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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청주 중앙공원(청주읍성)

충청도 병영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 말부터 내포평야 지역의 덕산에 두었다가 1416년(태종 16) 해미로 옮겼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 국방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1651년(효종 2) 청주로 병영을 옮겼다
이로써 고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로 다투던 청주지역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청주읍성은 고려시대 청주성의 옛 터를 이어받아 1487년(성종 18)에 크게 수리하여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육전 최초의 승리를 거두며 탈환하였던 청주읍성은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읍성 안에는 13곳의 우물이 있었고 청주목의 공공건물로 왕의 전패를 모신 객관 · 목사가 정사를 돌보는 청녕각 등을 비롯하여 창고 · 감옥 등이 있었다
지금은 읍성 안에 청녕각 · 충청도병마절도사영 · 망선루 등이 있다

정곡루(正鵠樓)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청주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淸州忠淸道兵馬節度使營門)으로 청주읍성 안에 있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이곳 안쪽의 병영에서 종2품의 병마절도사가 충청도의 군사 업무를 주관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청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자 1651년(효종 2) 해미에서 병영을 옮겨왔다
조선 후기 병영의 출입문 형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며
나무를 다듬은 방법 · 지붕의 추녀곡선 등이 정교하고 세련되어 전통 목조건축물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정곡루(正鵠樓) 현판

 

 

청주 압각수(淸州 鴨脚樹) /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
고려시대 청주목의 객사문 앞에 있었던 나무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1390년(고려 공양왕 2) 5월에 이색 · 권근 등 10여 명이 이성계의 반대파로 지목되어 청주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마침 큰 장마로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이 나무에 올라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 나무가 있는 곳은 청주 객사 마당이었는데, 일제시대 충청북도 도청이 있다가 이전하면서 공원이 되었다
나무는 축대를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안내판 옆에 압각수 시비(詩碑)가 있다
압각수라는 이름은 나무잎 혹은 그 뿌리의 모양이 오리발 모양에 가깝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청주 압각수(淸州 鴨脚樹) /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
은행나무 보호수 · 높이 약 30m · 밑 둘레 8.6m · 나이 900여 년

 

 

압각수 시비(鴨脚樹 詩碑) / 양촌 권근(陽村 權近)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목은 이색 · 도은 이숭인 · 양촌 권근 · 인재 이종학 선생 등 충신 여러 분을
아무 죄도 없이 청주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갑자기 대홍수가 일어나 옥사가 유실되어 이 분들은 이 나무에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하늘의 감응이라 말하자 왕도 이 사실을 듣고서 이들의 무죄함을 알고 석방하였다
이때 양촌 선생이 읊은 시이다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순교자현양 (청주 병영 순교지) 빗돌
조선시대 군대 주둔지인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영이 있던 자리이다
1799년 천주교 신자인 복자 원시보 야고보가, 1800년 복자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천주교 청주교구는 2002년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교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이곳에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청주 망선루(淸州 望仙樓)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고려시대 청주관아 객사 동쪽에 있던 누각 건물로 취경루(聚景樓)라 하였다
청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궁궐로 돌아가다 청주에 머무른 기념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때 합격자의 방(榜)을 취경루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1461년(세조 7) 목사 이백상이 중수하고, 한명회가 누각의 이름을 고쳐 망선루라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일제 때 철거되었다
이때 김태희가 중심이 되어 1923년 남문로 제일교회 뒤에 옮겨 교육 및 집회장소로 활용하였다
그 후 기둥이 심하게 부식되어 붕괴의 위험이 있어 2000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옛 모습인 정면 5칸 · 측면 3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망선루(望仙樓) 현판

 

 

청주 서원향약비(淸州 西原鄕約碑)
향약은 조선시대 중기 지방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도덕앙양과 상부상조를 위한 고을의 규약이다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으로 서원향약은 조선 시대의 대유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1571년(선조 4년)에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그해 가을에 제정 시행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향약의 표본으로서 온나라의 많은 고을이 이를 본을 삼아 만들었으니
서원 향약은 우리나라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지방자치 정신을 북돋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청주 척화비(淸州 斥和碑) /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고종 8)에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프랑스함대가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에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신미양요를 물리친 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를 경계토록 하였다
비문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열두 자를 큰 글씨로 새겼다
우리의 만대 자손들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고 작은 글씨로 그 옆에 새겼다
그 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간 틈에 일본 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이 척화비도 버려져서 석교동 하수도 뚜껑으로 쓰이던 것을 1976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긴 것이다
비석의 높이 108cm · 너비 47cm의 크기이다

 

 

의병장 한공봉수송공비(義兵將韓公鳳洙頌功碑)
청암 한봉수(1883~1972) 의병장은 구한말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모아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연전연승한 무적장군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전의 · 평택 · 여주 · 횡성 등지에서 33차례 격전을 치르며 일본군의 무기노획, 현금탈취 등 눈부신 전공을 세웠으며
이에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목사 서공유민청간선정비(牧使徐公有民淸簡善政碑)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던 서유민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1842년에 목민(牧民)이 세운 선정비이다
1840년도에 청주목에 상당산성을 개축하였는데 부역을 경감해 주고 곡식을 적게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청주목사로 재직할 당시에는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고 하여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후에 청주 일대가 전국에서 가장 어려운 실정에 처하였다는 현민의 목소리를 듣고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민양공 화천당 박춘무선생 전장기적비 ·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 ·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전장기적비

 

 

민양공 화천당 박춘무선생 전장기적비(愍襄公花遷堂朴春茂戰場紀蹟碑)
이곳은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화천당 박춘무 선생이 중봉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가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격전한 끝에 왜적을 몰아낸 거룩한 승전지이다
공은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아우 인년 선생의 8세손이며 아버지 기정 선생의 넷째 아들로서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문인이며, 중봉과는 동문이다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淸州趙憲戰場記蹟碑)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한 조헌(1544~1592)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적비이다
1710년(숙종 36)에 청주성의 서문 밖에 세웠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한 것으로 비 높이 230cm, 폭 84cm이다
조헌 선생의 본관은 백천(白川) · 자는 여식(汝式) · 호는 중봉(重峯)이다
1592년 8월 1일 의병군은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의 탈환작전을 벌여 이튿날 성을 수복함으로써 육전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전투를 지휘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중봉집(重峯集)이 있으며, 고경명 · 김천일 · 곽재우와 더불어 임진왜란 4대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전장기적비(義僧將騎虛堂靈圭大師戰場紀蹟碑)
영규대사(?~1592)는 임진왜란 때에 청주성을 탈환하고  최초의 승리를 거둔 승군(僧軍)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 비석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에 세운 기적비(紀蹟碑)이다
전장기적비는 높이 224㎝ · 폭 82㎝ · 두께 39㎝의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철제 보호 난간을 둘렀다
비문은 정인보(鄭寅普)가짓고 · 김응현(金膺顯)이 전자체로 쓴 글씨가 있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영규대사가 임진왜란 때 8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의 의군(義軍)과 1592년 8월 1일 청주성 탈환 작전을 벌여 8월 2일에 성공하였고
그 뒤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전투(錦山戰鬪)를 지휘하다가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는 것이다

 

 

행목사 이경여선정비(行牧使 李敬輿 善政碑)
조선 인조대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경여의 선정을 기려 인조 9년(1631)에 세운 비석이다
비제는 일부 훼손이 있으나, “行牧使 … 德善政碑(행목사 … 덕선정비)”이며
왼쪽 면에 “淸白我公 勒之貞珉 化浹仁明 永留風聲 (청백아공 늑지정민 화협인명 영유풍성)”이라는
선정을 찬양하는 명문이 있다

 

 

거북대좌
1997년에 발간된 청주시지(淸州市誌)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명준의 청덕선정비가 중앙공원에 현존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거북대좌가 선정비를 세웠던 귀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거북대좌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이명준(李命俊 · 1572~1630)은
1573년 청주목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아들로 1611년(광해군 3) 서원현감(西原縣監)으로 부임하였다
대좌에는 가로 61cm · 세로 23cm의 구멍이 있고 등에는 커다란 귀갑문이 조각되어 있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淸州龍頭寺址鐵幢竿) / 국보 제41호
고려 광종 13년(962)에 조성되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청주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당초 30단의 철통을 쌓아 20여 미터에 달하는 높이였으나 현재는 20단 만이 남아 있다
*
청주의 옛 지명인 주성(舟城)과 관련된 창건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과거 청주 일대에는 홍수가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점술가가 말하길, 청주의 지형이 떠내려가는 배와 같아서 그 중심에 배의 돛대를 세우면 재난이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이에 청주의 중심인 용두사에 높은 철당간을 세우니 이후로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우리나라 당간 중 건립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유일한 것으로 우리나라 당간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淸州龍頭寺址鐵幢竿) / 국보 제41호
아래에서 세 번째 철통에는 건립 배경과 연대 등이 상세히 적혀 있는 당간기가 있다
철제 당간 옆에는 깃대를 지탱하는 석제 당간지주가 있으며 아래쪽에는 널찍한 받침돌과 간대가 놓여 있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淸州龍頭寺址鐵幢竿) / 국보 제41호
양각으로 새겨진 당간기에 따르면 고려 광종 13년(962) 김희일을 비롯한 김씨 · 손씨 · 경씨 · 한씨 등 청주의 호족들이 힘을 모아 이 당간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당간기 마지막에는 고려 광종 때 사용한 독자 연호인 「준풍(峻豊) 3년」이라는 건립 연대가 표기되어 있다
*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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