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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제2실(조선의 궁궐)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
조선의 국왕과 왕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3개 층 · 10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시유물을 교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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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제2전시실은 《조선의 궁궐》 전시실로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공간이자, 왕실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조선 최고의 건축물이다

조선은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 덕수궁을 짓고 필요에 따라 여러 궁궐을 사용하였다

제2전시실에서는 조선 궁궐의 역사와 공간의 구조 · 각종 장식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궁궐 전시실

궁궐은 통치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했다

조선은 풍수지리 사상에 기반하여 북쪽 백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남산 남쪽) · 타락산(낙산 동쪽) · 인왕산(서쪽)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수도로 정했고 백악산을 뒤로하여 법궁인 경복궁을 세웠다

이후 조선은 상황에 따라 창덕궁 · 창경궁 ·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등 다른 궁궐들을 건립해 조선의 궁궐은 모두 5곳이 되었다

각 궁궐들은 조선 600여 년간 여러 역사적 사건 속에서 영건과 중건 · 수리가 거듭되었는데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왕도정치 및 효와 예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인 이상사회 구현의 철학을 담아 당대 최고의 기술로 궁궐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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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2층 제2전시실이다

 

 

 

 

제2전시실

 

 

 

 

궁궐 영건 역사와 사용 기간

 

 

 

 

조선 5대 궁궐 지도

 

 

 

 

북궐도형과 경복궁

북궐도형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의 경복궁 모습을 담고 있다

초기 경복궁은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을 중심축상에 건립하고 전각마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담은 이름을 부여해 조선건국 통치이념을 건축에 담았다

임진왜란으로 소실 후 270여 년만의 경복궁 재건 현황은 북궐도형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외전 · 내전 · 동궁은 조선 초기의 모습과 같이 배치하고

그 외에는 조선 후기 창덕궁 등을 참조하여 궐내각사 · 대비를 위한 전각 · 흉례를 위한 전각 등을 조성했다

북궐도형에서 보여주는 고종 대에 재건된 경복궁은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세우면서 자리잡은 이념과 역사가 건물로 가시화된 것이다

 

 

 

 

동궐도에 보이는 창덕궁 · 창경궁

동궐도에는 자연형세에 따라 배치된 전각과 아름다운 후원이 펼쳐진 창덕궁 · 창경궁 모습이 담겨 있다

1405년(태종 5)에 지어진 창덕궁은 가장 오랜 기간 조선의 역사와 함께하며

정전 · 편전 · 궐내각사 · 대비전 등을 두어 조선왕조의 이상을 담은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졌다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창건했다

창덕궁의 동쪽에 연결되어 창덕궁의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었고, 대비들의 의례가 주로 행해졌다

규모는 작지만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많이 활용되었고 특히 대비와 후궁들이 주로 거처해 조선왕실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표된다

 

 

 

 

궁궐지

숙종의 명으로 편찬된 것으로 현재는 헌종 대의 증보판과 순종 대 편찬본이 전한다

헌종 대의 증보판은 숙종 대에 편찬된 원본 1권과 헌종 대에 증보한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4권을 하나로 하는 5책 한 질과

숙종 대의 원본 대신 도성지 1권을 필두로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4권 5책을 한 질로 하는 2가지 종류로 편찬되었다

헌종 대 증보판은 각 궁궐별로 전각의 위치와 그곳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적 · 문화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순종 대 편찬본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시작한 공사가 끝난 뒤 편찬한 것으로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만을 대상으로 해 각 궁의 전각 및 모든 건물의 칸수와 척량, 구조방식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어제 궁궐지 서문

지(志)라는 것은 기록이니,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연대가 점차 오래되어 증명할만한 문헌이 없으면 근거를 고찰할 수 없으니 하물며 이 엄중하고도 중요한 궁궐에 있어서야 …

경복궁은 우리 태조대왕이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지은 법궁이므로 첫머리에 싣고 …

그 다음이 창경궁 · 창덕궁 … 「여지승람」에서 취하기도 하고 혹 견문한 것을 두루 덧붙여 드디어 한 권의 책을 완성하여 살펴서 읽을 자료로 삼는다

화재로 소실된 궁궐과 훼철된 전각까지도 갖추어 싣지 않은 것이 없으나 사적을 알기 어려운 곳에 미상이라 표시한 까닭은 의심나는 것은 빼놓는 법도이다

을해년(1695년 · 숙종 21) 6월 상순

 

 

 

 

궁궐지 / 1834~1849년(헌종 연간)

헌종 대에 편찬한 궁궐지로 숙종 대 원본 1권과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경희궁 4권을 합해 총 5권 한 질이다

 

 

 

 

궁궐지 / 1907~1910(순종 연간) 추정

순종 연간에 경복궁과 창덕궁 · 창경궁만을 대상으로 편찬한 것으로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헌종 연간에 편찬된 것과 달리 각 전각의 칸수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경회루 연못 출토 용 / 19세기 후반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신이 방문했을 때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 연못에서 발견된 청동용이다

경회루의 건축원리를 설명하고 있는「경회루전도」에 의하면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주역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는데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고 한다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 준설작업 중 경회루 북쪽 하향정 앞 연못 바닥에서 청동용이 발견되었다

 

 

 

 

잡상

잡상이란 기와지붕 위 추녀마루에 흙으로 빚어 올린 작은 장식기와이다

궁궐의 재앙을 막아주기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주로「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 저팔계 · 사오정 등과 토신들을 형상화했는데

이들은 모두 액운을 막아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궁궐의 공간구성

조선의 궁궐 공간은 크게 국정 업무를 위한 공간과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 그리고 후원으로 나뉜다

국정공간에는 정전을 중심으로 편전과 궐내각사가 곁에 배치되었다

생활공간은 왕실 가족 구성원에 따라 그 공간이 다시 구분되었다

내전은 왕과 가족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사적인 공간이었으나 왕실의 경조사 등 각종 국가 행사를 치루기도 했다

동궁의 경우는 세자를 위해 설치되어 별도의 공간으로 구획되었다

후원은 휴식을 취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거나 신하들과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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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의 중심 · 정전

정전은 궁궐에서 국정운영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가장 상징적이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은 모두 정면 5칸이며, 전면에는 이중의 월대가 구성되었다

전면에 넓은 월대와 정전, 전문(殿門)과 그 마당에서는 신하들이 임금에게 드리는 새해 인사 · 외국 사신의 접견 등 큰 국가행사가 치러졌다

 

 

 

 

숙종 즉위 30년 기념잔치 그림 / 1706년(숙종 32) · 복제

숙종 즉위 30년을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임진왜란 이후 100여 년만에 열린 외연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경희궁 숭정전에서 열린 잔치 배치도

1710년(숙종 36) 경희궁 숭정전에서 숙종의 환후가 회복되고 50세가 된 것을 기념해 열린 궁중잔치의 좌석 배치를 기록한 그림이다

 

 

 

 

정아조회지도 / 1778년(정조 2)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서 조회를 할 때 각 관원들과 기물의 위치를 문자로 표기한 그림이다

조회도는 관리의 품계와 업무에 따른 위치뿐만 아니라 조회 때 사용된 깃발 및 가마 등 각종 의장의 종류와 배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국가 관료의 정비와 국왕의 통치체계를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성학집요(聖學輯要)

1575년(선조 8) 이이가 제왕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서 선조에게 바친 책이다

1760년(영조 36) 2월 27일 희정당에서 신하들에게「성학집요」를 강했다고 한다

 

 

 

 

국조상례보편 / 1758년(영조 34)

국가의 상례에 관해 정리한 책이다

선정전에서 사용된 각종 제사용품의 모양과 배치 도설이 실려 있다

조선 전기에 편전 역활을 하던 선정전은 조선 후기에는 주로 빈전 ·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청기와 용머리 장식

창덕궁 선정전에서 수습한 것이다

 

 

 

 

세자와 세자빈의 공간 · 동궁

동궁은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궁궐 내 동쪽에 별도로 위치한다

동궁은 단순한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세자가 제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공간으로

왕의 덕목을 갖추기 위해 교육을 받던 세자시강원(춘방) · 서연 장소 · 경호를 담당하는 세자익위사(계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동궁은 세자가 책봉되어 즉위할 때까지만 사용하던 공간으로

세자가 책봉되지 않은 경우에는 왕의 정치공간인 편전으로 사용되는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효세자책봉의례도의 중화당 부분 / 1784년 ·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1784년(정조 8) 8월 1일에 있었던 문효세자의 책봉의식을 그린 그림이다

왕세자가 중화당에서 사자들이 가지고 온 교명과 책인을 인도받는 수책례를 치루는 모습을 기록했다

 

 

 

 

문효세자책봉 옥인 / 1784년(정조 8)

문효세자가 중희당에서 세자로 책봉될 때 받은 옥인이다

문효세자는 1782년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여났다

 

 

 

 

문효세자책봉 죽책 / 1784년(정조 8)

문효세자가 중희당에서 세자로 책봉될 때 받은 죽책이다

 

 

 

 

중희당 편액 · 책꽂이 그림

동궁 내 세자의 공식적인 활동 공간으로 세워진 중희당은 1782년(정조 6) 정조가 문효세자의 서연장소로 건립했다

당액은 정조의 어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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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외에도 여러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려 마치 책이 실제로 꽂힌 서재를 설치한 듯한 효과를 냈다

특히 조선 후기 왕실에서 많이 그렸는데 주로 왕이나 세자의 거처에 놓았다

 

 

 

 

시와 학문이 어울어진 공간 · 후원

후원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독서를 하며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인 동시에

왕이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며 신하들과 시를 나누어 지으며 문예활동을 펼친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인재를 뽑는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왕은 농사를 왕비는 양잠을 실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원냉절제종신서시 현판 / 1727년(영조 3)

창덕궁 후원 영화당에서 영조가 종신 63명과 접견해 시를 짓고 이어서 서평군 이요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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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쓴 글

"정월 대보름 좋은 날 종친들 모임

좋은 분위기 화락한데 햇빛도 밝구나

그대들이여 술 마시고 취함에 사양하지 말지어다

한잔 술도 모두가 정성에서 비롯되네"

 

 

 

 

내원상화임자갱재축 / 1792년(정조 16)

창덕궁 후원 옥류천 일대에서 정조와 규장각 관원들이 꽃구경과 낚시를 즐기면서 쓴 시를 모아 연결한 시축이다

 

 

 

 

야간순찰패

조선시대 궁궐 및 도성의 야간순찰을 책임지는 순장(巡將)이 지니고 있던 표신이다

이 순장패의 한 면에는 순패(巡牌)가, 다른 명에는 신(信)자가 양각되었다

 

 

 

 

위장소 인장 / 1792년(정조 16) · 호위청 인장 / 1892년 경(고종 29)

위장소는 오위도총부의 위장이 숙직하던 곳으로 동서남북 4개소에 설치되었다

각 소의 위장과 부장은 매일 밤 맡은 구역을 시간별로 나누어 순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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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청은 조선 후기 궁중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된 병조 소속의 관청이다

인조반정 이후 궁궐의 숙위를 위해 1623년(인조 1)에 생겨났다

 

 

 

 

야간통행패

궁궐 출입자의 야간통행증이다

둥근 패의 한 면에 통부(通符)라고 새기고 그 위에 다시 같은 글자의 낙인을 찍어 위조를 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