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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천주교삼성산성지

삼성산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성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한

성 모방(베드로) 신부 · 성 샤스탕(야고보) 신부의 유해가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안장되어 있던 곳이다

 

 

서울둘레길에서 삼성산성지로 들어가는 다리다

 

 

 

 

삼성산성지 안내판

 

 

 

 

삼성산 성지 빗돌

 

 

 

 

성지는 교우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발전한다

빗돌 뒷면

 

 

 

 

야외 제대

 

 

 

 

제대 옆 나무에 걸려 있다

 

 

 

 

구상 시인 시비

 

 

 

 

삼성산 순교자 성지 빗돌

 

 

 

 

구상 시인 시비 뒷면

 

 

 

 

성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 · 성 모방(베드로) 신부 · 성 샤스탕(야고보) 신부 묘

1989년 9월 10일에는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여 명동대성당 지하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가져와

이 무덤 안에 안치하고 제대 등의 설치를 완료한 뒤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배세영 신부 · 오기선 신부 · 유영도 신부의 공동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세 분 성인 묘

 

 

 

 

샤스탕 신부님 말씀

 

 

 

 

십자가의 길 제3처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

"군문효수형을 받은 세 분 순교자들의 시신은 3일 동안 모래와 함께 그대로 새남터 백사장에 가매장되었다

신자들은 변복한 포졸들이 사방에서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발각될 것이 두려워 그곳에 잠입할 수가 없었다

4일째 되는 날에는 용감한 신자 3명이 그곳에 잠입하였다가 그중 한 명이 체포되었지만 더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마도 시신이 부식하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박순집 베드로의 부친 박바오로 등 7~8명의 신자들은 약 20일 후 죽음을 각오하고 백사장으로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는데 성공하였다

세 분의 시신을 지금의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 샤스탕 신부가 노고산에 안장된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순교자 현양 운동을 자발적으로 실천해 오던 조선 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이 안장된 곳은 이내 신자들의 순례지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이에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신자들의 순례로 인해 순교자의 무덤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조선 사회의 분위기로 볼 때 또 어떤 일(예를 들면 부관참시와 같은)이 일어날지 몰랐으므로 이장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3~4년 후에 교우들이 3위의 무덤을 그대로 두면 일이 틀어질까 하여 노고산에서 파내어 본 즉 해골만 남은 것을 박바오로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했다
1843년 삼성산으로 이장 당시 관 위에 숯가루로 기록한 비문에는 그 이장 연도가 1843년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 시기는 프란치스코가 증언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때 이장 장소로 결정된 곳이 바로 관악산 서쪽 봉우리인 「삼성산(三聖山)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이 세 성인은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882년 5월부터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을 위한 교회 재판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5년에 시복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는 1886~1887년에 삼성산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묘역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김 프란치스코와 박순집 등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어 1891년 10월 29일 뮈텔 주교가 이곳을 순례한 이래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으로 옮겨질 때까지

매년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묘역을 손질하였다

그러나 순교자 묘역 순례와 자발적인 현양 운동은 이미 박해 시대부터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1901년 10월 21일 세 순교 성인의 유해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고 그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안드레아)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루가)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 해 5월 12일에는 옛 무덤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그리고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1981년 9월 6일에는 신림동 본당 신자들이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아래 삼성산에서 세 복자 묘비 제막식을 갖고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삼성산을 순례 성지로 성역화 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2년 9월 29일 신림동 본당 유영도 신부의 지도 아래 ‘삼성산 성역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4년 5월 6일 세 복자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1989년 서울대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세 성인의 묘소 자리 일대의 임야 약 16,000평을

공무원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명의로 매입하였다
1989년 9월 10일에는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가져와

이 무덤 안에 안치하고 제대 등의 설치를 완료한 뒤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배세영 신부 · 오기선 신부 · 유영도 신부의 공동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

본래 ‘삼성산’이란 명칭은 고려 말의 명승 나옹 · 무학 · 지공 등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곳 한 자락에 천주교 성직자였던 세 명의 성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었고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천주교 안에서는 ‘삼성산’을 가리켜 ‘세 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되었던 성지’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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