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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 중구 정동

정동(貞洞)은 서울 중구에 속한 동으로 덕수궁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동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는 조선 건국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신덕왕후가 조선의 첫 번째 왕비다

하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 태종 이방원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끝내 화병으로 죽는다

이에 태조는 부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법도를 어겨가면서까지 사대문 안 궁궐 근처에 정릉을 만든다

 

 

지하철 종로선 개통에 즈음하여 / 1974, 8, 15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정동 걷기의 시점으로 잡은 시청역 2번출구 안에 있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시청역 2번출구에서 덕수궁 방향으로 걷는데 수문장 교대식 안내방송이 들린다

수문장 교대식은 하루 3번 11시 · 오후 2시 · 오후 3시 30분에 한다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동 해치

서울의 상징 해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정의와 청렴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예부터 해치를 궁궐 앞에 세운 이유는 관원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게 하려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조정의 신하들이 광화문을 드나들 때마다 해치 꼬리를 쓰다듬으며 청렴의 마음을 가다듬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

13층 정동전망대에서 서울 풍경을 보려했으나 청사 문이 닫혀있다

 

 

 

 

김장생 · 김집 생가터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 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 1574~1656)이 태어나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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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동 화단에 있다

 

 

 

 

덕수궁 돌담길 타일 블록

시립미술관 · 덕수궁 석조전 · 정동교회 · 덕수궁 돌담길 · 옛 한양지도 · 옛 러시아 공사관 · 덕수궁 대한문 · 서울시청 · 성공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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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 돌아볼 곳이다

 

 

 

 

덕수궁 돌담길

 

 

 

 

어묵 · 감자튀김 노점

 

 

 

 

장독대 / 이환권

멀리서 보면 장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 같은데 다가가보면 사람을 장독에 꾹꾹 눌러 담았다 꺼내 놓은 것 같이 보인다

작품에 반영된 가족들은 작가 친구의 가족 3대로 구성하였다

 

 

 

 

정동교회 사거리

오른쪽이 미국대사관저로 가는길이다

 

 

 

 

장미 빛 인생 / 최정화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최정화의 조형물은 예술과 비예술,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감성을 보여준다

전통 조각 재료를 탈피하는 플라스틱 합성 재료에 빨간 공업용페인트로 채색한 거대한 꽃송이는

대중적 키치미학으로 풀이된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

시립미술관으로 가는 들머리에 있다

 

 

 

 

육영공원 터 · 독일영사관 터 · 독립신문사 터

육영공원은 정부에서 세운 근대식 교육공원으로,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1886년 9월 설립 당시부터 1891년 박동(현 수송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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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영사관은 1884년 박동에 개설되었으며 1891년 이곳에 있던 육영공원과 자리를 맞바꾸면서 정동 시대를 열었다

1902년 다시 상동(尙洞 · 현 남창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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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한글판과 영문판 두 가지로 발간되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할 때부터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이곳 독일영사관 터 안에 있었다

 

 

 

 

미술관 숲속에 서있는 남자

 

 

 

 

서울시립미술관(구 대법원 청사 · 등록문화재 제237호 / 1928년)

이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 건물로 조선 말 개화기 때 평리원(平理院 · 한성재판소)이 세워졌던 곳이다

이곳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 지상 3층으로 근세 고딕풍으로 지은 것이다. 뾰쪽 아치가 아닌 반원형 아치를 사용함으로써 장중함을 더하고 있다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조에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었다

건물의 평면은 日자로 만들었는데, 중앙계단과 연결통로를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두 개가 있어 좌우대칭을 이루었다

법원단지가 이전된 후 서울시가 이 건물을 인수하여 서울미술관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공사를 하였다

공사 중 구조적으로 약화된 부분들이 드러나 정면의 벽판만 보존하고 나머지 부분은 철거하여 새 건물을 이어 지었다

이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 보존 방법 중 하나인 정면보존 방법의 사례이다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

1916년 준공하여 배재중 · 고등학교가 1984년 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東校舍)로 사용한 곳이다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8월에 세운 학교로 처음에는 주변의 민가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교정에는 이 동관을 비롯, 1887년에 준공하여 1932년에 철거된 본관, 1923년에 준공한 서관

1933년에 존공한 대강당, 광복 후에 세워진 현대식 교사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관은 고덕동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었고, 다른 공원은 배재공원을 만들 때 철거되었다

이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되어 배재중 · 고등학교 이전 후 문화재로 지정(2001. 3. 15) 되었고

내부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외장 및 치장쌓기 벽돌구조가 뛰어나고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부재들이

건립 당시의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근대교육의 발상지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

하늘기둥 / 홍성경 作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세워진 배재학당은 신교육의 발상지이며, 한국기독교의 초석이다

본 작품은 기독교 정신과 신교육의 이상적 접목을 이룬 배움의 전당이란 주제하에

7일간의 천지창조를 의미하는 7개의 십자가가 작품의 전체적 구성을 이루고 있다

튼튼한 반석 위에 우뚝 솟은 십자형상의 기둥은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21세기를 향해 날아오르는 배재의 힘찬 날개 짓을 상징한다

 

 

 

 

피아노 치는 여인 / 김경옥 作

 

 

 

 

독립신문사 터(獨立新聞社 址)

고종 33년(1896) 우리나라 첫 민간신문사를 세우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다시 돌아와 창간한 신문이다

 

 

 

 

신교육의 발상지 빗돌

배재학당(培材學堂)이 있던 자리다

 

 

 

 

신아빌딩

 

 

 

 

정동교회 100주년 기념비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에 이 땅에 오신 미국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다

정동교회의 첫 예배당은 1897년 12월 27일에 봉헌되었으며, 새 예배당은 1979년 4월 15일에 감리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봉헌되었고

1990년 4월 5일에는 본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사회교육관이 봉헌되었다

 

 

 

 

작곡가 이영훈 추모비

영훈씨 !

이제 ! 우리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영훈씨의 음악들과 영훈씨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 일상 속에 당신의 노래비를 세웁니다

영훈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2009.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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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와 발표곡 그리고 광화문 연가 가사가 있다

 

 

 

 

카페 길들여지기

 

 

 

 

혹성들의 신화, 놀이, 비젼 / 천수천 作

정동극장 외벽에 설치된 벽화 「혹성들의 신화, 놀이, 비젼」은 정동극장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문화공간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작품이다

중앙에 자리한 아름다운 여인상은 한국의 전통적 율동미를 왼쪽 상단부의 다리들은 창조와 생산을 위한 방황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 서있는 세 사람은 가족 또는 사람들이 정동 문화공간을 찾는 형상이며, 상부의 나선형은 이상을 실현하는 비젼의 신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벽화 전면에 서있는 삼각기둥은 첨단시대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으며, 전체적으로 현대와 전통적 형태

그리고 색채의 구성을 조화롭게 표현함으로써 정동 문화공간이 갖는 이미지를 종합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명창 이동백 像

1867년 충남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피나는 독공(獨功)으로 득음(得音)하여 훗날 편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구축할 수가 있었다

그는 판소리를 품격 높은 민족예술로 승화시켜 그 공으로 고종황제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았고

창극을 발전시켜 일제강점기엔 민중의 정한(情恨)을 풀어준 바가 있다

명창 이동백은 1950년 말년의 정착지였던 경기도 평택에서 소리인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젊은 시절 활동무대였던 원각사의 맥을 잇고 있으며

그 옛터로부터 가까이 자리한 이곳 정동극장에 그를 기리는 기념조형물을 세운다

 

 

 

 

중명전(重眀殿)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에 궁궐로 편입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다

중명전은 왕실도서관으로 지은 2층 벽돌 건물이며, 정관헌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이 설계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에 이 일대가 덕수궁에서 제외되면서 다른 건물들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인 동시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을 집무실이자 외국 사신 알현실로 사용해 중명전으로 격상되었다

중명전 1층 왼쪽 방이 을사늑약이 강제되었던 방이다

 

 

 

 

푸른색이 1910년 당시 덕수궁 궁역이다

 

 

 

 

과거 신아일보 별관

한국 최초로 다색인쇄를 시도했던 일간신문사로 1980년 제5공화국을 세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경향일보에 흡수되었다

 

 

 

 

이화박물관

이곳도 10일까지 휴관이다. 정동전망대에 이어 두 번째 휴관이다

 

 

 

 

정동 회화나무

캐나다 대사관 앞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 높이 17m · 지름 5.16m · 나이 500년이 넘는 고목으로 1976년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2003년 캐나다 대사관 신축 당시,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해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굴착 시기도 나무의 동면 주기에 맞춰 진행했다

 

 

 

 

어서각 터(御書閣 址)

최규서(崔奎瑞 · 1650~1735)의 집터 안에 있던 영조의 어필을 봉안한 곳이다

조선 경종 ·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는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을 평정한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이 문서에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영조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필을 내렸다

일사부정은 지조와 신의가 하나되어 사직의 안위를 지켰다는 뜻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

1182년 이태리 아씨시에서 부유한 포목점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1205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생활을 시작했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회칙을 인준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1224년 라베르나에서 양손, 양발, 옆구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고

1226년 10월 3일 밤 아씨시의 포르지운꿀라에서 이 세상의 삶을 끝내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고등학생이 함께 한 평화의 소녀상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님께서 처음으로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라고 용기를 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힌 일년 후

일본군 위란부 할머님들의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난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소녀상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

2015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오직, 고등학생의 힘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소녀상은 53개의 고등학교 학생 약 16,400여 명이 만들어 냈다

소녀의 한 손엔 평화의 의지를 담아 세상을 향해 날아갈 듯한 나비가 앉아 있고

또 한 손은 친구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평화독촉군단 / 류인(아우구스티노)

 

 

 

 

경향신문사

MBC와 경향신문이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분리되어 MBC방송국은 여의도로 옮겨갔다

 

 

 

 

관립법어학교 터(官立法語學校址)

개화기 프랑스어(法語) 를 가르치던 학교가 있었던 곳(1895~1910)이다

 

 

 

 

과거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던 창덕여자중학교 담에 붙어 있는 펼침막

서울성곽 발굴 현장 사진도 있다

 

 

 

 

한국가톨릭수도원 첫자리(정동수녀원)

1887년 7월 26일 조선교구장 블랑주교는 버림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888년 7월 22일 조선교회의 부르심에 응답한 네 명의 수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7월 23일 서울에 온 수녀들이 러시아공사관과 담을 맞대고 있던 정동 한옥에 머묾으로서 조선에 가톨릭수도공동체가 시작되었다

7월 29일 순교자의 딸들인 다섯 명의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수녀들은 같은 해 9월 7일 종현(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

2008년 9월 7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설립 120돌에

 

 

 

 

정동공원

하얀 파고라 뒤로 러시아공사관 탑이 보인다

 

 

 

 

구 러시아공사관 탑

스위스계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의 설계로 1890년(고종 27)에 준공된 르네상스풍의 벽돌조 건물이다

러시아공사관 본관으로 사용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3층 전망탑과 일부 기초 유구, 지하통로 등이 남아 있다

ㄹㅓ시아공사관은 경운궁과 서양 각국 공관, 교회, 학교 등이 집중한 정동 제일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았으며 본관과 호위대 막사 등이 있었다

본관은 H자형 평면을 하였고 남 · 동 · 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가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각각의 면에 출입문이 나있고, 북동 측 끝 모서리에 탑이 위치하고 있었다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개방된 개선문 형식의 정문이 있었다

러시아공사관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6년 2월부터 1년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고종은 독립문 건설, 각종 도시 개조사업, 파고다공원 등 근대국가 건설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구 러시아공사관 주탑 후면

 

 

 

 

구 러시아 공사관 구조

 

 

 

 

남산

러시아 공사관에서 봤다

 

 

 

 

인왕산

러시아공사관에서 경희궁 방향으로 내려오며 봤다

 

 

 

 

해머링 맨(Hammering Man) / Jonathan Borofsky · (Steel, aluminum   1000× 49×2200cm)

무게는 50톤, 하루 15시간 3톤짜리 팔을 77초 간격으로 휘둘러 망치질을 한다

이 조형물의 한 해 유지 비용은 7천만 원이다

 

 

 

 

금호 아시아나 건물

 

 

 

 

정동길 원형교차로

 

 

 

 

덕수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엔 정부청사 온실이 있고 주차장으로도 활용한다

 

 

 

 

덕수초등학교

〈정성껏 · 의좋게 · 씩씩하게〉 교훈 빗돌이 있다

 

 

 

 

경기여자고등학교

1908년 관립 한성고등여학교로 개교했다

1988년 개포동으로 이전했고 지금은 미국대사관저로 활용되고 있다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아래쪽 건물이 구세군 중앙회관이다

좌우 대칭 건물로 왼편 건물이 구세군 역사박물관이다

관람시간은 평일 10시부터 16시까지 · 토, 일, 공휴일은 휴관이다

물론 못 들어갔다. 세 번째

 

 

 

 

청계천광장의 Spring

 

 

 

 

도로원표

우리나라 도로원표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세종로 중앙광장에 세웠으나

세종로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1935년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있는 「고종 즉위 40년 칭경비각」 안으로 옮겼다

이후 1997년 서울시에서 일본식 도로원표를 한국식으로 바꾸어 광화문 미관광장에 설치하였다

 

 

 

 

한국금융사박물관

우리나라 금융 발전사를 한눈에 조망해보고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의 국내 금융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신한은행에서 1997년 설립한 국내 최초의 금융사 전문 박물관이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시민광장 조성사업 안내판

광복 7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체신부 자리에 시민광장을 조성하고 있다

일제 총독부 체신부 철근 위에 이 표석을 세웠다

 

 

 

 

서울특별시의회

1960년 3월과 4월 수만 명의 학생들이 자유당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의

민의의 전당인 이곳(국회의사당)에서 대대적인 궐기로 4 · 19혁명을 일으켰다

마침점인 시청역 앞에 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6.6km, 소요시간 6시간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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