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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경복궁 걷기

경복궁 걷기로
종각역에서 경복궁을 돌아보고 경복궁역까지 걷기다

보신각(普信閣)
종로사거리에 있는 누각으로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조선 태조 5년(1396) 창건하였고
고종 때 보신각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1980년 시멘트 2층 건물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2층에 보물 제2호인 옛 보신각 동종을 대신할 새로운 종이 걸려있다
옛 보신각 동종은 두 번의 화재로 원형이 손상되고 음향이 다소 변한데다 균열로 인해 종으로서의 생명을 다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안식하고 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년 11월 1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수도권 전철 수준점 표지석
모든 지하철 깊이의 척도가 되는 원점이다
1971년 서울시장이었던 양택식 시장이 표시했다

*

(2016. 9. 10)

 

 

조선중앙일보 건물(현 농협중앙회)
1926년 7월 5일 신축하여 일제 치하 동아일보 · 조선일보와 함께 민간 3대 신문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1933~1937)의 사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독립운동가인 유정 조동호의 후원으로 몽양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한 후
1936년 8월 13일자 신문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 정간 처분을받았다가 1937년 폐간되었다
왼쪽 벽돌 건물이다

 

 

도시환경정비구역 내 유적발굴조사 빗돌 / 수진궁 터
수진궁은 조선시대에 후사없이 죽은 왕실 자녀들의 혼을 모아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본래 세조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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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측량학교 터(壽進測量學校址)
한말 개화사상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국비유학생인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1908년 수진궁을 빌려 설립하였던 측량전문교육기관이다

 

 

한국의 만화 · 여기서 시작하다
이곳은 대한민보가 있던 자리로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 1면 중앙에 실린 삽화를 형상화했다
「만화」라는 표현이 아직 들어오기 전의 작품이기 때문에 「삽화」라고 명명했다고 본다
만화를 맡은 이도영은 25세의 동양화가로 조석천과 안중식의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하였으며 휘문의숙에서 미술교사 활동을 하였다
삽화는 연미복을 입은 신사를 통해 앞으로 대한민보가 나아갈 길에 대해 밝히고 있다

 

 

목은 선생 영당(牧隱 先生 影堂)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이색(李穡 1328~1396)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조선 숙종(1711) 때에 다시 그린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쫓아내자 창왕을 즉위시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애썼지만 실패하고 유배되었다
정몽주 · 길재와 더불어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불리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불사이군의 충신으로 꼽힌다

 

 

이색 초상화(李穡 肖像畵)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였던 이색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전하지만 모두 후대에 옮겨 그린 이모본(移模本)이다
이 작품은 사모를 쓰고 홍색 단령을 입은 채 교의에 앉아 있는 전형적인 문관 초상화이다
아래로 처진 가늘고 긴 사모의 각은 고려 말 복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필선 위주로 얼굴의 윤곽과 주름살을 표현하였고 이마와 코 · 뺨에 약간의 홍색을 더했다
옷주름 역시 붉은 필선으로 표현하는 데에 치우쳐 평면적인 인상을 준다
하지만 얼굴의 반점과 흰 수염을 통해 노년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화면 오른쪽에 양촌 권근의 찬문과 후손 이정기의 글이 적혀 있다

 

 

제용감 터(濟用監址) 빗돌
조선시대 궁중의 모시 · 마포 등 옷감의 직조와 의복의 제조 · 공급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던 곳이다

 

 

사포서 터(司圃署址) 빗돌
사포서는 궁중의 채소밭과 과수원을 관리하던 조선시대의 관아다
원래 북부 준수방(종로구 통인동)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다

 

 

연합뉴스빌딩

 

 

평화의 소녀상(平和 少女像)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민간단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중심이 돼 서울 종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처음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27곳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립공원 등 해외 3곳에도 세워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은 부부 작가(김운성 · 김서경)의 작품이다

 

 

평화의 소녀상(平和 少女像)
의자에 앉아있는 조각상은 소녀의 형상인데 그림자는 자세히 살펴보면 구부정한 허리와 등의 할머니임을 알 수 있다
소녀들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그들에게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恨)이 어려있는 그림자이다
해가 늘어지면 소녀의 왼쪽 어깨의 새가 할머니의 쪽으로 변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빗돌

 

 

경복궁 광화문 해치상
불을 잠재우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2010년 광화문 복원과 함께 재차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나 원래는 광화문 70~80m 전방에 있었다

 

 

흥례문(興禮門) 행각
흥례문 좌우에 위치한 행각으로, 서측으로는 정색(政色)과 마색(馬色) · 동측으로는 결속색(結束色)이 위치한다
정색은 조선 후기 병조에 속한 부서로, 무선사(武選司)라 하던 것을 정조 연간에 바꾼 것이다
임명사령장인 고신과 매년 정월에 봉급증표인 녹패 수여 · 장병의 휴가처리 등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마색도 병조에 속하였으며 승여사(乘輿司)였던 것을 정조 연간에 바꾼 것이다
왕의 수레나 가마 · 행차시의 의장 · 마굿간 등을 관리하였으며 관원이 지방으로 갈 때 역마를 제공하는 일도 맡았다
결속색은 도성과 대궐문의 개폐의 보류를 담당했다

 

 

영제교(永齊橋)
영제교는 현재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를 흐르는 금천 위에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 수정전 앞쪽, 근정전 동쪽으로 옮겨 다니다가 최근 흥례문권역 복원사업을 통해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돌난간의 엄지기둥 위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고
다리 사방에는 포복 자세로 어구(御溝) 바닥을 주시하는 네 마리의 신수가 배치되어 있다

 

 

영제교 서수( 永濟橋 瑞獸)
다리를 통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사악한 기운을 막고, 흉한 것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이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경복궁의 금천인 영제천 서북쪽에 있는 천록(天祿)이다

 

 

영제교 서수( 永濟橋 瑞獸)
경복궁이 다른 궁궐과 비교되는 점은 돌조각상이 유난히 많다
광화문 앞 한 쌍의 해치상 외에도 십이지신상 · 사신상 · 각종 서수상 등 모두 102점의 동물상이 설치됐다
근정전 56점 · 근정문 3점 · 영제교 8점 · 경회루 20점 등이다
영제교 서수 중 서북쪽에 있는 천록은 유일하게 혀를 내밀고 있어 유명하다

 

 

근정전(勤政殿) / 국보 제223호
왕이 문무백관에게 조회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즉위 · 책봉 · 혼례 같은 주요한 행사를 치르는 곳으로
왕과 나라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이다
백악산을 배경으로 한 중층의 전각은 높고 넓은 2층 월대 위에 당당히 올라서 있으며
근정전 주변을 둘러싼 행각의 기둥들은 마치 왕을 호위하는 듯 줄지어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다니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신하들이 걷는 신도가 따로 있으며, 신하들이 지위에 맞추어 자리하도록 품계석을 세웠다

 

 

근정전 답도(勤政殿 · 踏道)
근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구름 속에 노니는 봉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닫집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둘러쳐진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다

 

 

황룡(黃龍)
근정전 내부 천장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황룡 2마리가 있다
조선이 황제의 국가가 되었음을 알리려고 고종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다 새긴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태전(交泰殿)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명칭은 주역에서 따온 것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경전(慈慶殿) / 보물 제809호
대원군이 고종을 양자로 삼은 신정왕후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1867년(고종 4) 자미당 터에 지은 건물로 대비는 이곳에서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행했다
준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지만 1888년(고종 25)에 중건돼 경복궁의 침전 중 유일하게 100년 이상을 버텼다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에게 헌상된 자경전은 교태전보다 구조가 복잡하고 위엄이 느껴진다
전각을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에 청연루(淸燕樓)라는 누마루와 별채인 협경당(協慶堂)이 붙어 있고
뒤편에는 온돌이 놓인 복안당(福安堂)이 연결돼 있다

 

 

향원정(香遠亭)
경복궁 후원 향원지 가운데 둥근 섬에 있는 육모지붕의 이층 정자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깃불이 켜진 곳이 향원정 일대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7년만인 1887년으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2년이 빨랐다
경복궁 중건을 마친 뒤 건청궁을 지으면서 새롭게 만든 왕실 전용 휴식 공간이다
경회루와 함께 경복궁의 여러 정원과 후원 가운데에 가장 주목받는 장소다

 

 

건청궁(乾淸宮)
구 한말 서구열강의 세력다툼 속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정세를 새로운 각오로 돌파하겠다는 고종의 의지가 어려 있다
그러나 고종은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참극을 겪은 뒤 경복궁을 떠났다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궁궐이 되었다
*
왕의 처소인 장안당 · 왕비의 처소인 곤령합 · 별채인 복수당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옥호루(玉壺樓)
일본인들은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 뜰로 황후를 끌고와 시해했으며
황후의 시신을 곤령합의 일부인 동쪽 건물 옥호루의 방 안으로 잠시 옮겨 놓았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기록돼 있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 안채(곤녕합) · 부속건물(복수당) ·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장안당 건물 서편에 남북 방향으로 정화당과 추수부용루가 붙어 있는 형태다

 

 

경안문(景安門)
경복궁의 빈전인 태원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하향정(荷香亭)
경회루 연지 북쪽에 있는 정자로 1959년에 지어졌다
하향정은 일반 정자에서는 보기 드문 육각형 형태이며 규모는 작지만 건축 기법이 섬세하고 익공 형식의 조선 후기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다

 

 

경회루(慶會樓)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큰 누각으로 주역 사상에 바탕을 둔 우주의 원리를 건축에 담고 있다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열 때 이용하였다

 

 

육조거리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육조 관아가 배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광화문 앞에서 봤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6.18km, 소요시간 3시간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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