이 인천학도의용대 대장 이계송(고려대 2학년)의 지휘아래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을 걸어가서 자원 입대 후 참전하여 208명이 전사하였다

 

 

 

 

인천 학생6 · 25참전관

2015년 8월 15일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

 

 

 

 

송미여인숙

예전 권번이 있었 듯 술집이 많고 여인숙이 많은 동네다

 

 

 

 

술집 · 노래방 · 게임방 · 고시텔이 공존하는 골목

 

 

 

 

동인천역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4.4km, 소요시간 2시간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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