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을 가기 위한 걷기로
종로5가역에서 창경궁을 오가며 들렸던 곳들을 올렸다
종로5가역
친구의 집과 상점이 있던 곳이라 만들었다
시점이다
효제초등학교
1895년 양사동소학교로 설립되었다
연동교회
1894년에 설립된 교회로 김마리아가 세례 받고 학창시절 신앙생활을 한 장소다
김마리아는 연동여학교(1909년부터 정신여학교) 시절
연동교회에서 부목사격으로 사역하던 선교사 밀의두(E.H.Miller)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경성의학전문학교 터(현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 의학연구혁신센터)
일제가 1916년 4월 1일 설립한 식민지 최초의 전문학교다
해방 뒤 그 재산은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창설되는데 쓰였으며 한국인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국립 의학교육기관 의학교
1899년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교육기관인 의학교는
국권침탈 과정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 등으로 굴절을 거친 뒤 민족해방으로 본연의 지위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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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사진)
구 공업전습소 본관 / 사적 제279호
배경이 되는 흰 건물은 대한제국 때 설치한 국립공업연구소 격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1909년 완공하였으며 설계와 시공은 당시 탁지부 건축소에서 맡았다
원래 이 자리는 화폐를 인쇄하던 전환국 기계시험소 터였는데 1906년 공업전습소가 발족하면서 이곳에 본관과 교사, 식당을 지었다
목조 2층 건물로 대한제국 때 지은 목조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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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때 북방 개척에 무공을 세워 이름을 떨친 남이장군의 집터 빗돌이 앞에 있다
방송대학TV(OUN)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배움을 원하는 이들을 향해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는 국내 유일의 평생교육 채널이다
실험동물봉양탑(實驗動物供養塔)
실험실에서 죽은 동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뒷면에는 '大正 十一年 七月 五日 建之'라 새겨져 있다
1922년 7월 5일이다. 대한의원 뒷편에 있다
대한의원(大韓醫院) / 사적 제248호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설립된 근대식 국립병원이다
2층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년(융희 1) 3월, 당시 국립 의료기관에 해당하었던 광제원(廣濟院)
국립 의학교육기관이었던 의학교(醫學校)와 그 부속병원 · 대한국적십자병원이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자 192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재편되었다
이 건물은 대한의원 본관으로 1908년 10월 완공되었다
대한의원(大韓醫院) / 사적 제248호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 1855~1935)선생 상
조선왕조 말에 처음으로 종두법을 도입 보급한 근대의학의 개척자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근대 의학교육기관인 관립 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이 땅에 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문법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이기도 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6회 졸업생 근정
대한의원(大韓醫院) 안내 빗돌 · 기증기념비
1908년 준공된 대한의원 건축 당시 동판으로 제작된 지붕을 일제가 걷어가고 함석으로 대체하였으나
(주)풍산에서 전통문화 존중의 기업 이념을 실현하고자 동판 시공 기증하여 당시 모습을 복원하였다
일성 명주완박사 기념비(一惺明柱完博士紀念碑)
1905년 서울에서 나시어 1977년 8월에 그 생애를 서울에서 마치시었다
일찌기 의학에 뜻을 두시어 나라를 잃었던 시대에는 인술로 이웃을 돌보시었고
해방과 더불어 경성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 주임교수와 병원장직을 겸하여 맡으시면서 초창기 신경정신의학의 초석이 되고자 밤낮없이 애쓰시었다
서울의대 조선의대에서 학장과 병원장으로 중책을 맡아 이 나라 의학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고
대한의학협회장, 서울시의사회장 등 의사단체 활동에도 앞장 서시어 의도확립과 인권옹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시었고
공직을 떠나셔서는 언어학에 대한 연구를 하시는 등 학문에의 불같은 의지를 보이시었다
박명진 박사 상(朴明鎭 博士 像)
일제강점기에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교수로 있다가 광복을 맞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가 창설되자, 경성치과전문학교를 치과대학에 편입시켜
1 · 2 · 3대에 걸쳐 학장을 역임하면서 치과대학의 발판을 굳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25년에 창립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모임인 한성치과의사회 임원과 회장을 지내면서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서울과 경성의 두 갈래로 갈라진 치과의사회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대한치과의학회 회장을 초대부터 연임하는 한편
초창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해마다 종합학술대회를 열고 1954년 학술지를 창간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홍화문(弘化門) / 보물 제384호
조선 9대 성종이 1483년(1484년 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 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창경궁의 정문이다
명정전(明政殿) / 국보 제226호
인조가 반정 직후 정전으로 사용하기 전까지는 정사를 위한 공간으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은 듯하다
13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에게는 왕실의 웃어른이 많았다
세조비인 할머니 정희왕후 · 예종의 비인 숙모 안순왕후 · 어머니 소혜왕후 · 형 월산대군 등
서열이 높으신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생신잔치 · 경로잔치 등 각종 잔치를 명정전에서 자주 열었다
봉황 두마리
명정전 천장에 있다
숭문당(崇文堂) ·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830년(순조 30) 소실된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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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문당은 경사진 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숭문당은 영조의 친필 현판이다
회화나무
궁궐에서 즐겨 심었던 나무로 선비의 집이나 서원 · 사찰 같은 곳에서도 많이 심었다
옛날에 회화나무를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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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회화나무
영조 38년(1762)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역사를 같이한 나무로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빈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자로는 느티나무와 같이 괴목으로 불렸고 동궐도(국보 제249호)에도 보이는 나무다
함인정(涵仁亭)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1633년(인조 11) 건립된 정자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경춘전(景春殿) · 환경전(歡慶殿)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 ·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通明殿) · 양화당(養和堂)
통명전은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은 박석을 깔았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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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은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집복헌(集福軒) · 영춘헌(迎春軒)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 재건되었다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했다
대춘당지(大春塘池)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다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율곡로 창경궁 앞 도로구조 개선공사
일제는 1907년부터 창경궁 안에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이름마져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는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이를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장군석(將軍石) / 조선초기
능묘를 수호하기 위한 석인상으로 주로 왕릉이나 사대부의 묘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능묘제도가 정비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장군석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이나 철퇴, 방망이 같은 무기를 들고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문인석(文人石) / 조선중기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묘 앞에 문관의 모습을 한 석상을 설치하여 묘를 지키고자 하였다
양관조복은 문무백관이 왕을 알현하거나 나라의 큰 행사 ·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신하가 착용하던 관복의 일종이다
조선 초 · 중기에는 복두공복형 문인석이 세워지다가
중종대(1503~1544) 이후 조복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양관조복형의 문인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예전 친구의 사진관이 있던 곳이다
충무칼국수
이민간 손님도 다시 찾는 맛이란 선전문이 창에 붙어 있다
굴무침 · 만두가 맛있다
점심을 했다
대학로
열쇠전문점
중앙자원에 싸여 있다
연동교회 빗돌
첫 번째 예배처소 자리(초가 1894~1896)이다
교회가 설립될 무렵부터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가 대지를 매입해 기틀을 잡은 곳으로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중심이 됐다
선교사 밀의두 목사는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종로5가 일대를 「선교언덕」이라고 명명할 정도였다
김마리아 길 안내판
일제강점기 최대 여성 비밀 항일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독립운동의 거점장소를 돌아보는 코스로
종로구 연지동 연동교회를 시작으로 세브란스관(옛 정신여고 본관) · 회화나무 · 선교사의 집(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 여전도회관까지 이어진다
세브란스관(옛 정신여자고등학교 본관)
김마리아는 1910년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1913년 모교에서 교사로 전임해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곳은 3 · 1운동 당시 전국 규모의 항일 여성독립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한
김마리아 열사가 교사시절 두 차례에 걸쳐 체포 · 연행된 곳이다
당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비밀문서 등 독립운동 자료들을 마룻바닥을 뚫고 숨겨놓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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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관은 1905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910년에 준공된 건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설립을 도왔던 미국의 세브란스가 건립기금을 기부하고 캐나다의 유명한 건축가 고든이 설계하여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여의사 애니앨러스에 의해
1887년 정동에서 설립된 정신여학교는 1895년에 이곳 연지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 사립학교 인가를 받으면서 당대의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며
근대여성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일제강점기에 정신여학교에서 보여준 굳건한 독립운동 열의는 대단했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상(1892~1944)
대한의 독립과 결혼한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중 2 · 8독립선언에 참여 후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하여 3 · 1운동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전국조직 활동으로 두 번의 옥고를 겪는다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발병으로 병보석 치료중 상해로 망명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에 선출되다
국민대표회의(1923. 1~6)에 참석 · 임시정부의 개조 존치를 강력 주장하다
1923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교포사회를 향해 실력양성으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연설을 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다
1924~32년에 걸쳐 파크대학 · 시카고대학원 · 콜롬비아대학원 · 뉴욕신학교에서 수학하고 뉴욕에서 근화회를 조직하여 여성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형기 만료로 귀국 후, 일제의 거주제한 등으로 원산의 마르타윌슨여자신학교 교수로서 성경을 통한 애국정신 진작에 힘쓰다
장로교 전국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 신사참배를 거절하다
1944년 순국한 선생은 대한독립의 진정한 영웅이다
회화나무 보호수 / 서울시 보호수 제120호
정신여자고등학교가 있었던 자리로서 3 · 1운동 당시
김마리아 선생이 영도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산실이었던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그리고 교과목으로 금지되었던 국사 교재들을 이 고목의 빈 구멍에 숨겨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후일 각종 비밀문서를 보존하여 역사적인 자료를 남기게 한 유서 깊은 수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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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높이 21m · 둘레 3.9m · 나이 515년 · 지정일자 1981. 10. 27
선교사의 집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 위치한 선교사의 집은 독립운동의 거처가 되기도 했다
김마리아는 3 ·1운동 배후자로 지목돼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에 시달리다가 면소판결로 출옥한 뒤
당시 정신여학교 부교장이었던 천미례(L.D.Miller) 선교사의 집 2층에 머물렀다
1919년 10월 10여 명의 여성계 대표들이 김마리아가 머물고 있던 이 선교사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했으며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광장시장
종로신진시장
이곳에서 막걸리 한 잔했다
종로5가역
마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