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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고궁박물관 제9실(왕실의례)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

조선의 국왕과 왕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3개 층 · 10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의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전시유물을 교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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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1층 제9전시실은 《왕실의례》 전시실이다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한 조선은 예(禮)를 기초로 사회질서를 지키면서 백성과 즐겁게 화합하고자 하였다

국왕은 길례(吉禮) · 흉례(凶禮) · 군례(軍禮) · 빈례(賓禮) · 가례(嘉禮) 5가지로 예제를 정비해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더불어 일생 동안 단계에 맞는 예를 행하고 효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다

의례를 치를 때는 절차마다 연주되는 음악부터 기물 · 음식 · 복식에 이르기까지 각종 형식을 제도에 맞춰 행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였다

 

 

왕실의례 전시실

유교의 예법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조선 국왕이 일생동안 몸소 배우고 실천한 다양한 의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 제9실이다

 

 

 

 

왕의 삶과 함께한 의례

조선의 국왕은 일생에 걸쳐 관례 · 입학례 · 혼례 등 다양한 의례를 경험하고 주관하며 예를 몸소 익히고 실천하였다

왕의 모든 생활은 예에 기반을 둔 절차와 의식에 따라 행해졌다

또한 국가 통치의 일환으로 조회 · 대사례 · 잔치(연향 · 宴饗) 등 각종 의례를 행해

 상하 간의 질서를 확립하고 신하 · 백성들과 서로 소통하며 국가적 화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왕실 잔치에 사용된 여러 가지 기물

왕실 잔치는 참석자에 따라 왕이 왕세자 · 종친 · 문무백관을 초대하는 외연과 왕대비나 왕비가 가족과 친인척 · 내외명부를 초대하는 내연으로 구별된다

잔치의 주인공 뒤에는 일원오봉도 · 십장생도 등 병풍을 세우고 앞에는 잔치의 규모와 주인공의 신분에 맞는 음식상을 차렸다

잔치가 밤에 이루어질 때는 홍등 · 유리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등을 설치해 불을 밝혔다

꽃으로 장식한 항아리와 용 문양 촛대(용촉) · 은으로 된 기물 등은 잔치의 분위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다

 

 

 

 

왕실의 잔치

조선 왕실에서는 왕과 왕비의 생일 · 세자의 탄생이나 책봉 등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에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잔치는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한편 왕실 가족, 왕과 신하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수단이었다

잔치 뒤에는 전국의 노인이나 빈민들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거나 세금을 줄여주는 등 백성을 구휼하는 활동을 하였다

노인들을 위해 양로연을 열어 귀천을 따지지 않고 효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잔치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왕과 백성이 서로 화합하고 함께 즐기기 위한 자리였다

 

 

 

 

왕과 신하의 활쏘기 대회, 대사례

조선시대에 활쏘기는 예(禮)와 악(樂)을 연마하는 방도이자 정신수양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져 매우 중시되었다

왕은 신하와 함께 활쏘기 대회를 치르며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화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대사례 외에도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의례인 조회, 매일 아침 행하는 약식 조회인 상참 등

다양한 의례를 거행해 군신 간의 질서와 화합을 다지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예궁

대사례와 같은 국가 의례 때 사용했던 활이다

조선의 활은 탄성이 강해 시위를 풀었을 때 활이 거꾸로 뒤집힌 모양이 되어 사용할 때는 반대 방향으로 굽혀 시위를 걸어야 한다

무소뿔과 향나무 · 소 힘줄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궁대와 시복

활과 화살을 넣어 어깨에 메도록 만들어진 집이다

활과 화살을 넣으면 일부가 밖으로 나와 꺼내기 용이하게 제작되었다

세종실록 권133 「오례」 군례서례에 궁대와 시복의 그림(도설 圖設)이 있으며 진연 · 진찬 의궤에 활과 화살을 넣는 도설이 보이기도 한다

 

 

 

 

시복

 

 

 

 

국조속오례의서례

조선 초 예제 정비를 위해 편찬한「국조오례의」 이후 조선 후기 영조 대까지 변화되거나 새롭게 추가된 의례를 정리한「국조속오례의」의 서례이다

 

 

 

 

왕실의례를 장엄한 의장

궁궐 내에서 조회, 잔치 등을 열거나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는 가마와 의장이 함께하여 왕실의 존엄을 드높였다

왕의 가마인 연은 용 · 기린 · 백택 등 상서로운 동물로 치장하고

의장기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자연물 · 동물 또는 문자를 그려 넣어 왕의 훌륭한 통치를 나타냈다

의장물은 창 · 도끼 · 칼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군사적 힘과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한편 신선만 사용했다는 선(扇) · 산(傘) 등은 행차에 신성함을 더하였다

 

 

 

 

황룡기

조선시대 국왕의 의장에 사용된 오방기 중 하나로 황색의 용을 그려 중앙을 상징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행렬에서 중앙 가장 앞에 조선 후기에는 둑과 교룡기 다음에 배치되었다

 

 

 

 

일기 · 월기

삼족오로 해를 표현하고 토끼로 달을 표현한 깃발이다

대한제국기 의장기에는 이처럼 천문성수를 그려 넣어 천명을 받은 황제의 나라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1901년「신축진연의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축기

왕이 행차할 때 사용된 의장기로 부적문을 그린 육정기 중 하나이다

「국조오례의서례」에 따르면 흑색 바탕에 신(神)의 형상을 그리고 아래쪽에 소의 머리를 그렸다

 

 

 

 

청룡기

조선시대 국왕의 의장에 사용된 오방기 중 하나로 청색의 용을 그려 동쪽을 상징하였다

행렬에서 홍문대기 뒤 좌측 두 번째 열에 배치되었다

 

 

 

 

삼각기

왕이 행차할 때 사용된 의장기로 흰색 바탕에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는 삼각수(三角獸)를 그렸다

삼각수는 세 개의 뿔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행렬에서 백택기 뒤에 배치되었다

 

 

 

 

기린기

왕세자 · 왕세제 · 왕세손의 의장에 사용된 깃발로 상상의 동물인 푸른 기린을 그렸다

기린은 용의 머리에 뿔이 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발굽이 있는 짐승으로 표현된다

성군이 태여날 때 그 전조로 나타난다고 여겨진다

 

 

 

 

가마의 종류

 

 

 

 

조선시대에 대비 ·  ·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이 행차 때 탔던 정식 가마이다

지붕 · 몸체 · 가마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이 분리가 되게 만들어졌다

주칠을 한 몸체에는 금니(金泥)로 용 · 백택 · 기린 등의 문양을 그려 장식했다

네 면에 주렴을 드리우고 검은 휘장을 달아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가교

조선시대에 왕 · 왕세자 혹은 왕실 어른이 장거리 행차 때 탔던 가마이다

가마채를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고 가는 형태로 화성행차시에 사용했던 가교가 이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주칠을 한 몸체는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 다양한 길상문(吉祥文)을 새겼고 창은 겹창으로 지붕에서부터 검은 비단 휘장을 내려 창문을 가렸다

 

 

 

 

수원능행도(水原陵行圖)

정조 19년(1795)은 정조의 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던 해로

이해 2월 정조는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지금의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하여 성묘를 하고

화성행궁에서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께 진찬례(進饌禮)를 올렸다

이 병풍은 이 때 거행된 행사들 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뽑아 8폭으로 나누어 그린 기록화이다

 

 

 

 

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부분

수원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시흥행궁으로 향하던 도중 혜경궁 홍씨에게 미음 다반을 진상하기 위해 멈추어 선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국왕 행차시 행렬의 구성 그림과 어가행렬 의장물

은등자 · 금등자 · 은장도 · 금장도 · 백호당 · 청룡당 등의 의장물이 전시되어 있다

 

 

 

 

국왕 행차시 행렬의 구성 그림 중 어연 부분

 

 

 

 

어가행렬 의장물 그림

 

 

 

 

의례를 통한 효의 실천

효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국왕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왕과 왕실 가족의 죽음과 관련한 의례 · 조상을 섬기는 제례에서 잘 나타난다

통치자의 죽음이자 부모의 죽음인 국상은 나라의 큰 슬픔으로 여겨졌다

엄격한 절차와 장중한 분위기에서 치렀으며 어떤 의례보다 오랜 기간 동안 거행했다

선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국가 제사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중요한 의례였으며

왕릉에서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치러 조상에 대한 효를 다했다

 

 

 

 

왕의 장례식 · 국장

국장은 3년 간 70여 가지의 절차에 따라 치러졌기 때문에 여러 개의 임시 관청(도감 都監)이 설치되어 업무를 분담하였다

빈전도감은 승하한 후 시신을 수습하여 관(재궁 · 梓宮)에 모시는 일 산릉도감은 장지를 물색하여 능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국장도감은 새 왕의 즉위와 돌아가신 왕의 발인을 혼전도감은 장례 후 혼전에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일을 맡았다

국장은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명릉도(1757년 이후)

숙종과 인현왕후 ·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을 그린 산릉도이다

마지막으로 승하한 인원왕후의 능이 그려져 있어 1757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 / 1864년 · 보물 제1901-3호

철종의 무덤인 예릉 터를 물색하고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예릉 조성 당시에 설치되었던 구조물 및 정자각 · 비각 · 재실 등 왕릉 건축물의 도설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예릉은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 위치하며 1878년 철인왕후가 승하한 뒤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철종국장도감의궤 / 1864년 · 보물 제1901-3호

1863년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 철종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국장의 진행과정과 소요 재정 · 사용한 제기 및 의장의 정보와 참고 그림인 도설 · 왕의 행차를 그린 반차도가 실려 있다

 

 

 

 

철종빈전혼전도감의궤 / 1865년 · 보물 제1901-3호

철종의 국장을 거행하는 여러 기구 중 빈전혼전도감에서 준비하고 거행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빈전혼전도감은 국왕의 승하를 확인한 후부터 초상 절차와 제사를 주관하고 관을 모시는 빈전 · 신주를 모시는 혼전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했다

 

 

 

 

종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향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왕실의 근본이자 정통성의 기반이었다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사건은 모두 종묘에 고했으며

국왕은 종묘제향을 올려 선왕의 공덕을 기리며 왕조의 번영과 영속을 기원함으로써 유교적 통치이념을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승하고자 하였다

종묘는 17세기에 중건된 이래 온전하게 유지된 유교적 왕실 사당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 종묘제례와 제례악은 2001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의궤 / 1706년

종묘와 종묘 제례에 관한 내용을 종합한 책이다

국조오례의 · 국조속오례의 등의 의례서와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 등록 등의 기록물에서 종묘와 관련된 부분을 채록해 편찬했다

 

 

 

 

종묘개수도감의궤 / 1726년

1726년에 종묘 정전을 수리해 4칸 증축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개수도감이 설치되어 전체 공사를 총괄하고 위궤를 편찬했다

개수의 논의 과정에서부터 구체적인 진행 과정까지의 방대한 정보를 담았다

 

 

 

 

제관의 복식

국가의 제사를 진행하는 제관들은 검은 색 겉옷 아래 흰색 초로 만든 옷(중단 中單) 등을 갖춰 입고 제관을 썼다

신분에 따라 제관에 부착된 금줄(양 梁)의 개수가 달라졌다

 

 

 

 

제관

 

 

 

 

제복

 

 

 

 

중단

 

 

 

 

종묘친제규제도설 병풍

상단에 종묘의 주요 건물과 이곳에서 행해지는 행사 · 제례를 위한 상차림 등의 그림을 그리고 하단에 절차 · 규정 등을 자세히 기술한 병풍이다

 

 

 

 

생갑과 조

 ·  · 돼지와 같이 제물로 올리는 가축(희생 犧牲)의 고기를 담는 제기인 생갑과 생갑을 올려 놓는 상인 조이다

신에게 음식을 올리는 궤식 절차에서 희생의 삶은 고기를 생갑에 담아 바치는데 이 절차는 국왕이 친제할 때만 행한다

 

 

 

 

향로 · 향합

향로는 향을 태운 연기로 천상의 혼을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제기이다

신관례 때 초헌관은 향로에 향을 세 번 나누어 사르는데 왕이 친히 나서는 제사에서는 왕이 초헌관을 맡는다

 

 

 

 

용찬 · 찬반

신관례시 울창주를 담아 관지통에 부을 때 사용하는 제기인 용찬과 용찬을 받치는 찬반이다

술을 땅에 붓는 의식은 그 술 내음을 따라 지하의 백(魄)이 신주에 임할 수 있도록 불러오는 역활을 한다

 

 

 

 

 ·

작은 신에게 술을 올릴(헌작 · 獻爵) 때 사용하는 잔으로 참새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데에서 그 명칭이 붙어졌다

점은 작을 바치는 판인데 제상에 올릴 때 점위에 작을 놓는다

 

 

 

 

축판 · 문진

축판은 축문을 올려두는 판으로 주로 나무에 검은 칠을 하여 만들었다

축문은 초헌관이 첫 술잔을 올린 후 읽었으며 바람에 날리지 않게 놋쇠로 된 문진으로 눌러 제상의 서편에 놓았다

 

 

 

 

번간로 · 서직비

신에게 익힌 고기를 바치는 궤식 절차에 마지막에 쑥(소 蕭) · 메기장 · 찰기장(서직 黍稷), 희생의 기름을 화로에 넣고 버무려 숯불에 태운다

이때 사용된 화로와 서직을 조금씩 덜어낼 때 사용된 숟가락인 서직비이다

 

 

 

 

종묘 제향을 위한 음식 · 제수

종묘 제향은 짐승의 고기와 피를 바치는 혈식의 제사로 소 ·  · 돼지가 중심 제물이었다

희생으로 쓰이는 가축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정결하게 키운 것으로 제사상에는 희생의 털과 피 · 생고기와 삶은 고기, 고기를 삶은 물을 올렸다

희생 외에도 기장과 수수 등의 곡식 · 땅과 물에서 난 다양한 산물로 만든 각종 음식을 차렸다

 

 

 

 

종묘 신실

종묘는 하나의 건물을 여러 칸의 신실로 나누어서 여러 신주를 함께 모신 곳으로

지금의 정전에는 19개의 신실에 왕과 왕비 신주 49위가, 영녕전에는 16개의 신실에 34위가 있다

신실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주장이, 좌우에는 책장과 보장이 있다

신주장 앞에는 제례를 지낼 때 신주를 옮겨 모시는 신탑이 있는데 그 위로 신주 뒤에 놓이는 궤가 있다

신실 앞에는 노란 명주천으로 만든 면장을 드리웠고 각 신실 사이에 격렴을 내려 공간을 구분하였다

제례를 지낼 때에는 신실 앞에 제상을 차리고 양쪽에 선 · 개 등의 의장물을 세웠다

 

 

 

 

종묘 제향을 위한 그릇 · 제기

제기는 종묘에서 제사 음식을 마련하고 바치는 데 사용한 그릇이다

제기의 형식은 역대 예제를 참고하여 법식을 정해, 조상을 모시는 데 잘못이나 모자람이 없도록 하였다

종묘 제상에는 고기를 담는 조와 생감 · 땅과 물의 산물을 담는 변과 두 · 고기를 삶은 국물을 담는 등과 형 · 곡식을 담는 보와 궤 등이 올라갔다

준소에는 이 ·  · 뢰 등의 항아리가 계절별로 문양과 형태를 달리하여 올라갔다

제기는 낡거나 파손되어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땅에 묻거나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준소

신실 밖에는 제례 때 사용되는 명수와 술이 담긴 항아리를 올린 준소가 놓였다

준소에는 5종의 술항아리 8개가 계절별로 종류를 달리하여 올라갔다

봄 · 여름 제사에는 계이 · 조이 · 상준 · 희준 · 산뢰가 사용되고 가을 · 겨울 제사에는 가이 · 황이 · 착준 · 호준 · 산뢰가 사용되었는데

각 항아리에 담기는 술의 종류도 정해져 있었다

 

 

 

 

궁중 음악

궁중에서는 조회나 잔치, 제례, 왕의 행차 등 각종 의례가 행해질 때마다 그 절차에 맞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제례 때는 제례악에 맞추어 줄지어 추는 춤(일무 佾舞)을 추었고, 각종 잔치에서는 정재(呈才)를 공연했다

조선시대 궁중 음악은 예와 악의 조화로 자연의 이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

유교에서 예는 자연의 이치를 절차로 만들어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악은 마음의 성정을 자연과 화합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악은 음악 · 노래 · 무용을 의미하며 사람을 감동시키고 풍속을 바르게 변화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윤리와 도덕을 붇돋우는 데 활용되었다

 

 

 

 

편종

16개의 작은 종을 두 단에 엮어 놓았다는 뜻에서 '편종'이라 부른다

망치로 종의 아랫부분 가운데에 둥글게 튀어나온 수를 쳐서 연주한다

종의 크기는 모두 같고 두께로 음의 높낮이를 조절한다

중국의 제례악을 연주하는 아악기 중 하나로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한 각종 의례에 두루 사용되었다

 

 

 

 

진고

국악기 중 가장 큰 북으로 나무 막대 끝에 천을 감아 만든 채를 이용하여 서서 친다

중국의 제례악을 연주하는 아악기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국가 제례 때 사용되었다

 

 

 

 

엎드린 호랑이를 형상화한 타악기로 음악의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호랑이 등줄기에 있는 27개의 톱날(서어 鉏鋙)을 대나무 채로 긁어 연주한다

중국의 제례악을 연주하는 아악기 중 하나로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한 각종 행사에 두루 사용되었다

 

 

 

 

상자 모양의 몸체의 바닥을 막대(止)로 내려쳐 연주하는 타악기이다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역활을 하며 음악의 끝을 신호하는 악기인 어와 짝을 이룬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행한 각종 의례에 두루 사용되었다

 

 

 

 

절고

상자 모양의 받침대(방대 方臺) 위에 북을 비스듬히 올려놓은 형태의 타악기이다

중국의 제례악을 연주하는 아악기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세종 대 이후 문헌 기록에 처음 등장하였다

주로 종묘와 문묘제례에 사용되었다

 

 

 

 

철제대금 · 철제금은입사대금

가로로 부는 관악기로 일반적으로는 대나무로 만들어지나 철로 제작한 것으로 보아 연주용이 아닌 의례용으로 보인다

두 대금 모두 표면에 실제 악기와 같이 대나무 마디를 표현하였다

금은입사대금은 금과 은으로 당초 · 학 문양을 입사했다

 

 

 

 

궁중 정재

정재는 '재주를 바친다'는 의미로 의례 때 공연되었던 음악과 노래 · 춤이 어우러진 종합공연예술이다

조선 왕실은 잔치에 음악과 노래 · 무용을 함께 올려 신하 · 백성과 더불어 즐기고자 했다

정재는 대체로 기존의 전해오는 선율에 새로운 노랫말과 춤을 얹는 방법으로 창작되었는데 국왕의 장수 · 왕조의 번영을 바라는 내용이 많다

「헌선도」는 한 개만 먹어도 천 년을 살 수 있다는 복숭아를 국왕께 올리는 내용이며

「봉래의」는 조선 왕조의 개국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의 가사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한 것이다

민간에서 유행하던 연희를 궁중 잔치에 올리기도 하였는데 「선유락」이나「검기무」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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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모니터에서 나오는 헌선도이다

 

 

 

 

왕실의 혼례

왕실 혼례는 관례 · 입학례 등과 함께 경사스러운 의례인 가례에 속한다

국왕이나 왕세자의 혼례는 왕실의 가계를 잇고 어른을 모시며 국왕의 외치를 도와 내치를 할 국모를 정하는 일로 국가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다

조선 왕실은 왕비 후보를 간택한 후 청혼하고 왕비로 책봉한 후 궁으로 모셔오는 등의 절차마다 최고의 예를 갖추었다

 

 

 

 

왕비를 맞이하는 절차 · 육례

 

 

 

 

원삼대

원삼을 입을 때 가슴에 띠는 대(帶)로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뒷면에는 '정유맹추길례시 저동궁고간 이뉴사'라 적혀 있다

저동궁은 덕온공주가 거처하던 공주궁의 명칭이고 덕온공주 혼례가 정유년에 행해졌다는 점에서 덕온공주 혼례를 위해 제작된 원삼대로 보인다

 

 

 

 

도투락댕기 · 앞댕기

혼례용 큰 댕기인 도투락댕기와 이와 짝을 이뤄 매는 앞댕기이다

도투락 댕기는 다홍색 비단에 한 쌍의 봉황 ·  · 석류 · 박쥐 · 수복 · 부 자 등을 금박으로 찍었고

앞댕기는 다홍색 비단에 금박 무늬를 찍고 댕기 양 끝에 구슬 장식을 달았다

 

 

 

 

진주선 수본

진주선에 수를 놓기 위한 본으로 기름을 먹인 종이에 매화가지와 대나무 잎을 먹으로 그렸다

'경술신조 진주선'이라는 묵서가 있어 경술년에 이루어진 혼례용 부채를 위해 제작한 수본임을 알 수 있다

 

 

 

 

동자상

왕실 혼례 절차 중 왕과 왕비가 술과 음식을 함께 먹고 부부가 되는 의식인 동뢰연에는 옥동자 한 쌍을 두었는데 이때 사용된 옥동자이다

표면에 채색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고종 · 명성황후 가례도감의궤 / 1866년 · 보물 제1901-3호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백자도 병풍 / 19세기 말~20세기 초

화려한 궁궐 정원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이 다양한 놀이를 하는 장면을 그린 병풍으로 자손의 번성과 아이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실 혼례 때 왕비나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성이 임시로 머물던 별궁에 백자도 병풍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종비 선의왕후 세자빈 책봉 옥인 / 1718년

경종의 계비인 신의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은 옥인이다

세자빈의 상징물로 옥인과 죽책을 받는데 거북 모양의 손잡이의 옥인에는 '왕세자빈지인'이 새겨져 있다

 

 

 

 

경종비 선의왕후 세자빈 책봉 죽책 · 교명 / 1718년

경종의 계비인 신의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은 죽책 · 교명이다

교명은 일종의 임명 문서로서 세자빈을 위한 교훈과 경계의 글이 담겨 있다

 

 

 

 

국왕의 통과의례

조선의 국왕은 대체로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어

성균관 입학례 · 성인식인 관례 · 혼례 등의 통과의례를 거치며 유교 국가 수장으로서 위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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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관례

관례는 성인으로 인정 받는 의식이다

사가에서는 보통 15~20세에 관례를 치렀으나 왕세자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고자 다소 이른 나이인 8~14세에 관례를 행하였다

관례 의식의 핵심은 관례 의복을 세 번 바꿔 입는 삼가인데 매 단계마다 상급의 관을 씌워 그에 걸맞는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왕세자의 관례에서는 마지막 단계에 면복을 입어 장차 왕위를 계승할 것을 나타냈다

왕세자는 관례를 거쳐 성인 · 더 나아가 왕이 될 재목으로 인정받고 성장해 나갔다

 

 

 

 

관례홀기

관례 의식이 진행되는 순서 및 내용을 기록해 놓은 문서이다

 

 

 

 

수교도(19세기)

왕세자의 관례를 그림으로 표현한 13폭 화첩이다

일반적으로 관례는 종묘에 관례 시행을 알리면서 시작해 관과 의복을 세번 바꿔 입는 의례(三加)

술 마시는 의례, 이제까지 부르던 이름을 대신해 자(字)를 지어 부르는 의례 등의 주요 행사를 거쳐

관례를 주관한 빈객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왕 · 왕대비를 뵙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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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명빈찬

왕이 정전에서 빈 · 찬에게 왕세자의 관례를 행할 것을 명령함

 

 

 

 

삼가 · 회빈객

삼가는 왕세자에게 초가관(익선관) · 재가관(원류관) · 삼가관(면류관)을 씌우는 삼가 의식을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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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빈객은 주인이 빈객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예물을 전달함

 

 

 

 

왕세자의 입학례

입학례는 스승에게 배움을 청해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이다

실제 왕세자의 교육은 성균관이 아닌 시강원에서 이루어졌지만

입학례를 행하여 왕세자 역시 유학을 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미래의 군주인 왕세자도 입학례 때는 학생복인 청금복으로 갈아입고 바닥에 엎드려 수업을 받아 스승과 제자 간의 예를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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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箋文)

영조가 맏아들이자 정조의 양아버지인 효장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조에게 올린 요약본이다

장서각에 같은 내용과 형식의 보관을 위한 부본이 남아 있다

 

 

 

 

왕세자입학도(1817년)

효명세자가 9세되던 해 행했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기록화이다

절차를 적은 의주와 행사 그림 · 시강원 관원의 찬시 · 스승인 박사 남공철의 발문이 실려 있다

왕세자의 자리와 이동 경로를 노란색 직사각형과 길로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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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궁의

효명세자가 입학례를 치루기 위해 처소인 창덕궁에서 나와 성균관으로 향한다

 

 

 

 

작헌의

공자를 비롯한 중국 ·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성균관 대성전에 가서 술잔을 올림

 

 

 

 

입학의

왕세자가 명륜당에서 박사에게 '소학'을 교재로 강론을 들음

박사는 책상을 두지만 세자는 바닥에 책을 두고 홑겹으로 된 자리에 앉아 엎드려서 수업을 받음

 

 

 

 

수하의

입학을 마친 다음날 왕세자가 창덕궁 성정각에서 신하들로부터 축하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