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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제5실(대한제국)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

조선의 국왕과 왕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3개 층 · 10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시유물을 교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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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제5전시실은 《대한제국》 전시실로

황제와 황후의 자동차 · 황실 관련 사진 · 황실의 생활공간 등 대한제국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전시실

고종은 대내외에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대제국의 건설을 이룩하기 위하여

1897년 연호(年號)를 광무(光武) · 국호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황제국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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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2층 제2전시실이다

 

 

 

 

경운궁의 정전 · 중화전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법궁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의 정전이다

본래 중층의 건물로 지어졌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현재와 같은 단층으로 재건되었다

이곳 중화전은 황제국의 정전답게 조선 궁궐과는 다른 요소가 돋보인다

답도의 문양 · 천장 장식물 등은 기존의 봉황 대신 용으로 조각하였고 창호와 어좌 주변에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사용하여 꾸몄다

 

 

 

 

황실어좌

어좌는 황제 또는 왕이 앉는 좌석을 일컫는 용어로, 옥좌 또는 보좌라고도 한다

어좌 몸체의 전면을 용문양으로 장식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금색 용머리를 끼웠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놓아 위엄을 갖추었다

이 어좌는 조선시대 왕의 붉은 색 어좌와 달리 대한제국기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칠로 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

 

 

 

 

자주 외교의 상징 ·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고종황제 어새 · 함 / 대한제국 · 보물 제1618-1호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대한제국 국새와 이것을 담는 함이다

손잡이는 거북이 형태이며, 황제어새(皇帝御璽)라고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 연표 /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으로

19세기 세계는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격변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외교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국외 사절단을 파견하고, 박람회를 통해 서양에 조선을 알리려 노력하였다

더불어 외국 선진제도와 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여 교통 · 통신 · 금융 · 의료 ·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서구 근대 문물의 도입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대한제국은 점점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상투의 나라 - 한국에서의 생활 / 언더우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가 1888년 선교 의사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생활을 회고하며 기술한 책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고종을 「좋은 품성을 가진 친절한 신사」로 명성황후를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유능한 외교가」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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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해밀턴

영국인 기자 해밀턴이 1901년부터 1903년까지 대한제국을 방문하고 당시 시대상을 상세하게 기술한 견문록이다

대한제국을 조용하면서도 아름답고 독특한 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는 국가로 소개하며

수도 서울이 머지않아 동양에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흥미로루며 가장 깨끗한 도시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서울의 각종 학교와 공공사업을 소개하면서, 이를 주관했던 고종을 진보적인 군주로 평했다

 

 

 

 

약장합본

대한제국기 외교 업무를 전담했던 외부에서 1876년 이래 조선이 해외 각국과 맺은 조약 등을 모아 발행한 책이다

일본 · 미국 · 영국 · 독일 · 러시아 등과 맺은 조약을 기록하여 외교 업무에 대한 참고자료로 삼았다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주화 / 1900년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제작된 기념주화이다

 

 

 

 

호조태환권을 찍은 틀 / 1893년

호조태환권은 우리나라 최초이 지폐이자 신 · 구 화폐를 교환할 수 있는 화폐 교환 증서이다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신 · 구 화폐의 교환업무를 담당했던 태환서를 발행하였다

5 · 10 · 20 · 50냥 권 등 총 4종의 태환권을 구 화폐(엽전)와 교환하고

이를 다시 신화폐(은화 또는 동화)와 교환하고자 하였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실제 발행되지는 못했다

 

 

 

 

고종 · 순종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며 황제권을 확립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행했다

전통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신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이고 부국강병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을사늑약의 반대, 헤이그 특사 사건 등을 구실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되었다

고종을 이어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일제의 간섭이 심해진 시기에 즉위하여 그 권한은 약했지만 즉위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해 황위 계승을 명확히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순종의 전국 순행은 백성들이 애국심을 표출하고 단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일강제병합으로 역사가 불과 1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던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과 순종의 죽음은

훗날 각기 3 · 1운동과 6 · 10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거국적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 ·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

 

 

 

 

고종황제 어진 / 20세기 초 · 채용신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초상화이다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지만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다

화가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전한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 제작을 기록한 의궤 / 1902년 · 보물 1901-3호

1902년(광무 6) 고종 51세와 즉위 4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睿眞)을 그리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옥책 / 1902년 ·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장 / 1902년 ·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우표(1902년)

고종황제의 망육순(望六旬 · 51세)과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황태자 순종이 고종에게 「건행곤정 영의홍휴(乾行坤定 英毅弘休)」라는 존호를 올릴 때 제작했던 옥책이다

고종의 공덕을 중국의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요순(堯舜)에 비유해 기리고 만세에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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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는 각종 기념일에 기념장을 발행하였는데

이 기념장은 고종황제 즉위 40주년과 망육순(望六旬 · 51세)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일을 기념하여 제작하였다

기념장 양면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通天冠)과 기로소 안의 누각인 영수각이 각각 한 면에 새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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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우표이다

황제의 상징인 통천관 도안 주변으로 대황제폐하, 어극사십계경축이라는 글귀가 마름모의 모양으로 적혀 있다

하부에는 대한제국을 《COREE》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종황제 기로소 입소 기념 잔치를 기록한 위궤 / 1902년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가 기로소에 입소한 것과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가 각각 4월 · 11월에 열렸는데 본 의궤는 4월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진연을 청하는 황태자의 상소에서 시작하여 진연의 일정 및 과정 · 진연에 참여한 이들에 대한 포상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권에서는 함녕전에서 거행된 외 · 내진연 도설이 확인된다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 / 1907년

1907년(융희 1) 순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기념장이다

기념장 한 면의 가장자리에는 태극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꽃잎이 중첩된 오얏꽃 위로 투구가 새겨져 있다

꽃잎에는 「즉위기념장(卽位記念章)」이라는 글자가 한 자씩 적혀 있다

다른 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폐하 즉위예식 기념장 융희원년 팔월 이십칠일」이 새겨져 있다

 

 

 

 

순종황제 즉위 기념 사진엽서 / 1907년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순종황제의 흑백사진이 인쇄된 우편엽서로 1907년 순종황제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것이다

엽서의 왼편에 있는 건물은 순종황제가 즉위식을 거행했던 경운궁(현 덕수궁) 돈덕전으로 보인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 1909년

1909년(융희 3)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순종황제가 당시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과 함께

경의선을 이용 평양 · 신의주 · 개성 등을 순행한 사진을 시간 순으로 모은 사진첩이다

 

 

 

 

순종황제 남서순행 기념장 / 1909년

1909년(융희 3) 1~2월에 걸쳐 순종황제가 민정시찰차 남쪽으로는 대구 · 의주 · 정주 · 황주 · 개성 등지를 순행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기념장이다

기념장 한 면에는 오얏꽃 무늬가 새겨진 황제기가 있고 다른 면에는 「대한뎨국 대황뎨폐하 남셔순행 긔념장 융희 삼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덕수궁 국장 화첩 / 1919년 · 순종황제 국장기념 사진첩 / 1926년

1919년에 덕수궁에서 훙거(薨去)한 고종황제의 국장장면을 흑백사진으로 촬영하여 발간한 사진첩이다

사진첩에는 고종황제의 훙거 발표부터 빈전 모습 · 국장 행렬이 궁을 나와 능에 이르는 모습까지 국장 절차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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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 있었던 순종황제의 국장을 촬영하여 경성사진통신사에서 발행한 사진첩이다

국장의 준비 과정부터 영결식까지의 흑백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국 건립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1897년 2월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지며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국호를 대한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환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국격을 높인 고종은 국가간 동급의 외교를 하고 황제국에 맞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여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고종황제 즉위식과 대한제국 선포 / 1897. 10. 12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변화상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고종은 각종 의장과 제도 등의 국가 의례를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높여 재정비하였다

궁궐을 장식하는 문양은 봉황에서 용으로 바뀌었으며 의복과 · 의궤 등에는 황실을 나타내는 황색을 사용하였다

한편 각종 의례 행사시 국가의 상징문양인 태극 등도 나타났다

 

 

 

 

상징물의 변화

 

 

 

 

명성황후 책봉과 국장(1897. 11. 22)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고종비 민씨의 국장은 2년 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왕비 민씨를 황후에 책봉하고 황제국의 예법을 갖춰 거행되었다

이는 대내외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며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이자 황제국가임을 보여주는 의미를 가졌다

 

 

 

 

고종황제 즉위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 / 1897년 · 보물 제1901-3호

1897년(광무 1)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과 황후 · 황태자 책봉, 각종 의장물과 어책 · 어보 제작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황제 즉위식 관련 행렬 반차도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의 가마와 의장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대한예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과거의 예제(禮制)를 황제국에 맞도록 제정 · 시행하기 위해 만든 예전이다

기존의「국조오례의」를 기반으로 하면서 명나라 황제국 의례를 참고하였다

기본 내용 구성의 체제는 갖추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과 편찬사업의 중단 등으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환구단 도면 · 황제 복식 · 깃발 등의 도설이 실려 있어 황제국으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명성황후 책봉 시 올린 금보 / 1897년

1897년(광무 1)에 만든 명성황후의 어보이다. 인면에는 '황후지보(皇后之寶)'라고 새겨져 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면서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거북이 모양이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는 용의 형상을 한 금보로 제작되었다

 

 

 

 

명성황후 책봉 시 올린 금책 / 1897년

1897년(광무 1) 고종황제가 왕후 민씨를 황후로 삼으면서 금보와 함께 제작한 금책이다

조선시대에는 옥으로 만든 옥책을 하사하였으나 황제국의 격식에 따라 금책을 제작하여 하사하였다

형태는 명나라 도식에 근거한 것이며 두 개의 판에 구멍을 뚫어 붉은 끈으로 연결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끈이 남아 있지 않다

 

 

 

 

명성황후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 / 1898년 · 보물 제1901-3호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명성황후의 국장 진행 과정과 이를 주관했던 국장도감의 운영에 관해 기록한 책이다

명성황후는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뒤,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국장이 계속 미뤄졌다

고종은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명성왕후를 황후로 격상한 후 성대하게 국장을 치렀다

 

 

 

 

태조 · 장조 · 정조 · 순조 · 문조를 황제로 추존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 / 1899년 · 보물 제1901-3호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오른 뒤 직계 4대조(장조 · 정조 · 순조 · 문조) 및 왕조 창업자인 태조를 황제로 추존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때 묘호를 일부 수정하여 장종을 장조로 정종을 정조로 익종을 문조로 변경하였으며 이를 반영하여 책보를 제작하였다

 

 

 

 

황제 추존 어보(장조 · 정조 · 순조 · 문조) / 1899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황제국의 예법에 맞게 직계 4대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제작한 어보이다

황제국의 격에 맞춰 거북 모양을 대신하여 용의 형상으로 손잡이를 제작하였다

 

 

 

 

의왕과 영왕의 책봉(1900. 08. 17)

조선은 왕의 아들에게 대군과 군으로 봉작하는 제후국의 예를 따랐으나

대한제국은 황제국 체제에 맞춰 고종의 적장자인 순종을 태자로, 그 외에 아들을 친왕으로 책봉하였다

1900년에 친왕제도를 갖추면서 궁내부에는 친왕의 업무를 전담하는 친왕부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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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 영왕을 책봉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 1900년 · 보물 제1901-3호

1900년(광무 4) 고종의 두 아들 의화군 이강과 이은을 황제국의 법도에 맞게 각각 의왕과 영왕으로 책봉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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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부의 인장 · 영친왕부라 새겨진 인장 · 영친왕부의 인장 · 영친왕부 총판의 인장(1900년경)

 

 

 

 

궁내부 소속 관청 직원의 인감을 모은 책 / 1907년

1907년(광무 11) 2월 궁내부에 소속된 직원들의 직명과 직급 · 성명을 쓰고 인감을 찍어 모아 놓은 책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본격적인 관제 개혁과 관문서 제도의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개인의 인감이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국가운영체제의 정비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위해 국가운영체제 정비를 힘썼다

특히 왕실 사무기구인 궁내부를 국가개혁을 이끌어갈 핵심 조직으로 삼아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의 근대화를 꾀하고,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또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대한국국제」를 공포하고,「형법대전」을 반포하여

근대적인 법체제를 수립하는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취해진 이러한 조치들을 「광무개혁」이라고 한다

 

 

 

 

군사제도의 근대화

개항 이후 조선은 군의 근대화와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880년(고종 17)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군사제도 운용전반을 총괄하였으며 1881년(고종 18)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여 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친군영을 두었다

또 1895년(고종 32) 서울에는 궁성 수비와 도성 경비를 위하여 친위대와 시위대를 두었으며 지방 주요 도시에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899년(광무3)에는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가 대원수에 올라

중앙군과 지방군을 지휘  · 감독하고 국방에 관한 명령을 관장하는 등 황제의 군권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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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군영 발급 문서에 사용한 인장 · 친군영 인장과 함(1883년 경) · 친위대 계급장(1895년 경)

 

 

 

 

법규류편 · 개정형법대전

1895년(고종 32) 이후 새로 제정된 법령을 엮은 법전으로 1908년(융희 2)에 내각기록과에서 발행하였다

대한제국을 전후한 시기에 행했던 국정 개혁과 신법 제정 및 법령의 개정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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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광무 9)에 공포된 근대적 형식을 갖춘 최초의 형법전인「형법대전」의 개정본이다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으며, 첫줄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무대신 고영희가 융희 2년 7월 23일에 개정 형법대전을 재가하여 공포함이 명시되어 있다

 

 

 

 

황제국의 상징 · 환구단과 환구제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둥글게 단을 쌓은 제천단이다

고종은 중국 사신의 숙소였던 남별궁에 환구단을 건립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제후국으로서 천제를 지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여겨 세조대 이후 중단되었으나 대한제국기에는 환구제를 다시 거행하였다

환구단 건설과 환구제의 시행은 독립된 황제국의 수립을 상징하였다

황궁우는 환구제 때 사용되는 신위를 모셔둔 건물로,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제천 장소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1913년 일본이 환구단 자리에 호텔을 지으면서, 현재는 황궁우 등 일부 시설만 남아있다

 

 

 

 

환구단의궤 / 1907년

환구단에서 환구제를 거행할 때 신에게 고하는 글인 축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1897년(광무 1)에 사용한 것과 1907년(융희 1)의 축식이 모두 실려 있어 고종과 순종 시기 환구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환구단 복원 배치도 · 현재 환구단 주변 배치도 · 환구단 옛 사진 등이다

 

 

 

 

환구단 건립 역사와 공간 배치

 

 

 

 

환구축판

환구제를 행할 때 기원 내용을 담은 축문을 올려두는 데 사용한 판이다

모서리를 둥글게 깎고, 한쪽 면에 환구축판이라는 글씨를 새겨 붉은 색으로 덧칠하였다

 

 

 

 

환구단 삼문 앞 석조계단 서수

 

 

 

 

환구단 삼문 앞 석조계단 답도

 

 

 

 

이룡희주 형태로 표현된  환구단 황궁우 천장의 황룡

 

 

 

 

신위를 모시는 용 무늬 장식 의자

환구단에서 제향을 지낼 때 신위를 모시는 데 사용한 의자이다

각 모서리마다 도금된 용머리를 장식했으며 의자의 등받이 부분은 용무늬를 투각으로 장식하였다

 

 

 

 

신좌 뒤에 설치하는 병풍

황궁우에서 주요 신위를 봉안하는 신좌의 뒤에 설치하는 병풍이다

삼면의 곡병으로 나무에 붉은 칠을 하였고, 구획된 칸마다 용 · 봉황 · 모란 등의 무늬를 새겼다

각 모서리에 용머리 장식을 도금하여 품격을 높였다

 

 

 

 

대한제국의 황궁 · 경운궁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법궁이자 도시 근대화 사업의 중심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궁역을 확장하고 전각을 신축하였으며 궐내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근대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고, 이름도 고종의 궁호에 따라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경운궁의 변천과 주요 전각

 

 

 

 

경운궁 현판 / 1905년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의 현판으로 경운궁의 즉조당에 걸려 있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중화전을 신축하기 전까지 경운궁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글씨는 고종의 어필이다

 

 

 

 

중화전영건도감의궤 / 1907년 · 보물 제1901-3호 · 중화전중건도감의궤 / 1907년 · 보물 제1901-3호

경운궁 정전 중화전을 1901년(광무 5)부터 1902년(광무 6)에 걸쳐 영건한 사실을 기록한 의궤이다

고종이 경운궁을 대한제국 정궁으로 사용하면서 건립한 2층의 중화전 도설이 실려 있다

본 의궤는 1904년 화재로 인한 경운궁 복구공사 내용을 담은「경운궁중건도감의궤」가 1907년 편찬될 때 함께 제작되었다

의궤의 표지에는 1904년을 뜻하는 광무2년 갑진2월(光武8年甲辰2月)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화재로 인한 복구공사 내용의 의궤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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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이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전소되자 1904년(광무 8)부터 1906년(광무 10)에 걸쳐 복구공사를 진행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화재 후 현재와 같이 단층으로 재건된 중화전의 모습 등 중건한 이후의 전각들에 대한 도설을 담고 있고

지금은 사라진 전각들의 모습도 살필 수 있다

 

 

 

 

돈덕전(惇德殿) 현판 / 1901년 경

경운궁 돈덕전에 걸었던 현판으로 당나라 구양순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연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1907년(융희 1)에는 이곳에서 순종황제가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대한제국의 역사와 함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고종의 붕어 이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관문각(觀文閣) 현판 / 1875년 경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궁궐 건축물인 관문각에 걸었던 현판으로, 글씨는 고종의 어필이다

경복궁 건청궁 뒤편에 위치했던 관문각은 본래 왕실 서재로 사용되다가 1875년(고종 12) 관문당에서 관문각으로 당호를 고쳤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에 의해 서양식 벽돌 건물로 개축되었다가 1901년경 철거되었다

 

 

 

 

돈덕전 테라스에 있는 고종 · 순종 · 영친왕 사진 / 1907년

경운궁 돈덕전 테라스에서 찍힌 고종 · 순종 · 영친왕의 모습이다

서양식 테라스와 함께 오얏꽃 무늬로 장식된 난간이 보여 대한제국 당시 돈덕전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창덕궁 · 경운궁 사진엽서 / 20세기 초

창덕궁과 경운궁 일대가 찍힌 흑백사진이 인쇄된 우편엽서이다

전신주가 설치된 창덕궁 인정전 모습과 경운궁의 중화전 · 구성헌 · 석조전 등 여러 전각들의 20세기 초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04년 화재 이전 중층의 중화전과 지금 사라진 구성헌이 보인다

 

 

 

 

창덕궁에 설치한 수도관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 1908년

1908년 10월 22일 제작된 것으로 수도관을 표시한 지도이다

도면에 대조전 · 희정당 등의 건물명이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창덕궁의 도면임을 알 수 있다

근대기에 수도시설이 유입되어 궁궐에 수도가 공급된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다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

서양문물이 수용되면서 궁궐은 전통적인 모습과 함께 서양식이 결합된 형태로 변모하였다

특히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은 궁궐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7년(고종 24) 경복궁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켜지며 전기시설이 궁궐에 도입되었으며

침대와 의자가 배치되거나 샹들리에와 커튼 박스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궁궐에 근대 수도시설이 갖추어진 다음에는 서양식 요리를 만드는 주방에 수도를 연결하고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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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전등갓 / 20세기 초

궁궐 전각의 천장에 설치했던 전등기구 유리갓이다

상부 중앙에는 연꽃 봉오리 꼭지가 부착되어 있으며, 가운데가 볼록한 타원형이다

등갓의 가운데에는 3개의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당시 전등을 사용했던 황실 생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창덕궁 사진첩 / 20세기 초

191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의 여러 전각과 후원 등을 담은 사진첩이다

서양식 인테리어 장식과 실내외에 설치된 전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흑백사진 위에 부분적으로 채색을 입혀 컬러사진과 같은 효과를 낸 사진들이 있다

 

 

 

 

근대기 황실 궁궐 내부 모습

대한제국기를 전후해서 궁궐 내부는 프랑스 · 영국 · 중국 · 일본 등에서 수입한 의자 · 탁자 · 커튼 · 카펫 등의 가구와 장식품으로 꾸며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구와 생활용품 대부분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로 장식되었다

또한 샹들리에와 같은 전기 시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덕수궁 · 창덕궁의 생활공간은 서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대한제국 황실 생활공간

대한제국기 황실에는 의 · 식 · 주를 망라하여 서양의 문화가 대량 유입되었다

궁궐에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내부에는

높은 천장에 화려한 조명과 서양식 커튼 · 카펫으로 장식되고, 침대 · 의자 · 탁자 등의 서양식 가구들이 비치되었다

서양식 가구의 도입으로 황실 가족들의 생활은 점차 입식 생활로 변모하였다

또 황궁 내 서양식 주방과 수세식 화장실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 사용하는 물품들도 서구식으로 변화하였다

 

 

 

 

대한제국기 황실가구 수입

대한제국기에는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내부 인테리어도 서양식 가구와 소품들로 꾸며졌다

대표적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에서 사용했던 가구 중에는 영국 가구회사인 메이폴사의 제품이 다수 있었다

메이폴사는 1800년대 중반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세계적인 가구회사로

고급가구 · 인테리어 소품을 제작하여 유럽의 호화주택 · 호텔 · 궁전 등에 납품하였다

1905~1910년 발행된 메이폴사의 가구 카탈로그에는 20세기 초 석조전에서 사용했던 가구와 유사한 가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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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그림을 자수한 병풍

양기훈(1843~ ? )이 그린 매화도를 밑그림으로 하여 비단에 수를 놓아 제작한 10폭 병풍이다

구불구불한 매화 줄기와 흐드러지게 핀 매화를 수놓아 장식적인 화면을 완성했다

제10폭에는 7언 율시의 제시가 있으며 「신 양기훈(臣 楊基薰)」의 관서와 「양기훈인(楊基薰印)」이 수놓아 있다

관서로 보아 고종에게 헌상한 병풍임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시기 순종황실 및 황후의 사진 배경에 매화도 자수 병풍이 자주 등장하여 황실의 실내장식용으로 여러 점 제작되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종과 순종 비 순정황후 / 1907년 이후

매화 그림을 자수한 병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덕수궁 석조전에서의 영친왕 일행 / 1911년 · 메이폴사 카탈로그에 실린 인테리어 가구

 

 

 

 

황실에서 사용한 여러 생활용품

개항과 함께 서양 물품들이 대한제국에 소개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지에서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의 자기를 수입하여 화병이나 세면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다

또 서구식 식생활의 유입으로 서양식 식기류와 조리용구를 이용하였다

이들 생활용품의 대부분에는 이를 생산한 외국 회사 명칭이 찍혀있거나 오얏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오얏꽃 무늬 은제 담배합

담배를 넣는 은제 합으로, 몸체와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에는 소림제(小林製) · 순은(純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뚜껑 윗면에는 금으로 도금된 오얏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오얏꽃 무늬 칠보합과 분합 · 봉황 장식 은제 서랍 장식품

소형의 은제합으로, 뚜껑에 칠보나 금도금으로 오얏꽃 무늬를 장식하였다

사각의 은제 합 바닥에는 소림제(小林製) · 순은(純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원형의 분 상자 바닥에는 제조회사인 'KOBAY-ASHI'와 재질을 표시하는 'SILVER'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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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 받침대에 봉황 장식이 꾸며진 장식품이다

받침대 윗면에는 금제로 오얏꽃 무늬를 넣었고, 당초 문양을 새겼다

당초문에는 부분적으로 칠보 장식을 하여 문양을 강조하였다

받침대에는 수납을 위해 만든 서랍이 있다

 

 

 

 

발을 씻는 욕조

 

 

 

 

세수용 물병 · 대야

 

 

 

 

서양식 관복장 도입

대한제국 황실은 중요한 행사에 황제국 격식에 맞춘 전통 관복을 착용하여

전통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서양식 복장을 도입하였다

서양식 관복을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한 시기는 1895년 을미개혁 때였다

우선 군의 근대화에 발맞춰 무관복부터 서양식이 도입되었고, 1900년에는 문관복도 서양식을 채택하였다

서양식 관복은 신분에 따라 문양의 종류와 개수에 차등을 두었다. 군복의 표장으로는 오얏꽃(李花)을 채택하였다

문관 복장의 주문양으로는 무궁화(槿花), 궁내부 관원의 경우는 오얏꽃을 주문양으로 활용하였다

 

 

 

 

황실의 군예복 착용 모습

대한제국기 군복은 지위에 따라 계급을 나타내기 위한 부착물의 형태가 달랐다

옷 소매에 부착한 인(人)자형 계급장(袖章)의 경우

원수부의 대원수인 황제는 11줄 · 원수인 황태자는 10줄 · 대장은 9줄 · 부장은 8줄 · 참위는 1줄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속에서도 고종 · 순종 · 영친왕 등이 황실의 군예복을 차려입고 위엄을 갖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영친왕 유년기 부장 예복

영친왕이 입었던 군복으로 육군 부장(副將) 예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겉은 홍색의 융이고, 안쪽은 홍색의 공단으로 제작되었다

앞면은 오얏꽃 모양의 장식과 매듭단추가 장식되어 있다

소매에 부착된 「人」자형 금색 수장의 개수로 신분을 나타내는 데 부장은 8줄이다

 

 

 

 

영친왕 유년기 참위 예복

영친왕이 입었던 군복으로 육군 보병 참위 예복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참위 예복은 옷섶이 깊게 겹쳐지고 단추가 2줄로 달린 더블브레스트 형태이다

소매에 부착된 「人자형 금색 수장의 개수로 신분을 나타내는 데 참위는 1줄이다

 

 

 

 

영친왕 외투

흑색 융단의 외투로 안감은 흑색의 무늬가 없는 비단인 공단으로 만들었다

소매 부분에는 홍색융과 금사선을 둘러 장식하였다. 흑색 외투는 1907년 10월 다갈색으로 개정되었다

 

 

 

 

문관 칙임관 1등 대례복

1900년(광무 4)에 제정된「문관복장규칙」에 규정되어 있는 문관 칙임관(정1품~종2품의 관료) 1등 대례복으로

대한제국 시기 문관들이 황제가 참석하는 공식적인 국가 행사와 외교행사, 궁중연회 때 입었던 제복이다

대례복이라고 해도 등급에 따라 무궁화의 수가 다른데

칙임관 1등은 상의 전면에 완전한 무궁화 6개와 절반 형태의 무궁화 6개를 수놓았으며 후면에도 무궁화를 수놓아 화려하게 장식했다

양 소매의 안팎에도 모두 한 송이씩 무궁화가 있다

 

 

 

 

훈공1등 태극장

 

 

 

 

서성대훈장

1902년(광무 6)에 제정한 훈장으로, 훈등은 등급이 없는 대훈위에 해당한다

황족 출신의 문무관 중에서 이화대훈장을 받은 자가 특별한 훈공이 있을 때 수여하였다

정식 훈장인 정장은 어깨에서 허리에 걸쳐 드리우는 보라색 바탕의 큰 수(綏)에 달려있다

대수 아래쪽에는 오얏꽃 모양으로 접어 부착하였다

대수 정장 외에도 가슴에 다는 부장, 예복의 옷깃 단추 구멍에 걸어서 다는 약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제국 황실 인물

흥선대원군부터 덕혜옹주까지 설명되어 있다

 

 

 

 

대한제국 황실 계보

 

 

 

 

영친왕 · 순종 · 고종 · 순정효황후 · 덕혜옹주

당시 일본에 억류되어 있었던 영친왕이 일시 귀국한 1918년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영친왕 · 영친왕비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은 11살이던 1907년 12월 이토히로부미 통감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되었고

1920년 일본 왕족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하였다

1963년 일본으로 떠난 지 56년만에 영친왕비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7년간 병상생활 후 1970년 생을 마쳤다

영친왕비는 1989년 서거할 때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면서 예술활동과 사회봉사 등으로 여생을 보냈다

영친왕비 서거 후 서화도구 · 생활 소품 · 직접 만든 자수 병풍 등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인수하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으로 영친왕비의 노년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영친왕비 매화그림

 

 

 

 

영친왕비 일기 / 1919년

영친왕과 결혼하기 1년 전인 1919년에 쓴 영친왕비의 자필 일기이다

136일분의 일상을 남긴 것으로 영친왕비 개인적인 감정과 함께 영친왕과의 일화도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친왕비가 지니고 있던 낡은 앨범 · 편지 · 엽서 · 일기 · 영친왕의 수첩 등 영친왕 부부 관련 기록물 중 일부가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황실 가족들과 서로의 안부를 묻는 서신 및 엽서 등에서 당시 황실 가족들이 처했던 상황과 심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영친왕의 환국을 촉구하는 편지(1961년 9월 5일)

1961년 충남 대전 중동의 상지회 대표 이유립 외 14명이 영친왕에게 쓴 편지이다

영친왕의 처지를 중국의 여러 역대 왕에게 빗대어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붓걸이

 

 

 

 

황실어사진첩(1929년)

일본 황실 인물 사진과 조선 황실 인물들의 초상사진이 수록된 사진첩이다

영친왕과 영친왕비 부부 사진을 시작으로 순종황제의 비인 순정황후 · 덕혜옹주

의친왕 이강과 의친왕비 김씨, 의친왕의 장남인 이건과 둘째 이우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덕혜옹주 초상사진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유아기 모습을 촬영한 흑백 초상사진이다

사진 속의 옹주는 당의를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뒷면 오른쪽에 연필로 「길상애기 돌날기념 기념사진」이라고 씌여 있다

 

 

 

 

황실황족성감

일본 황실 인물들의 사진과 이력을 모은 책이다

여기에는 고종 · 순종과 황후 · 영친왕 부부 · 의친왕 부부 · 의친왕의 아들 등 대한제국 주요 인물들의 사진과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순종황제 어차 / 1918년경 · 금속 목재 · 478.8cm · 폭 175.7cm · 높이 209.9cm · 등록문화제 제318호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로 미국의 지엠(GM)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7인승 · 31.25마력 · 8기통 엔진 · 배기량 5,153cc로 연식은 1918년 경으로 추정된다

차체는 철재가 아닌 목재이고 외부는 칠(漆)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20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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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 제7실이다

 

 

 

 

순정효황후어차 / 1914년경 · 금속 목재 · 444.4cm · 폭 179.2cm · 높이 204.7cm · 등록문화재 제319호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탔던 어차로 영국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 20마력, 4기통 엔진,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경으로 추정된다

순종황제 어차와 같이 차체는 목재이고 외부는 칠(漆)로 도장하였다

차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황금색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 무늬의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다

전 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는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자동차로

순종황제 어차와 함께 자동차 발달사는 물론 황실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