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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1858~1902)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 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984년 2월 배재중 · 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한 후

2008년 7월 유서 깊은  배재학당 동관(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 건물이 다양한 근대 유물들과 함께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

1916년 준공하여 배재중 · 고등학교가 1984년 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東校舍)로 사용한 곳이다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8월에 세운 학교로 처음에는 주변의 민가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교정에는 이 동관을 비롯, 1887년에 준공하여 1932년에 철거된 본관, 1923년에 준공한 서관

1933년에 존공한 대강당, 광복 후에 세워진 현대식 교사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관은 고덕동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었고, 다른 공원은 배재공원을 만들 때 철거되었다

이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되어 배재중 · 고등학교 이전 후 문화재로 지정(2001. 3. 15) 되었고

내부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외장 및 치장쌓기 벽돌구조가 뛰어나고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부재들이

건립 당시의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근대교육의 발상지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사진이 있다

오른쪽에 배재고 교훈인  慾爲大者 當爲人役(욕위대자 당위인역)이라 써있고

왼쪽에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써있다

 

 

 

 

1층 배재학당 교실 체험실

1930년 대 배재학당의 교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당시 사용했던 칠판과 책걸상 등을 통해 근대 교실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으며 영상물을 통해 아펜젤러의 교육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교실문 옆에 버턴을 누르면 영상이 시작된다

 

 

 

 

배재학당(培材學堂)

당시 조선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를 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세워지

처음엔 두 명뿐이었는데 그들 마저도 수시로 결석했지

그러네요 그땐 의무교육이 아니라 누구나 공부 안할 자유가 있었네요...ㅎㅎ

 

 

 

 

1930년 대 배재학당 수업모습

배재학당에서는 한문과 교리문답만을 한글로 강의하고 그 외의 과목은 영어로 강의하였다

 

 

 

 

배재학당 연표

배재학당 태동과 배재의 정신실로 가는 복도에 있다

 

 

 

 

배재학당가 / 아펜젤러 작사곡

 

 

 

 

배재학당 태동과 배재의 정신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학당의 시작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인재를 길러낸 배재의 교육 이념을 만나는 공간이다

 

 

 

 

19세기말 조선 선교사들

1882년 조선 정부와 미국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엇다

이와 함께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 개신교회인 정동교회를 비롯하여 서양식병원인 시병원과 보구여관이 설립되었다

1884년 알렌 부부가 의사 자격으로 입국하였고, 그 이듬해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북장로교의 언더우드가 입국하였다

*

선교사들의 활동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배재학당 ·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 ·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여관 · 스크랜턴의 시병원 등이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의 의해 세워졌다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 배재학당

1885년 아펜젤러는 정동에서 스크랜턴의 집을 사들여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이겸라 · 고영필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유길준 서유견문(兪吉濬 西遊見聞 · 1895)

최초의 국한문혼용서로서 내무대신 유길준이 1881년 일본에 갔을 때부터 구상하여 1885년 미국에서 돌아와 연금생활을 하면서 집필한 것이다

1889년 완성되었으나 6년 후인 1895년에 출간되었다

서양 각국의 지리 · 역사 · 교육 · 법률 · 행정 · 경제 · 사회 · 군대 · 풍속 · 과학기술 · 학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있다

이 책의 발간 후 신문 · 잡지 국한문 혼용과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배재학당 벽돌

아펜젤러가 감독하고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이 지은 한국 최초의 벽돌 교사 배재학당에 사용되었던 벽돌이다

 

 

 

 

고종황제의 현판 하사

고종황제는 학교 이름을 배재학당(培材學堂 ·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 짓고

당시의 명필 정학교에게 현판을 쓰게한 후 김윤식을 통하여 고종 24년(1887) 6월 8일 그 액을 전달하였다

 

 

 

 

사민필지(1889)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지은 세계지리지이다

헐버트는 고종 23년(1886)에 우리나라의 초청으로 육영공원의 교사로 취임하여 세계의 지리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의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한국을 기준으로 각 나라에 관해 설명한 것이 특징이며 각 나라의 수출입액은 한국의 화폐단위인 원으로 표시하였다

 

 

 

 

삼문출판사

1888년 배재학당 지하 산업부실에 설치된 인쇄소로 1888년 1월 배재학당 교사로 부임한 올링거 선교사의 책임하에 이루어졌다

 

 

 

 

천로역정 목판(1896)

영국의 존 버니언이 지은 종교소설로 선교사 게일에 의해 국역되었다

1896년 4월 7일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학생들에 의해 순 한글로 발간된 천로역정의 목각판이다

 

 

 

 

아펜젤러 훈장(1963)

1963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이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에게 추서한 문화훈장(국민장)이다

 

 

 

 

아펜젤러 문화훈장증

대통령권한대행 ·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 내각수반 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아펜젤러 순직 1주기 기념 현판(1903년 6월 16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 주시경 선생 상

최초의 근대 학생회였던 배재학당의 협성회를 토대로 한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배재학당을 소개한다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생단체인 협성회가 1896년 11월 30일 조직되었다

 

 

 

 

배재의 교육정신

매주 토요일마다 서재필 박사와 윤치호 박사의 주도로 국회제도에 대한 연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회를 진행토록 하였다

 

 

 

 

명예의 전당

이승만 · 주시경 · 나도향 · 김소월 등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배재인을 소개한다

 

 

 

 

또한 한국 근대 체육의 진면목도 확인할 수 있으며

근대 문학 작품 중 최초로 문화재로 등록된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초판본도 있다

 

 

 

 

배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우리나라 최초의 학칙 · 교지 · 교사진 · 세부교육 과정 등을 소개한다

 

 

 

 

 배재학당에서는 2~3차례 타임캡슐을 만들었는데

1887년 최초의 벽돌교사를 지을 때, 1933년 대강당 기공식 때 그리고 1963년 정동 소재 건물 일부를 철거할 때였다

여기 유물들은 이들 타임캡슐에서 나온 것들이다

*

동전 · 성경책 · 찬송가 등이 들어 있던 청동함(1932) · 동창회명부(1955, 1960) · 창립70주년 기념 배재사(1955)

 성경전서(1956) · 찬송가(1955) · 1950~60년대 학교 배지와 교복단추

 

 

 

 

동창회명부(1955 · 1960)

 

 

 

 

배재대학교의 부활

 

 

 

 

배재학당의 교육 목적

 

 

 

 

배재학당 규칙

1, 2, 3, 4번 다 재미있다

 

 

 

 

120여 년전에 시작된 배재의 글로벌교육

 

 

 

 

월간 배재 창간호(1957)

1957년 6월 15일 배재고등학교 김창화 선생이 주간이 되어 발행하였다

 

 

 

 

배재학보 교지(1918)

1918년 10월 10일 발행되어 2호로 끝나고 1922년부터 「배재」라는 이름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배재학보 교지는 나도향을 중심으로 한 「백조」 동인을 형성하는데 기틀이 되었다

 

 

 

 

삼일운동과 배재학당 · 배재 YMCA · 배재의 문인들을 소개한다

 

 

 

 

졸업증서(1922)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교장이던 시기의 졸업장이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일람(1934)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소개 · 교과과정과 교과목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배재의 수학여행 · 배재의 전인교육 글로벌교육

배재학당에서는 최초로 수학여행과 고적답사를 하였다

1922년 졸업반 62명이 함흥으로 3학년이 논산 은진미륵으로 봄철 여행을 떠난 것이 처음이다

1923년 10월에는 금강산 · 1924년 가을에는 대련, 여순, 봉천 등지로 수학여행을 떠났고

1941년 6월 일본 동경, 경도, 나라, 광도 등의 명승유적지를 둘러보았다

*

배재학당에서는 한문과 교리문답만을 한글로 강의하고 그 외의 과목은 영어로 강의 하였다

 

 

 

 

졸업앨범 · 학생수첩 · 통신부

 

 

 

 

2층은 아펜젤러 · 노블 기념관

 

 

 

 

노블 선교사와 초기 선교사들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파의 영역을 떠나 특히 교육사업과 교회활동에 힘을 모았다

정동은 그 중심지가 되어 여러 학교들과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장로교와 감리교를 가리지 않고 교육사업과 목회활동을 벌렸다

 대표적인 예로 스크랜턴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의 초대학장은 감리교의 앨리스 아펜젤러 선교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선교사들은 그들만의 국경일 등을 함께 모여 축하하는 단합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경성법원과 숭례문이 있는 지도와 책들을 소개한다

 

 

 

 

한국의 역사(1905)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사를 이끌었던 선교사 헐버트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쓴 책이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 가죽 가방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아펜젤러(1900년대)

앞 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는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숭실학교와 숭덕학교를 설립한 김선주 목사이다

 

 

 

 

윌리암 아서 노블 가족

1892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매티 왈칵스와 결혼한 후 한국에 입국하여 3년간 배재학당 교사를 역임했으며

1896년 평양으로 건너가 기독교 정착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매티 왈칵스는 노블과 결혼 후 한국에 들어와 배재학당 최초의 여교사가 되었다

 

 

 

 

노블 선교사 가족(1919년 6월)

노블 부부와 쌍동이들 · 헤롤드 그리고 딸 루스와 그의 남편 헨리 다지

 

 

 

 

소설 이화

윌리암 아서 노블 선교사가 쓴 영문소설로 1906년 출간되었다

그 옆은 한글번역본이다

 

 

 

 

노블의 가족 · 선교사진 앨범

1934년 6월 한국감리교 50주년 기념사진(우측)

 

 

 

 

루스 노블의 일기와 일기에 있던 종이인형과 스크랩(1909년 1월~6월)

루스 노블의 일기와 일기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스크랩들과 루스 노블이 만들어서 갖고 놀았던 인형들이다

 

 

 

 

매티 왈칵스 노블의 일기(1892~1934)

총 5권으로 1892~1911 · 1919~1925 · 1927~1934년으로 나뉘어져 있다

당시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을 파악할 수 있다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친필 일기(1896~1900)

이승만과 주고받은 서신 · 배재학당 우물 사용과 관련하여 고종에게 올린 진정서 등 1890년대 정동 중심의 한국근대기 모습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배재학당의 설립자 ·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1858~1902)의 선교여행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기독교와 교육에 헌신한 그 자녀들의 일대기를 살펴 볼수 있다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

미국 북감리교에서 한국에 파견한 첫 선교사이다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여나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82년 플랭클린 마설 대학을 졸업하고 드루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1884년 12월 엘라 다지와 결혼하자마자 1885년 2월 27일 일본을 경유 4월 5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다시 잠시 일본에 머물다가 7월 서울 정동에 들어왔다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 자필 일기(1889년 8월 15일~1890년 8월 29일)

 

 

 

 

아펜젤러 부부 앨범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1858~1902)와 그의 부인 엘라 다지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생활하며 직접 촬영하고 수집한 사진들을 모아 정리한 앨범이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 자택에서 학생들과 함께(1936)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의 교장이 된 헨리 다지 아펜젤러(1889~1953)와 그의 아내  루스 노블 아펜젤러(1894~1986)의 일대기를 통해

그들의 한국 사랑과 교육과 선교에 대한 헌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1889년 11월 6일 서울 중구 정동 23번지에서 태여났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노블 선교사의 맏딸 루스 노블과 결혼하여 1917년 내한하였다

1920년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학교를 위해 일하였고 194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6 · 25전쟁 때 한국사회 복구와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다시 한국에 왔다

1952년 11월 배재학교 재단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중 건강 악화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1953년 12월 1일 별세하였다

"나의 뼈를 나의 조국이요 사랑인 한국 땅에 묻어달라"라고 유언하여 1954년 10월 18일 화장된 유골이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 11묘역에 안장되었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 일기(1910~1914)

 

 

 

 

헨리 다지 아펜젤러의 거주허가증 · 자동차 면허증 지갑 등이다

 

 

 

 

루스 에밀리 노블

1882년 선교사로 내한한 윌리암 아서 노블 선교사의 맏딸로 1894년 6월 14일 서울에서 태여났다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1917년 헨리 다지 아펜젤러와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1940년 남편과 함께 귀국 후 1950년 구호사업을 위해 다시 한국에 왔다

 

 

 

 

루스 노블 아펜젤러의 여권 · 거주허가권 · 운전면허 등(1920~1950년 대)

 

 

 

 

루스 노블의 가족 앨범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쓰던 책상 · 타자기

*

이제 배재학당 창립 130주년 기념기획전이 열리는 3층 기획전시실로 간다

교지로 본 시대상 · 젊은 날의 꿈을 전시 중이다

 

 

 

 

3층 기획전시실

 

 

 

 

무제 / 나도향

우리의 몸을 덮은 노곤한 비단 이불을 차 던지라

우리는 눈 뜨고 장님이 되지말고...

배재학당 교지인 '배재' 학보 1921년 제2호에 실린 글이다

*

3층 전시실 입구에 있다

 

 

 

 

배재교지

1896년 독립신문과 1898년 배재학당 학생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협성회 활동을 대내외에 알리는 협성회회보와 뒤이은 매일신문에 연원하고 있다

 

 

 

 

1800년 대 · 1900년 대 교지 활동 상황

협성회회보와 교지 배재 등이 테이블에 진열되어 있다

 

 

 

 

1940년 대부터 1990년 대까지의 상황이 전시되고 있다

 

 

 

 

협성회회보 · 매일신문

협성회회보는 배재학생들이 결성한 협성회 회보로써 1898년 1월 1일자로 창간되었다

주간지로 제14호까지 발간하였고 1898년 4월 9일부터는 「매일신문」으로 이름을 고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간신문으로 발행했다

백성들을 계몽하고 열강의 다툼속에서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던 애국계몽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논설과 내 · 외국의 소식이 실렸다

 

 

 

 

배재학보 · 교지 배재 창간호

1918년 동창회를 중심으로 배재학보가 창간된 후 1922년 배재로 이름을 바꾸어 발간되었으며

일제강점기 검열로 인한 정간과 휴간을 반복하였다

 

 

 

 

1800~1899

협성회보 · 매일신문 · 독립신문

 

 

 

 

1918 배재학보 창간호 발행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배재 25 · 26 · 27호 발행

 

 

 

 

배재학당 학생들이 1920~30년 대에 실제로 사용했던 책걸상이다

 

 

 

 

소월의 방

"소월이 배웠던 배재학당의 책상에서 길손이어, 그대의 씨달픈 마음, 시한절로 쓰며 가다듬어 보지 않으시려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는 안내판이 책상에 올려 있다

 

 

 

 

배재학당의 회화나무

소월의 방 창문으로 보인다

 

 

 

 

교지에는 학생들이 그린 만화 · 캐리커처 외에도 도안 광고 등이 실렸다

간략함 속에서도 당시의 문화적 분위기와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속 모르는 만년필 장사 / 도향(제3호)

 

 

 

 

교정

 

 

 

 

교지를 만들던 원고와 타자기

 

 

 

 

졸업장 · 배재학당 진급증서 · 배재 창립 50주년 기념전람회 진열목록

조선의 교육(조선총독부 발행) · 통신부 · 동창회명부 · 졸업앨범 · 배재 클럽 배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배재학당 통신부(1917)

고등보통학교 제4학년 이건춘

 

 

 

 

향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6.5m · 둘레 2.25m · 나이 525년 · 지정일자 1972. 10. 12

동교사 뒷편에 있다

 

 

 

 

과거 배재 교정의 회화나무

소월의 방 창문으로 보이던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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