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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덕수궁

덕수궁은 조선 14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경운궁에 다시 왕이 머문 것은 조선 26대 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잠시 머물다가 경운궁으로 옮겨 오면서부터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환구단(圜丘壇)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또한 대한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경운궁에 여러 전각들을 세우고 궁궐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당시 궁궐은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규모의 3배 가까이 되었다
서구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고종은 궁궐 안에 여러 서양 건축물을 세웠으며 전각 내 전등과 전화 등의 신문물도 설치하였다
*
1907년 고종이 강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종은 1919년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으며,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빠르게 해체 · 축소되었다

대한문(大漢門)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런데 동문(東門)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인데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
〈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梁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나와 있다
한양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여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경운궁(덕수궁) 중화전
1902년 중화전이 중층의 형태로 건립된 모습이다
*
덕수궁 대한문 월대 재현공사 부지 내 유적발굴조사 가림막에 있는 사진이다

 

 

대안문(大安門) 현판
1899년 고종과 순종이 종묘에 갈때 사진이다

 

 

금천교(禁川橋)
1896년 발굴하여 정비한 것으로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다리 가운데 높은 어도가 있다

 

 

안내도
1910년 당시에는 파란 부분까지 궁역이었다

 

 

광명문(光明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의 정문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건립되었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국장 때 고종의 관(재궁 榟宮)이 광명문을 통해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크게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었고 1930년대 광명문도 중화문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나중에는 광명문 안에 물시계인 자격루와 홍천사명 동종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덕수궁 권역의 복원을 진행하면서 2018년 12월, 광명문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중화전 행각(中和殿 行閣)
1902년 덕수궁의 중심 건물(정전 正殿)인 중화전을 건립하였을 때 중화전은 128칸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불탄 후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행각 역시 108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강점기에 덕수궁 내 여러 전각들이 훼손되었는데 중화전 행각도 이때 대부분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행각은 1905년 중건된 행각의 일부가 남겨진 모습이다

 

 

중화문(中和門)
중화전의 정문으로 원래 좌우 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남쪽 모퉁이 일부만 남아있다

 

 

중화문 답도(中和門 踏道)

 

 

중화문(中和門) 현판

 

 

중화전(中和殿)
경운전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 신하들의 하례 ·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한 후 5년 남짓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에 중층의 중화전을 새로 지었다
이때 중화전 행각 128칸과 중화문 · 조원문도 함께 건립되었다
그러나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재건하면서 당시 어지러운 시국과 궁핍한 재정상황으로 단층으로 축소 건축되었다
중화전을 둘러싸고 널찍한 마당 · 조정을 형성했던 행각들은 고종 승하 후 대부분 헐리고 동남쪽 모퉁이 부분만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추측할 뿐이다

 

 

중화전 답도(中和殿 踏道) / 보물 제819호
중화전은 이중 월대 위에 건물을 올렸는데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조선 궁궐의 정전 중 유일하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다른 궁궐 정전에는 모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대한제국 출범 후 지어진 건물이기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화전 답도(中和殿 踏道)

 

 

중화전(中和殿) 현판

 

 

닫집
어좌(御座) 뒤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 · 닫집 천장에는 쌍룡(雙龍)이 있다

 

 

쌍룡(雙龍)
대한제국 출범 후 지어진 건물이기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장식되었다

 

 

품계석(品階石)
대궐 안 정전(正殿)의 앞뜰에 벼슬의 품계를 새겨서 세운 돌로 동서(東西) 양반(兩班)이 두 줄로 있는데
동반은 문인 · 서반은 무인의 자리다

 

 

드므
드므란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월대 아래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중화전 월대에 놓인 드므는 남다른 면이 있다. 드므에 새겨진 만세(萬歲)라는 글자 때문이다
중국의 천자를 위해서 사용되었던 만세는 조선에서 사용할 수 없었지만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황제국의 격을 갖춘 덕수궁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석조전(石造殿)
고종의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1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로, 돌계단을 올라 들어서는 2층은 대접견실과 대기실로
3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고종황제 승하 후에는 경운궁이 황폐해지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회화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석조전 서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덕수궁관)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이 들어서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73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였고,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
석조전 앞에 있는 정원과 청동제 분수는 서구형 정원으로 1938년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뒤에 배치하여 후원이라 하는데 반해, 석조전은 건물 앞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우리 전통 조경에서는 분수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한국인의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여겼기에
정원에 인공으로 폭포를 만들긴 했지만 물이 역으로 치솟는 분수는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등나무 쉼터

 

 

석조전(石造殿)
구한말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건물로
고종의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하여 1910년 완공하였다
후에 왕가의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그 앞에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석조전과 서관 연결 통로

 

 

돈덕전(惇德殿)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석조전 뒤에 있었던 건물이다
돈덕(惇德)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는 뜻이다

*
재건공사중이다

 

 

돈덕전(惇德殿)
공사 안내문에 있는 사진이다

 

 

회화나무
300여 년으로 추정되는 큰 나무로 2013년 7월 태풍으로 줄기 윗 부분이 부러졌다

 

 

회화나무
2013년 7월 태풍으로 줄기 윗 부분이 부러졌을 때 모습이다
(2014. 3. 1)

 

 

준명당(浚明堂)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준명당(浚明堂) 현판

 

 

즉조당(卽阼堂)
즉조당 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인조 즉위 이후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해왔던 까닭이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즉조당(卽阼堂) 편액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그 밖의 건물은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했다
*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다

 

 

준명당(浚明堂) · 즉조당(卽阼堂)
준명당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1904년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즉조당(卽阼堂) 실내

 

 

즉조당(卽阼堂) 왼쪽 방

 

 

즉조당(卽阼堂) 오른쪽 방

 

 

준명당(浚明堂) · 즉조당(卽阼堂) · 석어당(昔御堂)
석어당은 덕수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층 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인조 즉위 후 경운궁의 전각을 대부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이 건물과 즉조당만은 보존되어 후에 경운궁의 중심이 되었다
현재 세 건물은 1904년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예전엔 즉조당과 석어당도 연결되어 있었다

 

 

석어당(昔御堂)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 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때 경운궁은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서궁 유폐는 결국 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서 즉위한다
유폐의 한이 맺혀 있던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36조의 죄를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쇄를 전하였다

 

 

석어당(昔御堂) 현판

 

 

석어당(昔御堂) 현판
정조의 어필 현판이다

 

 

대청

 

 

왼쪽 방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 방

 

 

살구나무
덕수궁에서 가장 오래된 살구나무로 꽃이 피는 시기는 3월 말이다
궁에서 보기 드문 2층 목조 건축물인 석어당과 활짝 핀 살구꽃 풍경은 덕수궁의 아름다운 봄을 잘 보여 준다

 

 

석어당 후면과 즉조당이다

 

 

유현문(惟賢門)
「어진이가 출입하는 문」이란 뜻으로 전벽돌로 만든 유현문에는 용무늬와 함께 물고기를 입에 문 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함녕전과 덕홍전으로 드는 문이다

 

 

창신문(彰信門)
정관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정관헌(靜觀軒)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위치도 함녕전 뒤에 자리 잡고 있어 전통 궁궐에서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 · 남 · 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베란다가 둘러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 · 박쥐 · 꽃병 등 한국 전통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설이 있기는 하나 그에 대한 근거자료나 기록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태조 · 고종 · 순종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정관헌 내부
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에서 본 영화에서는 덕수궁 정관헌이 고종이 커피나 다과를 드시던 곳이 아니라 한다

 

 

덕홍전(德弘殿)
중화전 우측에 위치하며 편전으로 사용한 건물이다

 

 

덕홍전(德弘殿)
명성황후 혼전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景孝殿)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내부 천장의 썅들리에나 봉황문양의 단청 · 창방의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덕홍전(德弘殿) 현판

 

 

봉황문양의 단청 · 창방의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함녕전(咸寧殿) / 보물 제820호
고종의 환어와 함께 1897년에 건립된 왕의 침전으로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기거하다가 6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승하 후 함녕전은 고종의 빈전 및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함녕전(咸寧殿) 현판

 

 

내부 천장은 썅들리에 등으로 꾸며져 있다

 

 

중화전
덕홍전과 행각 사이로 보인다 
함녕전에서 봤다

 

 

함녕전 뒤편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들을 설치했다

 

 

연못
예전 한때 스케이트장이었던 곳으로 대한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다

 

 

등나무쉼터

 

 

아트 숍 & 카페

 

 

금천교(禁川橋)

 

 

대한문 및 월대의 변천과정
*
덕수궁 대한문 월대 재현공사 부지 내 유적발굴조사 가림막에 있는 사진이다

 

 

대한문 이전공사
1970년 태평로 가운데 위치한 대한문을 축소된 궁장으로 이전(33m 이동) 사진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9.85km, 소요시간 7시간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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