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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우리 선조들의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해외동포들이 뜻을 모아서 2008년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이민사연표

유이민에서 이민으로, 구한말 농민 노동자들이 가뭄과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1902년부터 1905년까지 7,400여 명이 이주하였다

 

 

 

 

국혼가

"춘산에 파초를 바라보게 염목이 청청하여 새 꽃이 피네 삼 년에 덩굴은 마를지라도 겉 뿌리만 성하면 소생하노라'

이민자들은 국혼가 가사처럼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 남으려 노력했다

 

 

 

 

해상교류의 중심지 인천

조영수호통상조약 교섭차 영국 배로 향하는 조선관리들(1882 · 월미도) 사진 등이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집

고종 19년(1882)에 조선과 미국이 국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체결한 것으로 우리나라가 구미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국제도시 인천

1883년 일본의 끈질긴 요구로 인천의 제물포가 개항되자 상해와 일본 등지를 운항하는 상선이

거의 모두 인천에 기항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과 청국 및 서구인들이 속속 밀려들게 되었다

 

 

 

 

국제무역항으로의 발전

인천은 개항 이후 조선 최대의 무역항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전국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일본 및 청국 상인의 활동과 외국 상사를 중심으로 무역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곡물을 수출하고 공산품 · 직물 · 면제품을 주로 수입하였다

 

 

 

 

영국 · 독일(세창양행) 바늘

개항 당시 인천에 수입된 영국 · 독일(세창양행)에서 만든 바늘로 당시 인기가 있었던 신문물 중 하나였다

 

 

 

 

독일(세창양행) 바늘 · 담배 · 금계랍

 

 

 

 

근대문화의 수용과 도시의 변화

개항과 더불어 유입되기 시작한 외래문물은 인천의 사회와 문화를 급격히 변화시켜 갔다

외국인에 의해 근대적인 학교 · 병원 · 교회 등이 설치되고 신문이 발행되었다

호텔 · 영화관 같은 문화 공간이 등장하고 새로운 음식 문화도 확산되었다

천주교와 개신교도 전통적인 종교관을 변화시키며 점차 전파되어 갔다

 

 

 

 

국내 상황 · 하와이 정세 · 이민의 주선

19세기 후반 가뭄으로 인한 굶주림과 임오군란 · 갑신정변 · 청일전쟁 · 러일전쟁 등 불안정한 국내상황과 설탕 수요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지만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 통과와 노동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일본인들을 억제하는 하와이 정세

그리고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국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의 활동이다

그는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고종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황실의 신망을 얻었고

1897년에는 오하이오 주지사였던 친구 내쉬의 강력한 추천으로 미국 공사가 임명된다

한국의 하와이 이민 사업권을 따낸 데쉴러는 내쉬의 양아들이었다

 

 

 

 

개항 당시의 인천항(제물포) 모습

네모 속은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 인천항 갑문 · 인천항 부두 사진이다

 

 

 

 

근대의 외무부, 유민원

고종황제의 승인 직후, 여권 발급 등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할 정부의 공식 기관으로 유민원이 설치되었다

초대 총재는 민영환이다

 

 

 

 

황성신문(1902년 11월 27일자)

유민원에서 이민관련 업무를 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최초의 해외계약이민과 집조(여권) 발행

하와이 행 첫 이민자들은 유민원 총재가 발급한 집조(여권)을 갖고 떠났다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 송출이기 때문이다

 

 

 

 

집조(여권)

1904년 11월 19일 발급된 전라도 창평 거주하던 김만수의 집조다

 

 

 

 

황성신문에 실린 이민 관련 내용 중 1902년 12월 27일자 2면

"포와이민 인항에 재류하는 미국인이 한인의 포와이민을 기획하야 그 모집에 착수하였음을 기보하였거니와

차는 미인 데슈라씨 등이 모집함이라는데 위선 응모한 한인 54명이 본 22일 일본을 경하야 포와로 발향하였다더라"

 

 

 

 

고시

1903년(고종 40년) 8월 6일, 각처에 붙인 하와이 이민자들을 모집하는 광고다

 

 

 

 

존스(1867~1919)

인천내리교회 2대 담임목사였던 존스는 기독교 전파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은 선교사로

인천 · 강화 · 남양 ·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었다

그는 1894년 한국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는 등 교육에도 힘쓴 학자 선교사이기도 하다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 모형

처음 인천 제물포에서 121명이 떠났으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9명 탈락

102명만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보건당국의 검사결과 질병자 16명이 탈락하고 결국 88명만 상륙 허가를 받았다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 승선자들과 그들의 유품들

갤릭호를 탄 이민자들의 분포를 보면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교동포함)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나머지 6명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지역이 86명(84%)으로 이민 모집 초기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리교회 존스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에 인천 출신이 많았다

 

 

 

 

실제 갤릭호를 타고 이민을 간 함하나 할머니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배 속에서 배 기름 냄새하고, 소와 말을 넣어서, 소말 냄새가 나고.. 구역질이 나고

밥을 먹으라고 빠기가 땡땡이를 땡땡땡 치면 다른 사람들은 가서 밥을 가져와 먹는데 나는 구역질이 나고..."

 

 

 

 

하와이 이민자 명단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는 명단, 64회에 걸쳐 이주한 총 7,415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905년 하와이에는 약 65개의 농장에 5천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농장에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생활했다

 

 

 

 

정착생활

농장에는 가족과 독신자를 위한 두 종류의 숙소가 있었다

결혼한 부부에게는 정원이 있는 통나무집이 제공되었고 독신 남자들은 긴 기숙사식 건물에 서너 명씩 살았다

한인들은 물가가 비싸고 음식이 생소하여 숙소 근처에 채소를 심어 자신들의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었다

식사는 주로 공동 취사장에서 나무로 된 긴 탁상과 의자에 앉아서 했다

 

 

 

 

방고(신분증 · 번호라는 뜻의 일본어)

노동자들이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던 일종의 인식표였다

이를 근거로 월급을 받았다

 

 

 

 

사진신부

혼기를 훌쩍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 문제는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아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장이를 통해 약 700여 명 정도의 사진신부들이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다 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이로서 본격적인 초기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역활

교회는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였다

1903년 호놀룰루에서 정기적인 예배가 시작되어 1905년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가 에바농장에 세워졌다

1918년 말 이승만이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자 많은 교인들이 한인기독교회로 모였다

따라서 감리교회와 한인기독교회는 각각 하와이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양대 종교 조직으로 형성 발전하였다

 

 

 

 

미국 본토 곳곳에 뿌리 내린 한인사회

 

 

 

 

새로운 문화와의 융합

한인사회가 성장하면서 2세대들이 20~30대에 이르게 되자 이들의 생활 방식은 부모 세대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민 1세대가 교회와 각종 단체를 중심으로 고국의 독립운동에 주력했다면

2세대는 친교 모임을 통해 화합을 다지고 한인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해 연극, 음악, 회보 발간을 통한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쳐 나갔다

 

 

 

 

여성들의 사회활동

초기 이민사회 여성들은 신명부인회의 사회활동과 항일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대한부인구제회를 조직하여 내조자의 역활뿐 아니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적극 이끄는 주체로서 당당히 활동했다

 

 

 

 

다양한 경제활동

하와이 한인 농장 노동자는 1910년에 이르러 반으로 감소하였는데 호놀룰루와 미국 본토의 도심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인종차별 속에 비숙련 노동자로 종사하였지만 1920년대부터는 숙련노동자와 사무직 종사자가 증가하고 직업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서 미국 이민이 진행되었던 일본이나 중국에도 없는

자국민 학교가 우리나라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되어 자국의 문화를 전수하며 현지 학문도 함께 배웠다

 

 

 

 

광복 이후 미주 한인사

 

 

 

 

1991~현재

2006년 1월 13일 제1회 미주한인의 날 첫 공식행사가 열렸다

 

 

 

 

멕시코 초기 한인사

1905년 새로운 삶을 찾아 1033명의 한인들은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이역만리 낯선 멕시코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이민 중계인에 의한 단 한 차례로 끝난 대규모 불법 노동이민이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와 난생 보지도 못한 에네켄 밭이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한인들은 1909년 5월, 4년간의 노동계약이 끝나고 해방될 수 있었다

 

 

 

 

멕시코의 아시엔다 제도

아시엔다 제도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에 유산으로 농장주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동력은 주로 채무 노예에 의존하는 등 봉건적 성격이 강했다

 

 

 

 

에네켄

선인장과에 속하는 용설란의 일종으로 에네켄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을 묶어 선박용 로프나 마대용 자루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멕시코 후기 한인사

광복 이후 한인들의 멕시코 이민은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67년 장기철이 유학을 갔고 1968년 미국에 거주하던 문대원이 태권도를 보급하며 정착했다

1969년 원단공장 기술자로 서동수가 이주하면서 이곳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991년 비자면제협정이 맺어지면서 한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현재 한인의 수는 15,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국민회 메리다지방회

미국에 있는 대표적인 한인 단체인 국민회는 멕시코 동포들의 참상을 듣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황사용과 방화중을 선정하여 멕시코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한인들을 위무하는 한편 국민회의 취지를 설명하며 이곳 메리다에 지방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로써 계약 만기를 3일 앞둔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가 창립하게 되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1909년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한인들은 채무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립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조국은 일제에 강제 합병되어 돌아갈 수도 없었으며 멕시코 현지에서는 내란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들 중 288명이 생존을 위해 1921년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민자들로부터 기증받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형 성경책과 묵주(쿠바 · 1902년)

 

 

 

 

산업화 · 세계화 속의 이민

 

 

 

 

브라질 · 아르헨티나

 

 

 

 

브라질 한인사

브라질 최초의 이민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귀화했던 제일 교포들이었다

 

 

 

 

아르헨티나 한인사

아르헨티나 최초의 한인 이민자는 6 · 25전쟁으로 인한 반공포로들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1962년 한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면서 시작되었다

 

 

 

 

파라과이 · 칠레 · 볼리비아

 

 

 

 

파라과이 한인사

브라질 · 아르헨티나 다음으로 많은 동포가 거주하며 경제 활동과 한국 문화 전승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다

 

 

 

 

칠레 · 볼리비아 한인사

칠레의 이민은 1969년 원예사 가족 여섯 세대의 이주로 시작되었다

볼리비아 이민은 대부분 제3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볼리비아를 경유하면서 이루어졌다

 

 

 

 

대한인국민회

 

 

 

 

미주한인사회에서의 독립운동

1919년 3 · 1운동 이후 미주 한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첫째는 외교 및 선전활동의 전개이고 둘째는 독립자금의 모금이다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귀향

이것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보관문서에 나타난 승객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1903년 1월 13일부터 1905년 8월8일까지 총 64회에 걸쳐 7,400여 명이 태평양을 건너갔다

 

 

 

 

세계속의 대한인

전 세계 각국으로 진출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해외 동포가 7백만 명이다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상징 민족대학 인하대학교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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