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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남원시

남원시 첫 날 만복사지 · 관왕묘 · 광한루원 등을 둘러보고
둘째 날 향교 · 만인의총 · 김희 묘 등을 보고 1박2일 걷기를 마쳤다

삼익모텔
둘째 날 시점이다

 

 

남원성 남문지 석인상(南原城 南門址 石人像)
남원성은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석성으로 둘레가 2.5km 정도였다
동학혁명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철로 개설로 4대문과 성곽 대부분은 사라졌고, 북서쪽 일부 구간만 남아 있다
정유재란이 떠오르는 옛 남원성 안으로 든다

 

 

광한북로
일제강점기에 번성했던 본정통(本町通)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가 가로수다

 

 

남원부 관아 터
조선 초기 남원부는 1군(순창) 9현(용담 · 구례 · 임실 · 운봉 · 장수 · 무주 · 진안 · 곡성 · 광양)을 관장한 도호부였고
1895년에는 순천 · 담양 · 옥과 · 창평이 추가된 소속군이기도 하였다

 

 

남원우체국
1896년 2월 16일 남원우체사로 개설되었다

 

 

남원용성초등학교
본관 건물 자리가 예전 객사 용성관이 있던 곳이다

 

 

용성관 석물(龍城館石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용성관은 통일신라 신문왕 11년(691)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다른 지역에서 출장온 관리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조선 태조를 상징하는 나무 패를 모셨으며 백성을 돕는다는 뜻에서 〈휼민관(恤民館)〉이라고도 불렀다
이 용성관은 광한루 · 관왕묘와 더불어 남원의 3대 건물로 일컬을 만큼 규모가 컸다
정유재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과 숙종 때 다시 지었으나, 6 · 25를 맞아 또 다시 불탔다
지금은 70m 가량의 옛 건물 받침부와 본관 계단으로 쓰이는 돌 1점이 남아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9m · 나무 둘레 4.5m · 나이 510년 · 지정일자 1992. 10. 7

 

 

남원 석돈(南原石墩)
남원성의 지키는 당산신을 모시는 제단(성황단)이다
이곳에 우체국을 지으면서 일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의 석돈의 받침부에는 40~80cm 크기의 돌을 중간부와 상부에는 20~30cm 크기의 자연석을 쌓아서 네모난 단을 이루었다
석돈은 그 옛날 관리의 숙소였던 용성관의 부근에 거대한 돌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고목이 우거져 철따라 두견새와 두루미가 날아와 쉬어 가곤 했다고 한다
근래 각종 건물을 지으면서 석돈의 돌을 빼내어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남원시 건강가정 ·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이정섭 박사가 선친의 유업을 이어 이정섭외과병원을 운영했던 건물이다
다문화가족 사회통합교육장으로 건물을 내어준 데 대한 감사 빗돌이 정문 옆에 있다

 

 

남원항일운동기념탑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만세를 외쳤던 남원 출신 항일 애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남원 4 · 4운동의 함성이 울려퍼진 남원교육문화회관에 2005년 10월 「남원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하정동커피
1942년 일제강점기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2017년까지 「제중한의원」으로 이용되다가 지금의 「하정동커피」가 되었다
대문 앞 향나무가 인상적이다

 

 

남원교육문화회관
2002년에 「남원 학생 종합 회관」으로 개관하였으며 2007년에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유애묘(遺愛廟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7호)
이 사당은 조선 세종 때 초대 남원부사를 지낸 김희(金凞)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영조 때 남원부사로 부임한 이속이 다시 지었다
김희는 백성을 인자하게 대하였으며, 재판에 있어서는 그 판결이 매우 명백하였다
그가 남원을 다스리는 동안 백성들은 언제나 태평가를 부르며 그의 덕을 찬양하였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김희가 중병에 걸려 죽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백성들이 뜻을 모아 이 사당을 세웠다
김희의 덕을 기리는 제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애묘(遺愛廟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7호)

 

 

남원세무서
1948년 설치되어, 2020년 동림로로 신축 · 이전하였다

 

 

동북교회
1952년 9월 7일 노회장 고성모 목사 주관으로 설립 예배를 드리므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원 동북교회가 설립되었다

 

 

구 남원역 로터리
대흥슈퍼휴게실 · 오복여인숙 등이 있다

 

 

구 남원역(폐역)
1933년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은 전라선을 이설하면서 쉼터로 쓰이고 있다
구 역사 부지에는 향후 생태 공원이 조성되고, 남원읍성 북문 및 북벽이 복원될 예정이다

 

 

구 남원역(폐역)
문화재 조사를 위한 시굴 · 발굴 중이다

 

 

구 남원역 구내

 

 

구 남원역(폐역)
비록 남원성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남원성 전투에서의 결사항전으로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이 있기에 전라선 남원역을 이곳 남원성 북문과 만인의총 자리에 설치한 것이다
일본의 역사적인 보복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역을 이설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거셌다고 한다

 

 

남원성 북문 터
광복 70주년 일제강점기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 사업으로 북문 · 북성벽을 2025년까지 복원할 예정이다

 

 

구 남원역 급수탑

 

 

만인의총(萬人義塚) 본 무덤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가 종결된 날은 1597년 음력 8월 16일 밤이다
성 안에서는 1만여 명이 항전하고 있었고 몰살당하였다
성 주위를 돌아보니 길바닥에 사람의 시체가 모래알처럼 쌓여 있다(경념의 「조선일기」)
남원성에서 왜적이 철수한 것은 19일이었다
이미 부패하고 있을 그 무수한 시신들은 누가 언제 어떻게 했을까?
남원성 북벽 가까운 외진 이곳은 저지대였고 크고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덤을 쓸수 없다는 관행을 무시하고 시신을 모아 넣고 흙을 덮어 작은 봉분 하나를 만들었다
이른바 만인의총이 만들어진 것이며 이곳이 그 자리다
뒤에 선조들께서 충렬사당을 짓고 예를 갖추어 오던 중 일제는 남원역을 만들고 이 무덤 자리를 증기기관차 석탄똥 배설장으로 만들었다
1964년 습지대인 이곳에서 왕산 기슭으로 이장하여 예를 갖추었으나
선열들의 체백은 진토인 채 이곳에 그대로 묻혀있고 혼령들 역시 이곳을 온전히 떠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싶다

 

 

남원성 북서쪽 구간으로 가는 길이다

 

 

돌담

 

 

남원성 북성벽 치(雉)

 

 

팽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7m · 나무 둘레 3.5m · 나이 240년 · 지정일자 1982. 9. 20

 

 

성벽을 허물고 그 위에 집이 들어서 있다

 

 

남원성벽 위에 지어진 집이다

 

 

광치천
축천교에서 봤다

 

 

남원중학교 버스정류장 로터리
만인의총 · 남원향교 빗돌이 있다

 

 

구암(龜岩) 마을(구등바우) 빗돌
풍수지리학상 금구몰리 즉, 거북이가 땅 속에 묻혀 있는 형국이라 구암마을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구등바우」라고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이름이다

 

 

남원향교(南原鄕校) 빗돌

 

 

진강루(振綱樓)
1935년 남원도호부 동헌의 근민당 문루인 환월루를 이건하여 진강루라 헌액했다

 

 

진강루(振綱樓) · 명륜당(明倫堂)

 

 

내삼문
대성전으로 드는 문이다

 

 

대성전(大成殿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
전라도 4장관 향교이면서 증설위 향교로서 공부자와 4성(五聖)을 중앙 정위에
송조 4현(宋朝 四賢)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을 동 · 서 종향위에 배향하고
춘2월과 추8월 상정일에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매월 1일과 15일에 분향례를 봉행한다
*
선조 32년(1599)에 지방의 유지 유인옥이 다시 지었다

 

 

동재(東齋)
성묘중건사적비(聖廟重建事蹟碑)가 있다

 

 

서재(西齋)
흥학사적비(興學事蹟碑)가 있다

 

 

남원 향교동 산림녹화탑 백세청청(百世靑靑)
3단으로 구성된 석조물의 녹화탑으로 탑비에는 전 대통령 박정희의 친핀 백세청청이 새겨져 있다

 

 

덕음봉
정자가 있는 산이다

 

 

지리산 마루금
정자가 있는 덕음봉 뒤로 보인다

 

 

남원향교
산림녹화탑이 있는 언덕에서 봤다

 

 

남원 충렬사(忠烈祠)

 

 

남원 충렬사(忠烈祠) 정금문(整襟門)

 

 

정금문(整襟門) 현판

 

 

남원고등학교

 

 

만인의총(萬人義塚)
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전사한 민 · 관 · 군 1만여 순절의사를 합장한 묘이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 패배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7월 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4만 명이 좌우군으로 나뉘어  좌군은 남원 · 우군은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 구례현감 이원춘 · 조방장 김경로의 군사와 명의 부총병 양원의 3천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13일부터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협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 · 방어사 오응정 · 별장 신호 · 부사 임현 · 판관 이덕회 등 민 · 관 · 군 1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충렬사 본전
광해군 4년(1612)에 사당 건립 후 효종 4년(1653) 충렬사 사액을 받았다
사당 내에는 이복남 전라병사 등 53위(位) 충신의 위패와 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렬사 내부
남원부성 순절 만인지위(南原府城殉節萬人之位)가 가운데 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정유년(1597) 8월 16일 남원성에서 왜장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끄는
5만6천의 왜적과 맞서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순국하신 만여 명의 의사를 모신 묘이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
오나리 오나리쇼셔 / 오늘이 오늘이소서
마일이 오나리쇼셔 / 매일이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 /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라난(나난) 마양당직에 오나리쇼셔 / 새나마 주야장상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
일반 평민들이 평안한 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부르던 노래로 추정된다
남원 지역에서 채보(採譜)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거의 사라져가던 것을
1610년 양덕수(梁德壽)가 〈양금신보(梁琴新譜)〉를 만들면서 이 노래를 채보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
이 노래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사기장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망향의 한을 달래던 것이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은 1673년 일본 땅에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단군을 모시는 옥산궁(玉山宮)이라는 사당을 짓고
해마다 추석에 제례를 올리면서 매일의 평안을 비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
1988년 7월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완월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의 후예들이
귀향음악회를 열면서 이 노래를 원래 고향인 남원에 돌려주는 전수식을 가졌고
남원문화원에서는 이 노래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기 위해
1995년 만인의총(萬人義塚) 잔디광장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탑」을 세웠다

 

 

남원시 선거관리위원회

 

 

양집(梁濈) · 양필(梁必) 효자비
두 분은 형제로서 조선 순조 때 남원 용정마을에서 태여나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두 분께서는 아침에 부모님께 무안드리고 밤이면 편히 주무시도록 자리를 보아드리고
중병으로 어머님이 유태롭게 되시니 대소변을 맛을 보아 병의 차도로 감지하였고
어머니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칼로 찢어 피를 마시게 하여 생명을 7일간이나 연장케 하였다
별세 후 3년간 성묘를 지성으로 하였다. 그때 호랑이가 효성에 감동하여 길을 인도하였다고 전한다
조정에서 양집에게는 1881(고종 18) 8월, 양필에게는 1882(고종 19) 5월에 각각 동몽교관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를 증직(贈職)하였다

 

 

향교동6통 새마을회관
예로부터 교룡산 정기가 서린 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마을에 있는 우물에 용이 내려와 살았다 하여 용정(龍井)마을이다
1609년(광해 1)에 남원양씨 양위필이 처음으로 터를 잡고 정착한 이래 양씨 집성촌이 되었고
김해김씨 등이 뒤이어 들어오면서 윗몰과 아랫몰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김희(金凞) 부사 묘
조선시대 초대 남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던 김희 부사의 묘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았던 김희 부사는 자기의 상여를 인도하는 깃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다
바람이 멈추는 곳에 자신을 묻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남원부사김후희묘(南原府使金侯凞墓)

 

 

남원부사김후희추모기적비(南原府使金侯凞追慕紀蹟碑)

 

 

건우박공옥동공적비(健友朴公玉童功績碑) · 용산이계영공적비(龍山李啓英功績碑)
사직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있다

 

 

남원사직단(南原社稷壇)
문이 닫혀 있지만 담장 너머로 단(壇)과 사당을 볼 수 있다

 

 

남원사직단(南原社稷壇)
사직단은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해마다 정월이면 남원부사가 몸소 이곳에 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그해 풍년과 고장의 안녕을 빌었다
사직단은 네모진 형태로서 네 방향 모두 장방형의 돌을 이용하여 3단의 기단을 쌓았는데 높이는 1.3m 내외다
사직단 옆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방은 담장으로 둘려 있다
농경국가에서 토지와 곡식은 나라 살림의 근본이기에 사직은 곧 국가를 뜻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3년(1394)에 세운 서울에 사직단을 세우자 전국 각지의 행정 중심지에도 사직단을 세웠다
남원 사직단도 그 무렵에 설치했다

 

 

성원고등학교

 

 

지리산둘레길 명판
마침점인 남원역 정문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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