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용주사(華城 龍珠寺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효심을 가득 담고 있는 효의 근본 도량이다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로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 제22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세웠다
용주사 사천왕문
불법을 보호하고 악귀의 출입을 막아 사찰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국천왕 · 광목천왕 · 증장천왕 · 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용주사는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이름지었다
지국천왕(持國天王)
동방을 맡은 지국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지키며(持國)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을 지닌다
손에 비파를 들고 항상 음악을 연주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나라는 자연적으로 부강해지고 안락하여 스스로 나라가 지켜지는 것이다
증장천왕(增長天王)
남방을 맡은 증장천왕은 불자들의 지혜와 복덕을 들려주고 이익을 증장시켜주는 것이 주된 임무이다
그래서 들고 있는 칼로 인간의 번뇌를 끊어버리면 바로 지혜가 나오므로
번뇌를 끊는 취모검을 들고 인간의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광목천왕(廣目天王)
서방을 맡은 광목천왕은 말 그대로 부릅뜬 눈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고 나쁜 말을 굴복시킨다
인간의 선악을 살펴 그것에 상응하는 상과 벌을 준다
손에 용과 여의주를 잡고 있어 조화를 부린다
다문천왕(多聞天王)
북방을 맡은 다문천왕은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듣는다는 뜻에서 다문천왕이라 한다
그래서 손에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보탑(寶塔)을 들고 있고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듣고 인간에게 많이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용주사 사적비(龍珠寺事蹟碑)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의 글씨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있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 이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
*
홍살문으로 오르는 계단 양편 두 빗돌에 새겨져 있다
용주사 빗돌거리
사천왕문에서 삼문에 이르기까지 천상천하유아독존 등의 경구 빗돌 양편에 있다
효행박물관
용주사 유물 36점 · 경기도 유물 7점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 경내에 있던 동자상을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효행박물관 소장품 훈증소독으로 입장 불가다
화성 용주사 오층석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원래 다른 장소에 있던 것을 용주사 지장전 뒤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지금의 장소로 이전한 것이다
전체 높이는 4.5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을 얹었다
상층 기단의 한 면에만 위패 모양의 조각을 새긴 것과 하층 기단의 모든 면에 여의두문 모양의 안상을 새긴 것이 독특하다
5층에 해당하는 맨 위쪽의 탑신은 나중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며 석탑의 전체적인 제작 방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 석탑임을 알 수 있다
홍살문
왕실의 능 · 원 · 묘 · 관아 등의 입구에 있는 홍살문이 용주사에 있는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셨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중단되어 왔다
2008년(무자년) 6월 24일,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다한 혼정신성(昏定晨省)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려고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삼문
양쪽에 7칸의 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동서의 옆문과 중앙에 대문이 있어 삼문이라 부른다
삼문 하단부 초석이 유난히 높고 크며 그 앞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있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마치 양반집 대가 같은 형태인 것은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사찰이기 때문이다
네 기둥엔 「龍珠寺佛(용주사불)」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의 주련이 걸려있는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 글씨다
용주사(龍珠寺) 현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의 글씨다
삼문에 걸려 있다
불음각(佛音閣)
현재 사용하는 범종이다
범종
비천상이 있다
천보루(天保樓)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6호 · 세존사리탑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건물로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천보루는 대웅보전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인데 일반적인 사찰의 건축양식보다는 궁궐이나 대갓집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용주사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세워졌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건물 밖의 현판에는 천보루 · 안의 현판에는 홍제루라 적혀 있는데
이는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구제하여 백성들이 불성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라는 의미이다
서림당
우측 천보루는 좌우로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 ·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천보루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 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데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
돌기둥 여섯 개의 글귀
自笑一聲天地驚 (자소일성천지경) / 스스로 웃는 웃음 한마디에 천지가 놀라고
孤輪獨照江山靜 (고륜독조강산정) / 외로운 달 홀로 비추니 강산이 고요하네
心得同時祖宗旨 (심득동시조종지) / 조사의 종지 마음으로 깨달으니
傳持祖印壬午歲 (전지조인임오세) / 조사의 인가 전하고 간직하니 때는 임오년
叢木房中待釋迦 (총목방중대석가) / 숲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기다리니
眞歸祖師在雪山 (진귀조사재설산) / 진귀조사(문수보살) 설산에 계시네
돌기둥 여섯 개의 글귀
心得同時祖宗旨 (심득동시조종지) / 조사의 종지 마음으로 깨달으니
傳持祖印壬午歲 (전지조인임오세) / 조사의 인가 전하고 간직하니 때는 임오년
돌기둥 여섯 개의 글귀
叢木房中待釋迦 (총목방중대석가) / 숲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기다리니
眞歸祖師在雪山 (진귀조사재설산) / 진귀조사(문수보살) 설산에 계시네
세존사리탑 · 불음각
대웅보전(大雄寶殿) / 보물1942호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이다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145칸의 전각과 함께 지었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 삼세불 좌상과 삼세여래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삼세여래후불탱화(보물 제1942호)」는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나유타료(那由他寮)
창건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다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이덕무가 여러 건물의 주련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창건 당시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만수리실(曼殊利室)
원래 선당(仙堂 · 禪堂)으로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이덕무가 주련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홍제루(弘濟樓)
천보루를 안쪽에서 보면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라 쓰여있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법고각(法鼓閣)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듯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범종각(梵鐘閣) / 국보 제120호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하였으며 이 전각안의 범종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용주사 동종 / 국보 제120호
용주사동종(龍珠寺銅鍾)은 신라의 종 양식을 갖춘 고려시대 초기의 거대한 범종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융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네 곳에 있는 ㄷ자 모양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봉오리 형태의 유두가 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새겨 넣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있다
종의 어깨와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서로 다른 문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의 다른 종과 일치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의 종으로 추정한다
천불전(千佛典)
예전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인데 1993년 3월에 새로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천 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칠성 · 산신 ·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시방(十方)이란 동 · 서 · 남 · 북, 동북 · 동남 · 서남 · 서북 그리고 상(하늘) · 하(땅)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하고
칠등(七燈)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승탑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며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였던 전강 스님의 승탑이다
*
전강 스님의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고양이 밥이 쥔데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
자기가 자기를 먹어 치웠다는 말
*
맞지 않으니 다시 이르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호성전(護聖殿) · 부모은중경탑 / 보물 제1754호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와 정조대왕, 효의황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앞 〈부모은중경탑〉에는 부모의 크고 깊은 10가지 은혜에 보답하라는 가르침이 새겨져 있다
호성전은 일반적인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건립하였다
*
부모님의 열가지 은혜
첫째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 /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 주신은혜
둘째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 낳으실 때 괴로움을 겪으신 은혜
셋째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 / 자식 낳고 모든 시름 잊으신 은혜
넷째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 쓴 것 삼키고 단 것 뱉어 먹이신 은혜
다섯째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 진자리 마은 자리 가려 누이신 은혜
여섯째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 젖먹여서 키우신 은혜
일곱째 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 / 손발이 닳도록 깨끗하게 씻어주신 은혜
여덟째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 먼 길 떠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아홉째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 자식 위해 나쁜 일까지 감당하시는 은혜
열째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 / 어른 돼도 끊임없이 걱정하신 깊은 은혜
지장전(地藏殿)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감로정(甘露亭)
비로 꽃과 나뭇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다
혜경궁 홍씨 읍혈록문학비
정조대왕의 258번째 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막식을 갖었다
혜경궁 홍씨(1737~1815)가 쓴 자서전적 회고록으로 계축일기 · 인현왕후전과 더불어
궁정문학 혹은 궁정실기문학의 하나로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 혼용본이 있다
사본에 따라 읍혈록(泣血錄) · 한중록(恨中錄) · 한중만록(閑中漫錄)이라고도 한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뒤 이어지는 친정에 대한 보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중심 줄기는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친정에 대한 모함을 밝히는 내용으로
피눈물나는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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