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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역사문화길

14세기 말 조선 건국 이후 600년간
우리나라의 수도였던 서울의 역사문화길 걷기를 했다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젊은 사람들의 밝은 모습이 좋아 보인다
대여비 시간당 천 원이다
시청역이 시점이다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덕수궁은 조선 14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런데 동문(東門)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인데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덕수궁 돌담길
빗속에 입맞춤하는 연인들이다

 

 

 

 

장독대 이환권 作
위에서 약간 눌러놓은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독들이 모여있는 눈덮힌 장독대의 모습에서 겨울나기하는 가족들이 떠올랐고
작품에 반영된 가족들은 작가 친구의 가족 3대로 구성하였다고 써있다

 

 

 

 

미국대사관저 입구

 

 

 

 

작곡가 이영훈 추모비
광화문 연가 · 난 아직 모르잖아요 · 사랑이 지나가면 등 발표곡이 100여 곡이 있다
친구들이 세웠다

 

 

 

 

정동극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의미를 갖고 개관했다
1995년 국립극장 분관으로 설립되어 1997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전통예술무대 미소(美笑)는 14년째 3,700회 공연 · 전세계 65만 명이 관람하였다

 

 

 

 

혹성들의 신화 · 놀이 · 비젼 / 전수천
정동극장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문화공간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해 외벽에 설치한 벽화다

 

 

 

 

명창 이동백 동상
젊은 시절 활동무대였던 원각사의 맥을 이은 정동극장 마당에 있다
1867년 서천에서 태여나 독공(獨功)으로 득음하여 편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러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구축하였고
판소리를 품격 높은 민족예술로 승화시켜 그 공으로 고종황제로부터 통정대부를 제수받았고
창극을 발전시켜 일제강점기엔 민중의 정한(情恨)을 풀어주었다

 

 

 

 

중명전(重眀殿)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만들었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거처를 옮기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예전 이화학당 정문
일제강점기인 1923년 만들어진 문인데, 1999년 복원했다
*
이화박물관(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이곳은 미국인 사라 심슨이 죽을 때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 이화학당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감리교 여 선교사 스크랜턴이 정동에 있던 자택에 세운 학교다

 

 

 

 

정동공원
예원학교 뒤에 있다
「한국가톨릭 수녀원 첫자리(정동수녀원)」 빗돌이 오른쪽에 있다

 

 

 

 

한국가톨릭수녀원(정동수녀원) 첫자리 빗돌
1887년 7월 26일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버림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888년 7월 22일 조선교회의 부르심에 응답한 네 명의 수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7월 23일 서울에 온 수녀들이 러시아공사관과 담을 맞대고 있던 정동 한옥에 머묾으로서 조선에 가톨릭공동체가 시작되었다
7월 29일 순교자의 딸들인 다섯 명의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9월 7일 종현(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러시아공사관
1890년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벽돌조 2층 본관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이 남아 있다
일부가 발굴된 지하 밀실은 비밀통로로 경운궁(현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8년(건양 1) 2월 1일부터 고종이 세자 순종과 함께 약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전차 381호 / 등록문화재 467호
1899년 5월 서울에서 첫 운행된 전차 381호는 1930년 경 일본에서 수입되어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에서 운행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버스 · 자동차 등의 대중교통이 발달하면서 전차는 오히려 대중교통에 방해가 되었고
마침내 1968년 11월 29일 모든 전차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현재 서울에는 실제로 운행됐던 전차 가운데 381호와 국립서울과학관에 363호만 남아있다

 

 

 

 

전차 381호 / 등록문화재 제467호
제조시기 1930년경 · 운행기간 1930년경~1968년 11월 29일 · 제조사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
1899년 5월, 서울에서 첫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196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
작품 「전차와 지각생」
김운성 · 김서경 부부와 아들 경보 · 3인 가족이 공동작업으로 만들었다
등교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바람에 막내동생을 들쳐 업은 어머니가 도시락 · 누이동생은 모자를 들고 뛰어오는 것을 보고
학생이 스톱하고 소리를 지르자 운전사가 사고라도 난 줄 알고 놀란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전차 내부
가방든 중학생과 당황한 전차기사가 있다

 

 

 

 

전차노선표
전차 창문 위에 붙어있다

 

 

 

 

럭키치약
미제와 꼭 같은 미제원료 미국처방으로 제조된 럭키치약 광고

 

 

 

 

종루 주춧돌
종로네거리에 있었던 종루 주춧돌의 일부로 1972년 지하철 공사중 발견되어 경복궁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의 협조로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 이전 전시하였다

 

 

 

 

흥선대원군 조부 은신군 신도비(가운데) · 은신군 묘표(왼쪽) · 낙천군 묘표(오른쪽)
은신군 진은 정조의 동생이며, 계보상 흥선대원군의 조부가 된다
낙천군 온은 본래 채의 아들인데 계보상으로 연령군의 아들이자 은신군의 부친이 된다

 

 

 

 

문인석(文人石)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묘소에서 옮겨왔다
문인석은 묘소를 수호하는 석물로 앞쪽 좌우에 배치된다. 공복을 입은 상태로 복두를 쓰고 홀을 들고있다
공복은 임금을 알현할 때나 동지 · 설날 등 경사스럽고 즐거운 대사가 있을 때 착용하는 관복이며
복두는 두 단으로 각이진 관모로 사모의 전신이며, 홀은 신하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으로 상아나 나무로 만들었다

 

 

 

 

수선전도(首善全圖)
1824~1834년(순조 24~34) 사이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전한다
목판 인쇄본의 한양(漢陽) 지도로 가로 22.2cm · 세로 25.4cm로 부분 채색되었으며
남쪽으로 한강 · 북쪽으로 도봉산 · 서쪽으로 마포와 성산리 · 동쪽으로 안암동과 답십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수선(首善)이란 서울을 뜻하는 말로 「서울전도」라는 뜻으로 중국 후한(後漢)시대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역사서인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에 건수선자경사시(建首善自京師始) 곧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함은 서울에서 시작된다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추녀
광화문 철거시 각 부분들을 잘라 전시해 놓은 것들 중 하나다
모서리 기둥 상부에 대각선 방향의 경사진 부재로서 전통 건축의 곡선미를 잘 표현한 부분 중 하나다
추녀의 귀솟음으로 인해 육중한 지붕이 쳐져 보이는 것을 시각적으로 안정감 있고 가볍게 보이도록 하였다

 

 

 

 

경희궁 숭정문(慶熙宮 崇政門) / 유형문화재 제19호
경희궁의 삼문으로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떼어갔던 것을
서울시에서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돈까스 전문점 쿠이
경희궁에서 경교장으로 가는 뒷골목에 맛집들이 많다

 

 

 

 

미래향(味來香)
점심을 했다

 

 

 

 

경교장(京橋莊) / 사적 제465호
이화장(梨花莊) ·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 3대 명소의 하나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서울성곽길

 

 

 

 

홍난파 가옥 /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90호 · 홍난파 동상
봉선화 · 고향의 봄 등 멋진 가곡의 작곡자지만 친일로 명성이 퇴색했다
홍난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 6년을 보낸 가옥이다

 

 

 

 

딜쿠샤(흰두어로 이상향)
UPI통신의 「앨버트 테일러」 특파원이 세계 최초로 3 · 1운동을 세계로 타전한 곳이다
지금 이 집은 국유재산이지만 아직 17가구가 산다
1923년에 지었다

 

 

 

 

권율 장군 집터 · 은행나무 보호수
장군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가 크게 자라 동네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기에 행촌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권율 장군 집터 빗돌이 보호수 앞에 있다
*
나무높이 24m · 둘레 680cm · 나이 420년 · 지정일자 1976. 6. 5

 

 

 

 

상점

 

 

 

 

서울성곽길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서울성곽길
범바위 · 인왕산이 보인다

 

 

 

 

황금호랑이 상
경비초소 앞에 있다

 

 

 

 

황학정(黃鶴亭)
광무 2년(1898)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 담장 가까이 세웠던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인데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건물들을 일반에게 불하할 때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玉洞)에 있던 등용정(登龍亭) · 삼청동의 운용정(雲龍亭) ·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 太極亭)
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 白虎亭)과 함께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이라고 불렸다
오사정을 비롯한 서울에 있던 이름 있는 활터는 일제 때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황학정(黃鶴亭) 현판

 

 

 

 

궁술을 연마 중인 궁사들

 

 

 

 

단군성전 삼문(檀君聖殿 三門)

 

 

 

 

단군성전(檀君聖殿)
단군의 표준 영정과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 옛 우리 땅의 고대국가 태조 위패가 모셔져 있다

 

 

 

 

단군성전(檀君聖殿) 현판

 

 

 

 

단군상 · 표준영정

 

 

 

 

사직공원
율곡과 신사임당 동상이 있다

 

 

 

 

서울 사직단(社稷壇) / 사적 제121호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고려의 제도를 따라 1395년(태조 4)에 경복궁 동쪽에는 종묘 ·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사직단은 홍살문이 설치된 두 겹의 담장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에는 사단 · 서쪽에는 직단이 있다
1911년 사직단 제사가 폐지된 이후, 두 단만 남기고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사직단 북문
홍살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신문과는 달리 삼문 형식이다

 

 

 

 

사직단 참도
북문에서 제단으로 들어가는 참도다
종묘와 같은 삼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참도는 북문에서 서문을 지나 남문으로 연결된다

 

 

 

 

사직서 터 빗돌
사직단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던 조선시대 관아 터다

 

 

 

 

청국장 전문식당
만화 식객에 나왔던 식당이다

 

 

 

 

이항복 집터 · 필운대(弼雲臺)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1556∼1618)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왼쪽에 필운대라 크게 새겨져 있고가운데 시구(詩句)는 이항복의 후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예서(隸書)로 새겨 놓았고 오른쪽엔 10명의 인명이 나열되어 있다
또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의 「필운대상춘」을 보면 이곳이 복사꽃 천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배화학원 설립자 캠벨여사 흉상 · 창립 110주년기념비
1898년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Mrs.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여사가 최초의 여 선교사로 제물포에 상륙 내한하여
고간동(현 내자동)에서 캐롤라이나 학당을 창설 · 개교(당시 학생수는 여학생 2명 · 남학생 3명)하였다

 

 

 

 

통의동 백송 터
이곳은 창의궁터 · 추사 집터였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 / 국보 제101호
고려시대 지광국사(984~1067)의 묘탑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터에 있던 것인데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지게 되었다
고려 문종 임금은 지광국사를 왕사로 삼았다가 훗날 국사로 임명하였다
1085년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1708년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건립
1905년 10월 28일 일본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2005년 10월 28일 10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옴

 

 

 

 

불로문(不老門)
한 장의 큰 판석으로 만든 석문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만수무강과 불로장생 한다고 하는
창덕궁의 불로문을 모방하여 제작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2.7km, 소요시간 7시간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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