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9대 성종이 1483년(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세종은 즉위한 1418년, 고려의 남경 이궁 터에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세웠고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 보완하면서 창경궁이란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게된다
일제는 1907년부터 창경궁 안에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져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는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하지만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의 모습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홍화문(弘化門) / 보물 제384호
1484년(성종 15)에 창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영조는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직접 수렴하였다
이때 대신들은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영조는 백성의 의견을 따랐으며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창경궁의 정문이다
옥천교(玉川橋) / 보물 제386호
홍화문을 들어서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천교가 있다
옥천교 도깨비상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으로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도깨비상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난간 아래 홍예 사이에 있다
명정문(明政門) / 제385호
명전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좌우에 행각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행각은 장대석 기단 위에 조성되었으며, 행각의 기단은 명정문 기단보다 낮다
명정문(明政門) 현판
서까래
아직 단청은 하지 않았다
명정전(明政殿) / 국보 제226호
인조가 반정 직후 정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정사를 위한 공간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은 듯하다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이 많았다
세조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 예종의 비인 숙모 안순왕후 · 어머니 소혜왕후 · 형 월산대군 등
서열이 높으신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를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다
명정전(明政殿) /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 · 신하들의 하례 · 과거시험 ·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렀던 정전이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었다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 답도(明政殿 踏道)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봉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명정전(明政殿) 현판
품계석(品階石)
대궐 안 정전(正殿)의 앞뜰에 벼슬의 품계를 새겨서 세운 돌로
동서(東西) 양반(兩班)이 두 줄로 있는데, 동반은 문인 · 서반은 무인의 자리다
봉황 두마리
명정전 천장에 있다
명정전 어좌(明政殿 御座)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둘러쳐져 있다
명정전과 문정전을 잇는 복도각
숭문당(崇文堂) ·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순조 30) 소실된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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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문당은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숭문당은 영조의 친필 현판이다
문정전(文政殿)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동향인 명정전과는 달리 남향 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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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윤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적부터 노론을 싫어했던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유언비어를 고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화완옹주 등이 이에 합세했고
생모 영빈 이씨가 이날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고하여 결국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기에 이른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28세로 생을 마감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 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정전 내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국가 정책에 관해 의견을 나누던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1986년 문정문 ·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문정전(文政殿) 현판
문정문(文政門)
문정전의 정문이다
문정문(文政門) 현판
광정문(光政門)
명정전의 남쪽 행각으로 영청문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광정문(光政門) 현판
명정전 행각
행각은 왕실 친위부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齋室)로도 쓰였다
궐내각사 터(闕內各司址)
관천대 동쪽과 남쪽의 빈 터는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관청, 즉 궐내각사가 있던 곳이다
창경궁 궐내각사의 중심에는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도총부」가 있었다
그 주변에 있던 내사복시(內司僕寺)는 왕실의 수레와 말을 관리하던 곳으로 마구간과 사료 창고 등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대규모 복합시설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를 헐어 동물원 축사를 만들었으나, 1980년 복원사업을 추진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회화나무
궁궐에서 즐겨 심었던 나무로 선비의 집이나 서원 · 사찰 같은 곳에서도 많이 심었다
옛날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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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회화나무
영조 38년(1762)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역사를 같이한 나무로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빈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자로는 느티나무와 같이 괴목으로 불렸고 동궐도(국보 제249호)에도 보이는 나무다
관천대(觀天臺) / 보물 제851호
1688년(숙종 14) 영의정 겸 관상감 영사 남구만이 창덕궁 금호문 밖에 축조했다가 후에 창경궁으로 옮겼다
서울 종로구 계동의 관상감에 있는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문대로 꼽히며 「소간의대」 혹은 「첨성대」라고도 한다
높이 3m · 넓이 2.9m×2.3m 정도 되는 화강암 석대 위에 돌난간을 두르고 한가운데에 천체관측 기기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를 관측했다
현재 간의는 없어지고 석대만 남아 있다
관천대(觀天臺) / 보물 제851호
석대에는 남북 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것으로 보이는 5개의 구멍이 있다
숭문당(崇文堂) · 문정전(文政殿)
문정문에서 문정전에 이르는 복도각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동궁 터(東宮址) 일원
동궁 터 일원은 왕세자가 거처하며 활동했던 곳으로 관천대의 서쪽 빈터에서 창덕궁 낙선재 일원까지를 말한다
이곳은 세종 때 만든 수강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여 그 연원을 기리고자 수강재(壽康齋)를 지어 세자의 별당으로 삼았고
북쪽 언덕에 취운정(翠雲亭)을 세워 후원을 만들었다. 취운정은 현재 창덕궁 영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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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막을 치고 공사중이다
함인정(涵仁亭)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 11) 건립된 정자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涵仁亭)
창경궁이 훼손되고 복구되는 과정에서 미로처럼 복잡했던 행각들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아 넓은 공간에 건물만 홀로 서 있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각종 연회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인다
1486년(성종 17) 인수대비 · 인혜대비가 왕실 여인들을 위해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한 부인이 가마를 잘못 타서 도착해 보니 남의 집이었다는 재미난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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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여러 현판이 있다
함인정(涵仁亭) 현판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철에는 눈 녹은 물이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여름에는 구름이 피어올라 기이한 봉우리가 많구나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가을 달은 드높이 밝게 비추고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겨울에는 고개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함인정추기(涵仁亭追記)
함인정명 병소서(涵仁亭銘 幷小序)
빈양문(賓陽門) · 숭문당(崇文堂)
빈양문은 숭문당 옆의 문으로 왕의 업무 공간인 외전과 왕실의 생활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문을 나서면 내전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석탑
함인정 옆에 있다
경춘전(景春殿) · 환경전(歡慶殿)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환경전(歡慶殿)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경전(歡慶殿) 현판
조선시대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다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 오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 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 기록이 나온다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태어나고, 인수대비와 인현왕후 ·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경춘전(景春殿) 현판
통명전(通明殿) / 보물 제818호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은 박석을 깔았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통명전(通明殿) 현판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숙종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 속에서 왕권강화를 꾀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 남인들을 제거한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시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다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네모난 연지 · 동그란 샘
통명전 서쪽에 돌난간을 두른 연지와 샘이,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되어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네모난 연지 · 동그란 샘
열천(冽泉)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통명전 건물은 없고, 건물 터만 남아 있는데
통명전 터 서북쪽에 우물이 그려져 있고, 열천(冽泉)이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다
열천(冽泉)
"통명전 곁에 샘이 있는데, 이름을 열천(冽泉)이라고 부르도록 하라" 하고 소지(小識)를 불러주어 쓰게 하고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
(영조실록 - 영조 33년 5월 29일 기미)
우물(井)
현재 조사된 바로는 문헌상에는 4대궁과 종묘 · 칠궁에 75개의 우물이 있으며 현재 확인된 우물은 32개이다
통명전(通明殿) · 양화당(養和堂)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養和堂)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양화당(養和堂) 현판
집복헌(集福軒) · 영춘헌(迎春軒)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집복헌(集福軒) 내부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영춘헌(迎春軒)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어서 정조의 검약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로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종기로 진찰을 받았는데 이날 의관 서용보를 교체하는 등 정조는 왕실 의관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의학 실력을 갖춘 정조는 의원과 직접 의논하고 약방문을 지정해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진찰을 시작한 지 불과 15일 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정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정적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이었기에 정조의 독살설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영춘헌(迎春軒) 현판
영춘헌(迎春軒) 굴뚝 · 화계
대춘당지(大春塘池)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다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대춘당지 잉어
창경궁 팔각칠층석탑(昌慶宮 八角七層石塔) / 보물 제1119호
탑의 기단부는 4각형 받침돌과 8면에 안상을 새긴 2단 고임돌과 8면에 안상과 꽃을 새긴 연화대좌로 구성하였다
7층의 탑신부는 기와지붕건물 모양이며 1층은 연화좌 위에 높고 볼록한 몸돌을 얹었다
꼭대기에는 흰돌로 만든 보주 장식을 올렸다
1층 몸돌에 새겨진 「성화(成化) 6년」이란 글씨를 근거로 1470년(성종 1)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소춘당지(小春塘池)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이니었으므로 창덕궁 후원과 함께 이용하였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현 창덕궁)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이다
대춘당지 뒤쪽에 있다
관덕정(觀德亭)
1642년(인조 20)에 지은 활을 쏘던 정자다
건립 당시에는 취미정(翠微亭)으로 불리다가 1664년 현종 때 관덕정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앞쪽의 넓은 터는 군사훈련장과 무과 시험장으로 쓰였다
정자 뒤로는 단풍 숲이 우거져 여러 임금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전해진다
창경궁 대온실(등록문화재 제83호)
1909년 건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건축의 뼈대는 목재와 철재로 이루어져 있고, 외피는 온통 유리로 덮여 있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였던 철과 유리로 지은 대온실의 외관은 고풍스러운 목조 전각인 궁궐 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색적이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온 것과 때를 맞추어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마침내 1909년 일반에 개방하였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목적이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데 있었다
대온실 앞 화분
대온실은 일제의 불손한 의도 아래 훼손된 창경궁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건축된 지 이미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를 지닌 근대의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느티나무
궁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천 년을 훌쩍 넘기며 사는 나무이다
나무 약 300살을 넘긴 이 나무는 창경궁 역사와 함께하였다
성종대왕 태실 비(成宗大王胎室碑) · 태실(胎室)
한국에서는 태여나자마자 한 살이 된다
뱃속의 아이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아이가 태여나면 3~7일 사이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안했다
성종태실이 창경궁 내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왔기 때문이다
풍기대(風旗臺) / 보물 제846호
풍기대 윗 구멍에 깃대를 꽂고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앙부일구(仰釜日晷) / 보물 845호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청동재질의 반구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시각뿐만 아니라 계절도 알 수 있게 제작된 것으로 가치가 높다
또한 시각 표시를 12지신의 동물 그림으로 그려 넣어 당시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작된 앙부일구는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고 2~3세기 후 같은 방법으로 새로 제작되었다
새롭게 제작된 앙부일구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를 모사한 앙부일구다
환경전
집복헌(왼쪽) · 양화당(오른쪽)이 있다
자경전 터(慈慶殿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창경궁 건너편의 함춘원에 있던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고쳐 짓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궁궐 내 언덕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정조는 경모궁을 수시로 참배하였으며 경모궁으로 이동할 때 번거롭지 않도록 홍화문 북쪽에 담장을 헐고 월근문을 냈다
눈길을 끌지 않는 문이지만 조선 후기 문예부흥과 혁신 정치를 이끈 정조의 깊은 효심으로 생겨난 궁궐 공간이다
한중록의 산실이기도 한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적 왕실 도서관인 「장서각」이 들어섰다가 1992년에 철거되었다
명정전 행각(明政殿行閣)
명정전은 명정문과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행각들은 왕실 친위부대의 주둔지나 왕실의 초상을 치르기 위한 재실로도 쓰였다
즉위 전부터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는 즉위 후 왕의 호위부대를 키우는데 각별히 노력을 기울였다
1784년(정조 8)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현세자로 바꾸고 이를 축하하기 위한 경과(慶科)의 무과시험을 실시해 무려 2천 명을 합격시켰다
이듬해에는 장용위라는 친위부대를 설치하여 이들을 모두 등용하였고 1788년 장용영으로 개칭하였다
1793년에는 서울과 수원에 나누어 주둔하였으며 서울에 주둔한 군대는 명정전 행각에 자리했다
선인문(宣仁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장 동남쪽에 설치된 문으로 창경궁 건립 당시 초창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 광해군 8년에 중건하고 철종 8년(1857년)에 다시 소실, 고종 14년(1877)에 복구하였다
역사적 사건으로 환경전에서 급사한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남편이 영문도 잘 모른 채 죽은 것도 모자라
인조가 자신의 수라에 독을 넣어 죽이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폐출시켜 선인문을 통해 궐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또 인현왕후를 주술로 저주해서 중전 복위를 노렸던 희빈 장씨의 시신이 선인문으로 나갔고
문정전 앞에서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도 선인문 뒤로 옮겨진 뒤 8일 동안 굶주림과 한여름 더위에 신음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 밖에도 선인문은 많은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평교자를 탄 채 창경궁을 나간 문이다
선인문(宣仁門)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