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 유일의 전쟁사 종합박물관으로
대외항쟁사와 국난극복사 등 이땅의 모든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 · 보존하고
전쟁의 생생한 교훈을 통해 전쟁을 예방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6 · 25전쟁 조형물
6 · 25탑은 청동검과 생명나무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청동검은 유구한 역사와 상무정신을 표현하고 생명수는 한민족의 화평과 번영을 상징한다
6 · 25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
창군기 · 6 . 25전쟁 · 월남전쟁 · 대침투작전에서 전사한 국군장병 및 경찰관들과
6 . 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유엔군 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추모의 공간이다
군과 사단별로 있다
진북
건군 60주년을 기념하여 광복 이후 지나온 60년을 바탕으로
미래의 60년을 다짐하며 선진강군에게 미래로, 세계로의 출정을 명령하는 국민들의 뜻이 담겨져 있다
호랑이 문양은 용맹스러운 우리 군의 강한 모습을 재현한 것이며
북에 둘러진 도자는 순국선열의 호국의지를 계승하기 위하여 전국 대학생 국토 순례단원들이 수집한 전적지의 흙과 물로 빚었다
호국의 별
나라를 지켜낸 수 많은 호국영령들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영웅들이 호국의 별이 되어 영원히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전사자 명부
잠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유엔군 전사자 명부 · 국군 전사자 명부
호국추모당의 조형물 창조
천정의 태양광선이 한반도를 의미하는 반구 중앙의 샘솟는 물과 만나 창조를 표현, 민족의 영원성을 상징하고 있다
조형물 창조를 지나 고조선부터의 전쟁역사를 읽으며 내려간다
고려~일제강점기 · 광복~6·25전쟁 · 휴전~베트남파병의 전쟁역사가 있다
돌살촉
신석기시대 무기다
돌칼(마제석기 · 신석기시대)
돌도끼(청동기시대)
간돌검(마제석기 ·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 무기다
한국식동검(초기철기시대)
고구려와 수의 전쟁 - 살수대첩 기록화
영양왕 23년(612)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하였다가 후퇴하는 수나라 별동대 30만을 살수(청천강)에서 크게 물리친 전투 그림이다
별동대 30만 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2,700여 명에 불과했다
수가 망하고 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 - 살수대첩
삼국시대 전쟁사 연표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현재 서울)을 함락시키고 한강 일대를 차지하였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 안시성전투 기록화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삼아 645년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 장군은 군민과 혼연일체가 되어 60여 일간 치열한 격전으로 당군을 격퇴하였다
백제 전성기 전쟁
371년 근초고왕의 백제군대는 고구려를 평양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칠지도
일본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물로 전해온 길이 74.9cm의 백제칼이다
몸체 앞뒷면에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을 통해 백제가 왜와의 관계에서 우위임을 알 수 있다
"선세 이래 이미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의 왕세자 기생성음이 왜왕 지를 위하여 만들었다. 후세에 전해 보아라"
칠지도 몸체 뒷면 명문 내용이다
가야의 투구
무게가 얼만진 나와있지 않으나 오래 쓰면 목디스크 걸리겠다
신라의 삼국통일
660년 백제 멸망 · 668년 고구려 멸망
신라와 당의 전쟁 - 매소성전투 기록화
문무왕 15년(675) 신라는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거의 섬멸시켰다
이 전투를 계기로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와 당의 전투 - 매소성전투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청해진 설치
당에가서 군인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던 장보고(?~846)는 신라에 돌아와 흥덕왕 3년(828)에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1만의 해군을 주둔시켜 당의 해적을 소탕하였다
나아가 당 및 일본과 활발히 무역을 전개하여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신당서
'신당서' 권 145 열전 동이에 실려있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
일본 엔닌이 당나라에 구법하러 가서 얻은 견문을 담은 기록으로
엔닌의 입당과 순례 여행이 신라인의 도움에 의존하였던 사정들도 곳곳에 언급하고 있다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들의 활약상에 관한 귀중한 자료다
후삼국시대의 전쟁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현재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900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신라 왕족의 후예인 궁예는 송악(현재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901년)
궁예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 뒤 실정을 거듭하여 그의 신하였던 왕건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역사상 새로운 왕조인 고려가 건국된 것이다 (918년).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함화4년 비상(咸和四年 碑像 · 발해)
함화4년(834) 허왕부(許王府) 조문휴의 어머니가 조성한 비로 발해왕 밑에 허왕(許王)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발해와 당의 전쟁 - 천문령전투
발해는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이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세운 나라다
대조영의 발해 건국은 당의 영주(현재의 조양)지방을 탈출하면서 그를 추격하는 당의 군대를 말갈족과 연합하여 천문령에서 크게 무찌르고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전쟁사 연표
고려의 여진(금) 정벌
1107년(예종 2) 윤관은
별무관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면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이 전시는 조선 후기 간행된 '북관유적도'의 '고려척경입비지도(高麗拓境立碑之圖)'를 통해
윤관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고려의 국경을 표시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고려와 몽고(원)의 전쟁
1231년(고종 18) 몽고의 고려 침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몽고의 침략은 1270년 무인정권이 무너지기까지 여러차례 계속되었다
강화도의 고려정부는 고려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별행하면서 저항하였지만 결국 1270년 몽고와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고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고려와 몽고(원)와의 전쟁 - 처인성전투 기록화
1232년(고종 19) 12월 처인성(현재의 용인)에서 승장 김윤후가 몽고 살리타이를 격파한 전투다
살리타이는 500여 명의 기병으로 처인성을 공격하였으나 승장 김윤후가 승병과 백성들의 힘을 합쳐 몽고군을 물리쳤다
삼별초 대몽항쟁
고려는 1231년(고종 18) 몽고의 침략을 받아 40여 년 동안 세계 역사상 드문 참화를 입게 되었다
당시 무인정권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쟁의 의지를 굳건히하였다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하에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유격전술로 몽고의 침략에 대항한 삼별초는 장기전을 펴기 위하여 진도로 옮겨 저항을 계속하였다
고려 · 몽고연합군의 진압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삼별초는 김통정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항몽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민의 항몽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투쟁이었다
진포해전 · 대마도정벌
1380년(우왕 6) 8월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금강 하구 진포로 쳐들어왔으나
최무선의 노력으로 개발된 고려군의 화포사격으로 왜구의 대부분은 불에 타 죽거나 바다에 뛰어 들었다
고려군은 진포해전을 승리함으로써 왜구와의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진포해전 · 대마도 정벌
조선시대 군사제도와 연표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개국한 조선왕조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 당하기까지 519년간 지속되었다
조선의 무과제도
무관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시험은 고려말부터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실제 무과가 실시된 것은 조선 태종 2년(1402) 이었다
조선시대 무과에는 문과와 같이 3년마다 1번씩 실시하는 식년시가 있었는데 보통 무과라 하면 이를 지칭한다
식년무과는 식년문과와 같이 초시, 복시, 전시 3단계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식년 전해 가을에 치르고 복시는 식년 봄에 병조에서 초시 합격자를 서울로 불러모아 병조와 훈련원 주관아래 28명을 선발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전시를 치러 갑과 3인 · 을과 5인 · 병과 20인의 등급을 정하였다
병학지남
중국의 기효신서를 요약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 병서다
조선시대의 활 · 화살
조선시대의 타격무기
타격무기는 상대를 타격하여 살상하는 가장 단순한 무기라 할 수 있다
이들 무기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타격무기로는 도끼 · 곤봉 · 차복 · 편곤 · 마상편곤 · 철퇴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화약병기
우리나라 화약병기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고려 숙종 9년(1104)이나 우왕 3년(1377) 최무선에 의해 화통도감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발달을 보이게 된다
이후 문종 때에는 화차 · 선조 때에는 승자총통이 개발되었다
세총통(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화차
유물로 본 무기 변천
예도(조선시대) · 창포검(조선시대)
별운검(조선시대) · 운검(조선시대)
사인검
임금이 병마를 지휘하는 장수에게 주던 검으로 인년(寅年) · 인월 · 인일 · 인시(새벽 3시~5시)에 만들어졌다
북두칠성과 같은 별자리나 주문 등 다양한 상징 문양이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 초기 조선은 일본군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져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큰 위기를 맞았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과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불리한 전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명나라 군도 지원함에 따라 더욱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휴전을 제의하였으나 일본측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1597년 일본은 재차 공격했으나 조선군과 명군에 의해 저지됨에 따라 전쟁이 끝났다
이순신의 교지
징비록(조선시대)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적이다
진주대첩
1592년 10월 진주성에서 목사 김시민 이하 진주성민이 왜군 2만여 명의 공격에 맞서 거둔 승리다
왜군의 공격은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되었으나 진주성민과 외곽지역 의병들의 활약으로 저지되었다
이 승리는 조선군이 지상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로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다
진주대첩
행주대첩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 휘하의 조선군이 왜군 3만여 명의 공격을 격퇴하고 거둔 승리다
이 승리는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조선군의 사기를 올렸으며 한성 수복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임진왜란에서의 의병활동
초기 관군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 팔도 각지에서 전직 관료와 명망있는 유생은 물론 승려와 천대받던 노비까지 분연히 일어나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최초의 의병활동은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화약병기의 발달
화기의 발달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이 증대되어 조총 · 블랑기 · 호준포 등의 새로운 형태로 발전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도 일시적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발전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봉수
횃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으로써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봉수가 처음 실시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되나 기록상으로는 고려 의종 3년(1149)이다
그 후 조선 세종 때에는 제도로써 거화법과 전국의 봉수 노선을 확정하였다
봉수
그 설치지역에 따라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로 구분되며 경봉수는 중앙의 봉수로 한성의 목멱산(남산)에 위치한 봉수를 말한다
연변봉수는 국경지대에 설치된 연대를 말하며 내지봉수는 연변봉수와 경봉수의 중간지역에 위치하여 신호를 연결해주는 봉수다
조선시대의 호패
명패(조선시대)
왕이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을 부를 때 사용하던 패
스페인
우리와는 1950년 3월에 국교를 수립한 이후 여러 분야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밖에 영국,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여러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소개한다
대한제국 군복
1897년 5월 15일 육군복장규칙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러한 신식 군복은 1895년(고종 32) 4월 9일 칙령에 의해 최초 육군 훈련대의 보병과 장교들만 착용하였으나
같은 해 9월 5일에는 칙령 제165호로 육군 모두에게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 복장은 1907년 8월 군대 해산과 1909년 7월 군사부의 폐지로 사용치 않게 되었다
의병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의병전쟁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의병의 구성원은 대부분 반봉건,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띤 농민, 천민층이었으며 초기의 의병활동은 산발적인 지역적, 개별적 투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민긍호, 이강년 등이 지휘하는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자
의병전쟁은 조직적이면서도 지속적인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의병가(1878~1914)
안중근 의사 친필 '장부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날에 지어 쓴 장부가로 "장부의 기개로써 독립의 대업을 달성하겠다"는 내용이다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은
청산리 일대(중국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삼도구)에서 3,000여 명으로 일본군 동지대 5,000여 명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3,000여 명(일본측 자료 812명)을 살상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임병찬 의병장
거북선 (1 : 2.5비율)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며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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