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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제1실(조선의 국왕)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

조선의 국왕과 왕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3개 층 · 10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시유물을 교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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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제1전시실은 《조선의 국왕》 전시실로

조선왕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상징물과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국왕 전시실

왕(王)이라는 글자는 천(天) · 지(地) · 인(人)을 나타내는 3개의 일(一)이 뚫을 곤( l )으로 연결된 형상이다

즉, 국왕이란 덕으로써 우주(천 · 지 · 인)를 관통하는 존재이자 하늘의 명(천명)을 받은 초월적 존재였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은 어좌와 당가 · 어보 · 복식 · 어진 등 각종 상징물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초월성을 나타내면서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조선의 국왕은 유교적 성군이 되기 위해 세자시절부터 재위 이후까지 평생동안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마했다

그리하여 국정 운영의 소양을 쌓음과 동시에 고대의 이상적인 군주상인 학자군주(군사 君師)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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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2층 제1전시실이다

 

 

 

 

조선의 국왕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일본에 강점당하기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승계하며 지속되었다

왕은 강력한 지배체계를 유지해 갈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어야 했으며 배우자인 왕비도 이에 걸맞게 덕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왕실 자손들은 태여나면서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이에 부응하는 교육을 받아

바른 인성을 갖추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들을 두루 살피고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소양을 쌓았다

왕은 많은 권한을 가졌으나 객관적이고 타당한 규율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체계를 정비하였다

 

 

 

 

조선왕조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래 1910년까지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이으며 지속된 왕조이다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민족을 격퇴하고 전공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사대부 세력을 결집하여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1394년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국가통치 이념으로 성리학을 표방하였다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통해 지방 행정조직에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양반관료제를 채택하여 개인의 소양에 따라 관료로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산업은 농업이었으며, 주로 상민(常民) 계층이 경작한 토지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산업구조가 다양화되고 신분제도의 예속성이 약해지는 등 점차 근대국가로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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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부터 순종까지 업적과 사건들이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다

 

 

 

 

신성한 왕의 공간

궁궐의 정전은 국가의 중요의식을 행한 장소로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이다

정전 중앙에 임금의 의자인 어좌가 놓이는데 왕의 권위와 위엄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당가(唐家)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당가의 상부에는 보개를 덮고,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한 쌍의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었다

높다란 단의 중심부에 어좌와 이를 감싸듯 펼쳐진 곡병을 함께 두고

뒤편으로 해와 달 · 다섯 봉우리를 묘사한 일월오봉도를 설치하여 신성과 위엄을 강조하였다

어좌는 전면에 구름 속을 나는 용 문양을 금으로 그려 넣고 모서리에는 황금색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여 최고의 지존의 자리다운 위엄과 격식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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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늬 항아리와 장식용 꽃(花罇 화준)

궁궐에서 임금의 자리 좌우에 놓은 홍 · 벽도화(紅 · 碧桃花) 화준은 왕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며

꽃을 향하여 모여드는 각종 새들과 조충은 군신(群臣)을 상징한다

 

 

 

 

제왕으로 가는 길

조선 제19대 왕(재위 1674~1720) 숙종의 예다

자는 명보 · 휘는 순이다. 현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이고

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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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2년 1세 탄생 · 5세 송시열 등 4인을 원자보양관으로 임명 · 7세 세자책봉 · 9세 성균관입학례 · 10세 관례 · 11세 혼례 · 14세 즉위

 

 

 

 

성군을 향한 평생교육

조선의 임금은 왕도정치를 실현할 성군이 되기 위해 평생토록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왕위를 계승할 원자의 교육과 양육은 보양청이 담당하였다

이후 원자가 글을 읽기 시작하면 강학청에서 교육을 진행하였는데 주로 생활예절을 중요시하였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서연이라는 교육제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왕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세자시강원(춘방 春坊)이 전담하였다

교육은 장차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바른 역사관, 넓은 식견 등 뛰어난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경연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경연은 각종 현안들을 논의하는 자리로서 정치적 기능도 가졌다

 

 

 

 

국왕이 왕세자에게 당부한 글(훈유 訓諭)

중종이 원자 인종에게 지어준 훈계의 글이다

 

 

 

 

책례반차도

반차도는 가례 · 책봉례 · 발인 등의 의식에서 행렬 또는 왕의 행차 모습을 그린 기록화이다

의궤 안에 그려지기도 하고 이와 같이 반차도만 분리하여 두루마리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중 이 반차도는 책봉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영조의 당부를 담은 각석(1744년 · 영조 2)

영조가 사도세자의 관례 때 교훈이 될만한 글을 내린 것이다

백성을 다스릴 때는 관대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도세자의 자를 「윤관(允寬)」이라 하여 「관」자를 썼다고 밝히고 있다

크게 4가지 내용을 22장의 석판에 새겼다

 

 

 

 

서연에서 강론하는 방법을 적은 현판

서연에 걸었던 현판으로 왕세자가 월 2회 신하들과 강론하는 회강의 관한 규칙을 적은 글이다

 

 

 

 

소학(小學) · 아동용 윤리학습서

8세 전후 아이들에게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교재이다

송나라 주희의 지시로 제자인 유자징이 편찬하였는데 총 6권으로 내편 4권은 입교 · 명륜 · 경신 · 계고이며, 외편 2권은 가언 · 선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몽선습(童蒙先習) · 아동용 오륜 교육 교재

학동들이 서당에서 「천자문」 다음으로 배우던 교재이다

부자유친 · 군신유의 · 부부유별 · 장유유서 · 붕우유신의 오륜을 간결하게 서술했다

영조 대에 세자의 교육교재로 「동몽선습」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서통 · 죽간

유교경전을 외우거나 학습한 내용을 평가할 때 사용하던 경서통이다

경서통에 죽간을 가득 넣어두고 그중 하나를 뽑은 다음 거기에 적힌 글귀를 읽고 스승에 질문에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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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통은 맹자 · 시경 · 서경 · 소학이다

 

 

 

 

국왕의 즉위

왕위에 오르는 방식은 크게 양위 · 사위 · 반정으로 구분된다

양위는 왕이 직접 왕위를 넘기는 것이고, 사위는 왕이 죽은 뒤 후계자가 그 뒤를 잇는 방식이며, 반정은 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방식이다

어떤 방식이든 새로운 왕은 즉위식이라는 장엄한 행사를 통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일반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사위였기 때문에 즉위식은 국상의 한 과정이었다

새로운 왕은 입고 있던 상복을 잠시 벗고, 대례복인 면복을 입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먼저 선왕을 모신 빈전에서 왕의 상징인 대보를 받고 정전의 정문에 설치한 어좌에 앉아 신하들의 축하인사인 하례를 받은 후 정전에 올랐다

이로써 즉위식은 마무리되었다

 

 

 

 

국왕의 면복

국왕이 입는 최고의 예복으로 즉위식과 비를 맞는 가례 · 종묘제례와 조회 · 정조에 착용하였다

머리에는 면류간을 쓰고 곤복을 갖춰 입었다

곤복은 곤의 · 중단 ·  · 폐슬 · 옥대 · 대대 · 후수 · 패옥 ·  ·  · 규로 구성되었다

 

 

 

 

국왕의 면복 · 구등면복

 

 

 

 

옥대 ·

옥대는 옥 장식을 붙여 만든 허리띠이다

왕과 왕세자 등이 조복 · 상복 · 제복을 입을 때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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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는 왕이 대례복을 입을 때 손에 쥐는 서옥이다

규는 흙토(土)자를 둘 겹친 글자로, 천자로부터 받은 땅을 재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면류관

구장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최고 격식의 모자이다

앞뒤로 옥과 구슬을 늘어뜨려서 시야를 가리고, 좌우에도 옥구슬이 늘어뜨려져 있다

여기에는 「악은 보지 말고 나쁜 말은 듣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왕의 초상 · 어진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선대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국왕이 살아계실 때 그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도사 · 圖寫) · 국왕이 돌아가신 뒤에 그리기도(추사 · 追寫)했다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그린 어진은 임금을 직접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진전에 봉안하였으며 배경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원오봉도 병풍을 두었다

 

 

 

 

태조 임금의 초상 / 1997년 · 권오창 제작

조선왕조 창업자인 태조(재위 1392~1398)의 반신상이다

원본은 1872년(고종 9) 고종의 명으로 19세기 도화서의 화원인 조중묵이 맡아 그린 것으로

익선관과 청색 곤룡포 차림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원종 어진

추존 임금 원종(1580~1619)의 어진으로 왕자군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백택 흉배가 달린 흑단령에 사모를 쓰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원종은 조선왕조 제16대 왕 인조의 생부로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추존되다가 1632년(인조 10) 다시 왕으로 추존되었다

인조는 1632년 원종을 추존하기에 앞서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남별전의 이름을 숭은전으로 바꾸고 이곳에 원종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원종 어진은 영희전 제3실에 계속 봉안되어 있었으며 1872년(고종 9)에 한 차례 이모(移摸)가 이루어졌다

이 어진은 바로 이때 이모한 어진을 바탕으로 복제한 것이다

 

 

 

 

순종 황제 초상 / 1997년 · 권오창 제작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재위 1907~1910)을 그린 전신상이다

면복 차림으로 황제국의 예에 따라 12류관 12장복을 갖추고 있으며 얼굴은 순종 황제의 군복 차림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순종은 아버지 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한일강제병합으로 퇴위 당한 뒤 1926년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어보의 봉과와 봉안

어보는 왕실의 지위를 상징하는 예물이기에 공들여 포장해서 각별하게 보관하였다

어보가 완성되면 보자기로 싸서 금전지로 장식한 띠로 묶은 다음 내함(보통 寶筒) · 외함(보록 寶盝)에 넣어 자물쇠로 봉하였다

어보는 주인공 생전에는 기거하는 전각에 보관하다가 주인공이 승하하면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때 주인공이 받은 모든 어보와 어책이 봉안되었다

종묘 신실 안 동쪽의 보장에는 어보를, 서쪽 책장에는 어책과 국조보감을 봉안했다

봉안 후에는 종묘서에서 책보를 꾸준히 관리했으며

왕 또한 종묘의 책보를 살펴(봉심 奉審) 전란이나 화재에 파손된 책보를 수리하거나 새롭게 만드는 등 선대왕과 왕비의 어보를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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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어보와 숙종비 인원왕후의 금보를 포장하는 물품

 

 

 

 

종묘 신실의 내부 구조

 

 

 

 

책봉 의례

책봉은 왕세자 · 왕세손 · 왕세제 · 왕비 · 왕세자빈 등을 해당 지위에 임명하는 의식이다

국왕은 책봉을 받은 인물에게 임명장인 교명, 훈유의 내용을 담은 옥책이나 죽책과 함께 해당 지위의 상징으로 어보를 수여하였다

 

 

 

 

유세손서(兪世孫書) / 1776년 · 영조 52

영조가 83세에 왕세손이던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내린 유서이다

유서는 정조의 효성이 만세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정조효손은인(正祖孝孫銀印) / 1776년 · 영조52

영조가 83세에 왕세손이던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내린 은인이다

은인에는 영조의 친필로 「효손 팔십삼서」를 새겼다

 

 

 

 

왕권의 상징물, 어보 · 어책 · 교명

어보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일반적으로 왕의 인장을 뜻하나 왕비 · 왕세자 등의 의례용 인장까지 통칭한다

왕실 인사를 책봉하거나 덕을 기리며 특별한 이름을 올리는 의식을 할 때 지위와 이름을 어보에 새겼다

어책은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으로서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이나 국왕의 훈유를 새겼다

교명은 왕비 · 왕세자 · 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하는 문서로 왕의 당부의 말이 담겨 있다

왕과 왕비의 어보 · 어책 · 교명은 주인공의 사후에 종묘 신실에 봉안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했다

조선 왕실의 어보 · 어책 · 교명은 당대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예술 등의 시대적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는 기록문화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왕의 호칭과 어보

조선의 국왕은 일생을 통해 다양한 호칭을 부여받았다

태여나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아명 · 명 · 자 · 호를 받았고, 왕으로서는 존호 · 시호 · 묘호 · 능호 등을 받았다

국왕의 호칭 가운데 어보에 새기는 것은 존호 · 시호 · 묘호 · 추상존호 등이다

존호는 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이고 추상존호는 세월이 흐르면서 돌아가신 국왕에게 새로운 평가를 부여하여 지어 올린 이름이다

시호는 왕의 사후 생전의 공덕을 참조하여 신하들이 지어 올리는 것과 중국으로부터 받는 호칭 두 가지가 있다

묘호는 삼년상을 마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호칭으로 왕의 공이 크면 조(祖) · 덕이 크면 종(宗)을 붙였다

 

 

 

 

효종 어보 / 1900년)

조선 17대 왕 효종(1649~1659)의 시호가 새겨진 어보이다

이 어보에 새겨진 16자의 글자 중 「선무장무신성현인」은 효종 승하 직후 올린 것이고

「명의정덕」은 영조가 · 「흠천달도광의홍렬」은 고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이다

 

 

 

 

목조 금보 / 1705년 · 숙종 31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1274)에게 올린 어보이다

1394년(태조 3) 태조 즉위 후 목조로 추존하였다

이 금보는 1705년(숙종 31)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록과 계승

유교에서는 덕치를 행한 선왕의 업적을 본받는 것을 이상적인 덕목으로 여겼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의 계승과 정책의 운영 그리고 각종 의례의 준비와 진행과정 등을 철저하게 기록하고 후대에 참고하는 기록정치를 행했다

왕조를 개창하면서 태조의 선조부터 그 후손들의 계보를 정리해 왕실의 안정을 도모했고

조선왕조실록 · 국조보감 등 통치에 대한 기록을 남겨 후대 왕들의 모범으로 삼았으며 각종 의례에 대한 기록인 「의궤」를 통해 왕조의 전통을 계승시켰다

이러한 기록들은 국왕이 선정을 펼치는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왕실의 전통성을 표방하고 왕의 통치이념을 드러내는 기능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국보 제151-3호)

「조선왕조실록」은 제1대 태조부터 제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왕들의 행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700여 권에 달한다

국왕이 승하하면 역사 편찬기관인 춘추관에서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사관이 평소에 기록해 둔 사초와 각종 자료를 모아 실록을 편찬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매일매일 국왕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한 것으로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였으며, 사관은 기록에 공정성을 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초초 · 중초 · 정초의 세 단계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된 실록은 중앙과 지방의 사고에 각각 봉안하였고 이후 정기적으로 바람을 쏘여(포쇄 曝曬) 관리하였다

 

 

 

 

실록각(實錄閣) 현판 / 1897 · 광무 1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중 경북 봉화의 태백산사고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조보(朝報)

조보는 조정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에 기록하여 반포하는 관보이다

내용은 국왕이 내리는 명령과 지시, 유생과 관료들의 건의인 소장과

사회 · 자연 전반에서 발생한 특이한 현상들인 기문기사(奇聞奇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국조보감

「국조보감」은 역대 왕들의 통치행위 중 후대 왕들이 본받을 만한 훌륭한 정치를 추려서 모은 것이다

조선의 국왕은 실록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국조보감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실제 정치에 참고하였다

세종 대에 처음으로 국조보감을 편찬하려고 했지만 완성하지 못했고 1458년(세조 4)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 4대 왕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이후 숙종 · 영조 · 정조 · 헌종 대에 집중적으로 편찬되었으며 1909년(융희 3) 헌종과 철종의 국조보감까지 총 90권 28책을 완성하였다

편찬이 끝나면 각 왕의 신주와 어보 · 어책과 함께 종묘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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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편찬과정을 기록한 의궤(1909년 · 융희 3)

헌종과 철종의 국조보감 편찬에 관한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1908년(융희 2) 7월 진종 · 헌종 · 철종에 대한 황제 추봉을 마치고 헌종과 철종의 국조보감을 편찬하였다

 

 

 

 

세종 임금의 국조보감과 함

국조보감은 세종 대에 처음 편찬 계획을 세워 1458년(세조 4)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의 사조보감을 간행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발행되어 1909년(융희 3) 헌종과 철종의 국조보감까지 총 90권 28책을 완성하였다

 

 

 

 

국가행사의 규범, 의궤

의궤는 국가와 왕실에서 진행된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 형식의 왕실기록물이다

조선에서는 혼례 · 장례 · 탄신의례 등 각종 행사를 치를 때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했고, 행사가 끝나면 의궤청에서 의궤를 편찬하였다

의궤에는 국왕의 결정사항, 관청 간에 주고받은 문서, 담당자와 장인의 명단 등 행사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사에 사용되는 각종 물품과 반차도 등을 그림으로 묘사하여 글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세부 상황을 이해하기에 용이하다

의궤는 조선 초부터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의궤만 전해지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의 화성행차(원행을묘) 의궤(정리의궤) / 1795년 · 정조19

1795년(정조 19) 윤2월에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임시기구인 정리소를 설치하여 준비하였기 때문에 정리의궤라고도 부른다

 

 

 

 

화성성역의궤 / 1801년 · 순조 1

1794년(정조 18) 1월부터 1796년(정조 20) 8월까지 진행된 수원 화성의 축조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화성 축조 직후 바로 의궤 편찬을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801년(순조 1) 9월에 금속활자본으로 발간되었다

 

 

 

 

왕세자가례도감의궤 / 1882년 · 보물 제1901-3호

순종이 왕세자 시절 민태호의 딸 순명황후를 간택하고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는 의식을 기록한 의궤이다

1881년(고종 18)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행되었던 왕세자의 가례절차와 각종 도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종묘개수도감의궤 / 1726년 · 영조 2

1726년(영조 2)에 종묘 정전을 수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개수도감에서 편찬하였다

 

 

 

 

철인왕후 국장도장의궤 / 1880년 · 보물 제1901-3

철종비 철인왕후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국장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철인왕후가 승하한(고종 15) 5월부터 국장이 끝난 9월까지의 진행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 / 1905년 · 보물 제 1901-3호

1903년(광무 7) 11월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국장의 진행과정과 재정의 출납, 인력의 동원과 사용한 제기 및 의장까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화성행차 / 1795년 · 정조 19 · 복제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수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 행차를 통해 왕권을 견고히 하고 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음력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의 화성 행차는 반차도 · 그림 · 병풍 · 의궤 등 다양한 기록물로 전한다

반차도는 행렬의 대열과 순서를 빠짐없이 그린 것으로 사전에 왕의 검토를 거치게 하였다

주요 행사를 그린 기록화 8첩 병풍은 여러 벌 제작하여 화성 행차의 전말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필사본인 기존 의궤와는 달리「원행을묘정리의궤」는 금속활자인 정리자로 글씨를 찍고, 목판으로 그림을 찍어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하였다

 

 

 

 

정조의 화성행차 행렬 / 1794년 · 정조 18 · 복제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거동할 때 행렬을 묘사한 두루마리 채색도이다

행사에 참여한 문무백관이 임무와 품계에 따라 차례대로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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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그림에서 정조의 사친 혜경궁 홍씨가 탄 「자궁가교」를 중심으로 확대한 것이다

 

 

 

 

조선왕실의 족보

왕실의 족보는 왕과 친인척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왕비의 가문 및 종녀, 부마, 서얼까지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은 왕위계승 분쟁을 막고자 자신의 후손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족보체계를 마련했다

직계 조상만을 다룬「선원록」과 적자를 기록한「종친록」 · 종녀(宗女)와 서얼을 기록한「유부록」을 편찬했고

숙종 대에는 기존의 족보를 종합해 왕실의 모든 후손을 6대까지 기록한「선원계보기략」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전주 이씨 대동보인「선인속보」와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기록한「돈녕보첩」, 왕비 가문의 직계를 다룬「왕비세보」등이 있다

 

 

 

 

숙천제아도 중 종친부 / 1839~1878 · 하버드옌칭연구소 소장

종친부는 조선시대 왕실 족보의 관리와 왕가 · 종실 · 제군의 인사 등을 처리하던 관청이다

 

 

 

 

선원록아문(璿源錄衙門) 현판

선록청은 선원록을 만들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 여기에 걸었던 현판이다

 

 

 

 

선원보략수정의궤 / 1776년 · 영조 52

선원보략을 수정할 때의 사실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 의궤는 분량이 적지만 숙종 · 영조 대의 선원 계보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선원록 / 1681년 · 숙종 7

국가에서 관리하는 조선왕조의 족보이다

왕실 직계 자손에 관한 인적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했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숙종 대 기존의「선원록」 · 「종친록」 · 「유부록」을 종합하여 왕의 모든 후손을 6대까지 조사하여 기록한 족보이다

 

 

 

 

선원속보(璿源續報)

고종 대 간행된 조선왕실의 종합 족보이다

「선원계보기략」에 이어 전주 이씨를 모두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조선의 중앙관청

조선시대 중앙 관청으로는 의정부 · 육조 · 승정원 · 삼사 등이 있었다

의정부는 최고의 기관으로 주요 사안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알리는 역활을 했다

육조는 실무를 담당하던 6개 관청으로, 이조는 문관의 인사, 호조는 인구조사와 세금, 예조는 국가의 의례와 교육

병조는 무관의 인사와 국방, 형조는 형벌과 소송 관련 업무, 공조는 산림 · 건설 · 수공업 등을 담당하였다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왕명의 출납을 관장한 곳이다

삼사는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을 일컸는 것으로 각각 관료의 규찰 · 간쟁 · 왕의 자문을 담당했는데, 행정기관을 견제하면서 권력의 편중을 막았다

 

 

 

 

조선의 관직체계

조선시대의 관제는 크게 문반(동반)과 무반(서반)으로 나누어지고 문무반은 다시 중앙과 지방의 직으로 구분되었다

관료는 음서로 임명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과거를 통해 선발했고 모든 관리는 관리의 위계인 관품에 의해 정1품에서 종9품 18품계로 구분되었다

각 관아도 최고위 직임자의 품계에 따라 높고 낮음이 있었다. 18개의 품계 중 종6품 이상은 각각 상하로 나뉘었다

특히 정1품에서 정3품 상(上) 사이의 관원은 당상관이라고 하여 국정을 입안 · 집행하는 최고급 관료였다

정3품 하(下)에서 종6품까지는 참상관이라고 하여 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관료였고, 정7품 이하 참하관은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료였다

 

 

 

 

의정부인 / 1894년 · 고종 31

의정부는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형정(形政) · 노비 · 경제 · 군사 · 의례 · 복제 · 입법 등의 모든 국사를 총괄한 기관이다

의정부인은 의정부의 공문서에 사용되었던 인장이다

*

위쪽 왼쪽부터 이조지인 · 호조지인 · 예방판서지인 · 병조지인 · 형방판서지인

 

 

 

 

대전통편 / 1785년 · 정조 9

1785년 정조의 명으로 이전의 법령집들을 통합하여 편찬한 것으로 「경국대전」이후 300년 만에 발간된 통일 법전이다

김치인 등 당대 대표적인 문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덕무 · 박제가 등 규장각 검서관들이 서적의 간행과 인쇄를 감독하였다

 

 

 

 

대전회통 / 1865년 · 고종 2

조선시대 최후의 통일법전으로「대전통편」이후 영의정 조두순 · 좌의정 김병학 등이 80년 간의 수교, 각종 조례 등을 보강하고 첨부해 정리한 것이다

이전(吏典) · 호전 · 예전 · 병전 · 형전 · 공전의 6권 5책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필서하호조(御筆書下戶曹) / 1734년 · 영조 10

호조에 걸었던 현판으로 씀씀이를 절약하여 재력을 축적하고 공물을 고르게 배정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전교 / 1799년 · 정조 23

정조가 신하들에게 전교한 내용을 다시 베껴둔 것으로 연경(지금의 베이징 北京)에 가는 사신들에게 하유하는 내용이다

두루마리 첫 부분에는 "기미칠월십육일"이라 적혀있어 1799년 7월 16일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실도서관 내부 모습

조선시대 왕실 도서의 수집과 정리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기관은 규장각이다

정조에 의해 규장각 제도가 완성되었을 때는 국내서적 약 1만여 점 · 중국서적 약 2만여 점으로 약 3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부속으로 봉고당 · 서고 · 열고판 등을 두고 봉고당에는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 · 서고에는 국내서적 · 열고판에는 중국서적을 나누어 보관하였다

정조 이후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고종 대에는 약 4만여 점을 소장한 도서관으로 서양 문물 관련 자료를 수집 · 연구하였다

1908년 규장각을 비롯한 여러 기관의 소장 도서 10만여 점은 「제실도서」로 통합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결국 규장각이 해체되면서 조선왕실의 도서들은 조선총독부의 관리 아래로 들어갔다

1928년에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로 귀속되었다

 

 

 

 

문흥정책의 노력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선택하면서 글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다

건국 초부터 문물제도의 정비, 지식의 보급 등 국가 통치를 목적으로 다양한 도서들을 편찬하고 수집하였다

조선에서는 왕을 도와 유교적 문치주의 국가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 · 홍문관 · 규장각 등의 학술 연구기관을 운영하였다

세종 대에는 새로운 유교국가의 틀을 만들기 위해 기존 집현전을 확대하여 연구기관으로 확대하였는데 연구와 토론을 통해 정책 고문 기능을 수행하였다

세조 대에는 홍문관이 집현전의 기능을 계승하였으며 정조 대에는 규장각이 설립되어 '조선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문화중흥을 이끌었다

 

 

 

 

조선시대의 공신 · 공신목록 · 과거제도

 

 

 

 

조선시대의 공신

공신은 국가와 왕실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진 칭호이다

태조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개국공신 칭호를 내린 것을 시작으로 반란 등을 평정하여 공이 있는 자들에게 공신의 칭호를 사여하였다

그 결과 총 28차례 공신이 배출되었으며, 공의 크기에 따라 정공신 · 원종공신의 칭호가 내려졌다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칭호 · 토지 · 노비 등이 지급되었고

임금을 모시고 단결을 맹세하는 공신회맹제와 잔치가 열렸으며, 공신교서 · 초상화와 같은 징표가 수여되었다

또한 자손에게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오르는 음직을 주는 등 최고의 포상과 특권이 수여되었다

 

 

 

 

이형좌명원종공신녹권 / 1411년(태종 11) · 보물 제1657호

태종이 이형에게 수여한 좌명원종공신녹권이다

좌명원종공신은 태종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직접 공을 세운 좌명공신 다음으로 공이 있는 이에게 내리는 칭호이다

 

 

 

 

조선왕조 역대 공신 목록

 

 

 

 

이성윤위성공신교서 / 1613년(광해군 5) · 보물 제1508호)

이성윤에게 내린 위성공신교서이다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왕세자이던 광해군을 호종하는데 공을 세운 자에게 내린 것으로 총 80명이 책봉되었다

*

조선 중기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 · 호는 매창이다

성종 임금의 4대손으로 위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지만

영창대군의 처형 및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대해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타계하였다

 

 

 

 

관리의 등용문 · 과거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고려의 과거제를 개편하여 발전하였다

조선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 · 무관을 뽑는 무과 · 전문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세 가지가 있었고

문과의 경우 다시 생원 · 진사를 뽑는 소과와 관료를 뽑는 대과로 구분되었다

음서에 의해 관료가 되기도 했으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서는 고위 관직에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입신의 방법이었다

과거의 종류에는 정기시 · 부정기시가 있다

정기시는 식년시라고도 하며 문과의 경우 33명을 선발하였고, 부정기시의 경우 국가의 경축이나 필요에 따라 행해져 선발 인원과 지역이 일정하지 않았다

*

홍패 / 1869년(고종 6)

이동춘의 무과(武科) 병과(丙科) 합격증서이다

홍패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에서 문과와 무과의 마지막 시험(3차 시험)인 전시 합격자에게만 주어진 합격증서로

전시(殿試)는 합격자들의 등급을 결정하는 시험이다

 

 

 

 

과지 / 1679년(숙종 5)

유생 오세추가 과거시험 때 제출한 시험 답안지이다

「무오식년사마방목」에는 오세추가 35세에 합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사화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종이꽃이다

대오리(대나무) 2개를 종이로 감아 비틀고 꼬아서 군데군데에 색깔 꽃종이를 꿰었다

 

 

 

 

평생도 어사화 부분 /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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