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인천시립박물관 역사2실(조선시대~일제강점기)

인천시립박물관 2층 역사2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인천이 전시되어 있다

 

 

녹청자 제작과정 그림 · 제작 단계별 녹청자

1층 역사1실에서 2층 역사2실로 가는 복도에 전시되어 있다

 

 

 

 

역사실 안내도

조선시대의 인천 · 근대 도시로의 이행 · 일제강점기의 인천 · 근대 인천의 거리

 

 

 

 

조선시대의 인천과 부평 · 조선시대의 강화와 교동

조선 태종 13년(1413)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주(仁州)가 인천군이 되면서 인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나게 되었다

*

강화는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정해졌다가 정묘호란 직후인 인조 5년(1627)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종2품 벼슬의 유수가 부임하였다

 

 

 

 

인천도호부 관아

조선시대 인천도호부에는 부내면 등 10개 면이 속해 있었고 종3품의 도호부사가 수령으로 부임하였다

인천관아는 1914년 부천공립보통학교(지금 문학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대부분 건물이 훼손되었고

지금은 동헌과 객사만 남아 있으나 그마저도 건물의 원래 위치와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역사2실 첫 번째 전시실

조선시대의 인천이 전시되어 있다

 

 

 

 

강화지도 · 화도진도 / 19세기 말

 

 

 

 

인천부사 여이랑 묘갈첩 / 조선 후기

여이랑(1603~1669)은 강화부 경력을 거쳐 1666년 10월부터 1668년 6월까지 인천도호부사로 재임하였다

묘갈은 예문관 제학을 역임한 설봉 강백년이 지었다

 

 

 

 

강도지(江都誌) / 1690년대

조선 후기 인천 출신 문신 병와 이형상(1653~1733)이 저술한 강화읍지이다. 2책 2권으로 채색지도가 첨부된 필사본이다

병자호란 이후 북쪽 오랑캐의 재침 징조가 농후해지자 요충지인 강화도의 수어방략에 중점을 두어 숙종에게 올리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책이다

정치 · 경제 · 역사 · 지리 · 사회 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당시의 군비와 국방책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다

 

 

 

 

인천의 교육기관

고려 · 조선시대 성리학적 실천 정신에 따라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지방에 설립한 관립 교육기관을 향교라 하는데

인천지역에는 인천 · 부평 · 강화 · 교동에 설치 운영되었다

한편 국가에서 건립한 향교와는 달리 학문연구와 성현들의 제사를 위하여 민간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을 서원이라 하는데

인천에는 숙종 34년(1708)에 건립되어 사액을 받은 학산서원이 유일하다

 

 

 

 

인천서원 상량문 및 사액소

인천서원은 인천부사를 역임한 이단상(1628~166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숙종 34) 창건하였다

인천서원이 창건되던 해 정일빈 등 인천유생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학산(鶴山)〉이란 액호를 받았다

 

 

 

 

백패(白牌) / 1852년

1852년(철종 3) 3월 16일 강화의 심락원이 생원시에서 제3등 중 21인으로 입격하여 받은 백패이다

백패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중 소과(小科)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에게 주던 합격증서이다

 

 

 

 

인천의 명족

17세기 들어 오랜 전란이 끝나고 사회가 점차 안정되면서 향촌에서는 같은 혈족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늘어 갔다

그 중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향촌사회에서의 영향력을 높여가면서 대대로 관리를 배출하였던 이른바 명족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조입안

김정후(1794~1866)는 지금의 계양구 노오지동에 살았던 조선시대 효자이다

 

 

 

 

인천 정운오 지석

조선 후기 고종 때의 무관으로 품계가 정3품 절충장군에 이르고 강원감영의 중군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인천부 조동면 만의곡(지금 남구 운연동)에 있었다

 

 

 

 

인천의 인구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1425년 경) 인천 인구는 3,452호에 6211명으로 호당 1.8명으로 인구수가 매우 적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남자만의 수치만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구수로 보면 강화 · 부평 · 인천 중 강화가 제일 많다

 

 

 

 

강화부 주왕달 준호구 / 1894년

고종 31년(1894) 강화부에서 하도면 장곶동에 사는 주왕달에게 발급한 준호구다

준호구는 호적대장에 등재된 사람이 과거 응시와 같은 신분 증명 등에 사용하기 위해 해당 관아에 신청 · 발급 받은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 같은 문서이다

 

 

 

 

영종방영금정묘식장적책 / 1867년 복제

1867년(고종 4) 영종진방어영(永宗鎭防禦營)에서 호구조사를 시행한 후 만든 호적대장이다

원본은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남동 회곽묘 출토 복식

석남동 회곽묘에서 출토된 상의이다

 

 

 

 

서구열강의 침략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의 선박들이 자주 출몰하여 연안의 해안을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하는 등 불법 행위를 자행하면서 침략을 위한 기본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특히 인천 해안은 서울에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서구 함대의 침략 무대가 되었다

 

 

 

 

초지진 군기문서 / 조선 후기

강화도 진무영 소속 13진보 중 하나인 초지진의 군수품 목록을 기록한 문서이다

 

 

 

 

소성진중일지 / 조선 후기

1871년 4월 6일 미국 함선이 인천 앞바다에 출몰하면서부터 5월 23일 퇴각하기까지 48일간의 신미양요 때 인천에서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저자는 당시 인천부사였던 구완식의 조카인 구연상으로 적의 상륙에 대비한 방어준비와 내외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책은 1962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필사한 것으로 원본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는다

 

 

 

 

근대도시로의 이행

인천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이 결정되었으나 실질적인 개항은 1883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역사2실 두 번째 방

근대 도시로의 이행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의 개항

일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하게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따라 인천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되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였으나

도성에 인접한 지리 때문에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요구로 개항장을 설치하였다

 

 

 

 

역관문정수본 및 강화조약 · 강화도조약문(영인본)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당시 조선의 문정관이 조약 체결의 협의 과정을 기록한 문서 및 조약의 초본이다

일본은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朝野)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2개 조의 조일수호조규, 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계의 설정과 운영

조계는 국가간에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만들어진 개항장 내의 일정 구역으로

조계를 설치한 나라는 자국민의 거주와 통상을 위해 일정한 토지를 영구 임대하여 자치적으로 관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제물포항에 설치되었다

 

 

 

 

개항장 인천의 전경 / 20세기 초

 

 

 

 

제물포 각국조계지도 / 1893년

제물포에 설정된 각국조계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해관 지계석

인천 제물포 해관(지금의 세관) 부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 놓았던 표지석이다

 

 

 

 

근대 문물의 전래

제물포항에 도착한 서양인들의 외모만큼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근대문물은 큰 충격을 주었다

 

 

 

 

청일전쟁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청국과 일본이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청 · 일 양국은 조선에서의 공동 철병과 향후 조선에 파병할 경우 서로에게 통지한다는 텐진(天津)조약을 맺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청국은 아산에 파병하면서 이를 일본에 통보하였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인천에 파병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공동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아산만에서 청국군을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 전투를 그린 석판화 · 한청일 주요인물 초상 석판화 · 정한론 석판화

 

 

 

 

제물포해안에 상륙하는 일본군 / 1894년

일러스트레이트 런던뉴스라는 신문에 1894년 제물포해안에 일본군이 상륙하는 모습이 삽화로 실린 장면이다

 

 

 

 

청일전쟁 유리원판 사진 / 1894년

청일전쟁의 모습을 담은 16장의 유리원판 사진첩 중 3번째 사진이다

메이지 27년 9월 12일 야마기타(山縣) 육군 대장이 인솔하는 제1군 운송선 30척 및 유격함대가 인천에 입항하는 장면을 남긴 것이다

 

 

 

 

러일전쟁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린 제국주의 전쟁이다

청일전쟁의 승리 후 조선을 독점하려는 일본의 계획은 러시아가 주도하고 프랑스와 독일이 참여한 삼국간섭에 의해 저지되었고

아관파천을 단행한 조선정부는 친러정권을 수립하였다

또한 러시아가 철도부설권을 확보하여 만주에서의 지배력을 확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하면서 이에 대항하였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뤼순(旅順)항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러시아 군함기

러일전쟁(1904) 당시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서 자폭한 러시아 군함 카레예츠호의 깃발이다

 

 

 

 

러일전쟁 사진집 / 1904년

전쟁 배경과 제물포 · 평양 · 압록강 · 여순에서의 전투로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인물 및 전투병력 · 전쟁 상황이 풍부한 화보로 실려있다

 

 

 

 

개화기의 인천의 경제

근대 문물은 열강들의 무역상사를 통해 개항장으로 유입되었다

서구의 무역상사로는 독일의 세창양행 · 영국의 이화양행 · 미국의 타운센트상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대한천일은행 청원서 · 조선해관 세목 · 신상회사 장정 · 상무협회 규칙

 

 

 

 

인천항 행상

러일전쟁 직후 제물포 부두에서 행상을 하는 조선인의 모습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찍은 사진이다

 

 

 

 

금계랍 / 20세기 초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수입 판매되었던 품목이다

금계랍은 키니네를 염산과 화합시켜 만든 흰 가루로 해열진통제이며

원래 말라리아 특효약이었으나 개화기 조선에서는 학질 · 장질부사 등에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

 

 

 

 

개항장 인천

한 나라의 특정한 지역을 개방하여 외국인의 왕래와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용한 곳을 개항장이라 한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인천에도 개항장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인천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이듬해 2월에는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을 장악할 목적으로 통감부를 설치하고

주요 도시에는 이사청을 두었는데 통감과 이사관은 모두 일본인으로 임명되었다

인천에도 이사청이 설치됨에 따라 감리서는 폐지되었고 이사관에는 인천 영사였던 가토오가 임명되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확대하고 기존의 법령에 새로운 통치법령을 추가하여 식민지적 통치체제를 확립하였다

 

 

 

 

도시기반시설의 확충과 인구의 증가

1914년 조선총독부의 지방 행정제도 개편으로 인천부는 면적 약6.06㎢ · 인구 32,000여 명으로 부세가 크게 축소되었다

 

 

 

 

인천 축항 전경 / (20세기 초

개항과 더불어 인천항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많은 선박이 왕래할 수 있도록 도크를 구축하는 대규모 공사가 실시되었다

일본 기선들은 축항의 갑문을 드나들면서 인천항에서 일제 상품을 풀어 놓고 대신 쌀가마를 실어 날랐다

강제 수탈의 현장이었다

 

 

 

 

인천부 조감도

1929년 요시다 하츠사부로가 그린 인천시가지 조감도다

일제가 식민통치 20년을 기념하는 조선박람회를 개최할 때 인천협찬회에서 간행한 인천 관광안내물에 삽입한 것이다

 

 

 

 

인천 산업과 경제

일제강점기에 인천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만이였기 때문에 일본 자본의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조선인촌 소형 성냥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 10월 인천 동구 금곡동에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인촌공장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에게 공장 설치를 허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한국 시장을 독점하였고

성냥 1통에 쌀 1되라는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

 

 

 

 

강화 장유양조장 사진

일제강점기 강화도에서 간장과 술을 제조하였던 강화장유양조장의 개업기념 사진이다

 

 

 

 

일본의 경제 수탈 인천 미두취인소

청일전쟁 이후 일본 상인들은 인천항에서 유통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1896년 미두취인소를 개설하였다

 

 

 

 

인천곡물두량장 · 인천미두취인소 / 20세기 초

 

 

 

 

인천의 항일 민족운동 · 인천의 노동운동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지금 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4일간 동맹휴업

3월 24일 장날 황어장터에서 약 3천 명이 만세 시위 · 3월 18일 강화 유봉진의 주도하에 6천 명이 만세 시위

*

일제강점기 말 인천의 항일 민족운동은 공장과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였던 인천에는 노동자층이 많았고 또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일본인이었던 만큼

인천의 노동운동은 항일 민족운동의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협궤철도 수인선

수인선은 인천과 수원을 잇는 52km의 협궤철도로 경부철도와 인천항을 연결하자는 인천상공인들의 건의에 따라 1937년 개통되었다

수인선의 부설로 수원과 인천 간의 물적 · 인적 교류는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미곡을 중심으로 한 곡물류와 소금 등이 속속 집하되면서 인천의 경기는 호황을 구가 하였다

 

 

 

 

금파가(金波街)

금파(金波)는 현재 모밀국수를 파는 청실홍실이 있는 건물인데, 일제강점기 때엔 기린맥주 등을 팔던 〈KING BAR (금파)〉가 있던 곳이다

2층 마지막 코스로 기념촬영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