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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 서대문구

덕수궁을 둘러보고 남대문시장에서 식사하고 추억의 서대문 길을 걸었다

덕수궁(德壽宮)
조선 14대 왕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처음 궁궐로 사용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 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시점이다

 

 

대안문(大安門) 현판
1899년 고종과 순종이 종묘에 갈때 사진이다
*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런데 동문(東門)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인데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
〈대한문상량문(大漢門上梁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이 억만 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나와 있다
한양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여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다

 

 

중화전(中和殿)
경운전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 신하들의 하례 ·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한 후 5년 남짓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에 중층의 중화전을 새로 지었다
이때 중화전 행각 128칸과 중화문 · 조원문도 함께 건립되었다
그러나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재건하면서 당시 어지러운 시국과 궁핍한 재정상황으로 단층으로 축소 건축되었다
중화전을 둘러싸고 널찍한 마당 · 조정을 형성했던 행각들은 고종 승하 후 대부분 헐리고 동남쪽 모퉁이 부분만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추측할 뿐이다

 

 

석조전(石造殿)
고종의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1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로, 돌계단을 올라 들어서는 2층은 대접견실과 대기실로
3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고종황제 승하 후에는 경운궁이 황폐해지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회화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돈덕전(惇德殿)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석조전 뒤에 있었던 건물이다
돈덕(惇德)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는 뜻이다
*
재건공사중이다

 

 

즉조당(卽阼堂)
즉조당 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인조 즉위 이후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해왔던 까닭이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즉조당(卽阼堂) 편액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그 밖의 건물은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했다
*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다

 

 

석어당(昔御堂)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 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때 경운궁은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서궁 유폐는 결국 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서 즉위한다
유폐의 한이 맺혀 있던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36조의 죄를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쇄를 전하였다

 

 

석어당(昔御堂) 현판
정조의 어필 현판이다

 

 

정관헌(靜觀軒)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위치도 함녕전 뒤에 자리 잡고 있어 전통 궁궐에서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 · 남 · 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베란다가 둘러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 · 박쥐 · 꽃병 등 한국 전통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설이 있기는 하나 그에 대한 근거자료나 기록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태조 · 고종 · 순종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카페큐브 한옥카페점
덕수궁을 걷고 남대문시장으로 점심을 하러 가는 길이다

 

 

남대문시장 생선구이 · 조림 골목
이곳에서 갈치조림으로 점심을 했다

 

 

서울로 7017
1970년 만들어져, 2017년 다시 태여난 17m 높이의 고가도로다
*
점심을 하고 서대문구로 가는 길이다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 약현성당은 본래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공소로 출발하였다
약현이란 이름은 당시 이곳에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설립 당시 순교자 처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가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었다
*
서울로 7017에서 봤다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구 서울역사(사적 제284호)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철도의 남대문역사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1925년 르네상스 풍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2011년 복합 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바뀌었다

 

 

서울역 버스정류장

 

 

염천교(鹽川橋)
이곳에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焰硝廳)이 있었다고 해서 염초청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는 염청교(焰廳橋) 혹은 염초청교(焰硝廳橋)라고 썼는데 음이 변하여 염천교(鹽川橋)가 되었다
일명 염춘교라고도 하였다

 

 

구 서울지방철도특별사법경찰대
지금은 비어 있다

 

 

청파로

 

 

가톨릭출판사
서울역 서부교차로에서 중림로를 따라 오른다

 

 

남산서울타워
중림로 언덕에서 돌아봤다

 

 

충정로사거리
1968년 9월 19일에 완공된, 서울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가 있던 곳이다

 

 

아현성결교회
예전 오촌교회라 불리었던 교회다

 

 

아현성결교회(오촌교회)

 

 

아현성결교회 앞 길이다

 

 

아현동 가구거리
서울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 교각이 왼쪽에 남아 있다

 

 

종근당

 

 

선교교육원

 

 

인창중 · 고등학교

 

 

미동아파트

 

 

아시아연합신학연구소

 

 

충정로현대아파트
예전 개명아파트 자리다

 

 

개명아파트(충정로아파트) 빗돌
충정로현대아파트 화단에 있다

 

 

미동초등학교
경찰청이 뒤에 있다

 

 

경의선 철길 옆 골목이다

 

 

경의선 철길

 

 

철길 떡볶기

 

 

철길 떡볶기
토요일 · 공휴일 쉬고 일요일 장사합니다
*
오늘 토요일이다

 

 

충정아파트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豊田種雄)에 의해 지어진 우리나라의 최초의 아파트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과 미군이 차례로 사용했다
미국은 유엔 전용 호텔로 썼는데 「트레머호텔」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4층이었는데 옥상에서 미군들이 파티를 하는 모습을 이웃 주민들이 봤다고 전한다
1961년에 김병조라는 희대의 사기꾼이 불하받아 5층으로 증축하고 「코리아관광호텔」로 이름을 바꿨다
1년 뒤 몰수돼 서울은행 소유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1979년에는 충정로가 8차로로 확장되면서 건물 일부가 잘려나갔다

 

 

예전 친구 집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듯하다

 

 

서대문중앙교회

 

 

경의선 철길
철길은 지하화하고 고가도로는 없앴으면 한다

 

 

서소문아파트
1971년 지어져 1972년에 입주한 선형식 아파트다
앞쪽에 있는 만초천을 덮고 그 위로 아파트를 지었다
이곳에도 예전 친구가 살았었다

 

 

구 서대문극장 · 서대문 원조 돼지갈비통술집
극장은 왼쪽 3층 건물이고 통술집은 오른쪽 2층 건물 1층에 있다

 

 

서대문 원조 돼지갈비통술집
서울 온 친정아버지 모시고 창경궁(창경원) 나들이 때 산 복권이 당첨돼 장사를 시작했다
1961년 남대문에서 백반집을 하다 마포로 옮겨 돼지갈비집을 열었다가 1963년 이곳 서대문에 자리를 잡았다
전에 들렸을 때 문을 닫는다고 했어도 들려봤다
역시 문이 닫혀 있었다

 

 

예전 동아출판사 건물

 

 

김종서 집터 빗돌

 

 

학교앞 분식
돈의문박물관마을 옆에 있다

 

 

진순자김밥 · 떡볶기

 

 

작곡가 이영훈 추모비
발표곡으로 광화문 연가 · 난 아직 모르잖아요 · 사랑이 지나가면 등 100여 곡이 있다
2018년 2월 14일이 14주기다

 

 

김장생 · 김집 생가 터 빗돌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이 태여나신 곳이다
*
시청역이 마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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