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잃어야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인터넷으로 걷기길을 검색하다 알게된 길로 코스가 10코스까지 있다
그 중 1코스를 걸었는데 코스 안내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서 거의 길을 개척하며 걸었다
원당역 1번출구
시점이다
문헌공고봉기선생숭모비 ·덕양서원묘정비
행주기씨 대종중(幸州奇氏大宗中)
행주기씨의 연원은 약 3,000여 년전인 기자조선을 개국한 문성대왕 기자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자의 47대손 마한왕 기훈에게는 우성, 우량, 우평 등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왕조가 기울자 그들은 부왕으로부터 각각 기(奇), 한(韓), 선우(鮮于)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백제, 신라, 고구려 등으로 떠났다
통의문(通義門)
기우성은 백제 온조왕에게로 가서 시중의 자리에 올랐고, 행주산성 및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곳은 오늘날까지 2000여 년 동안 행주기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이로써 기우성은 행주기씨의 득성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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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재(德陽齋) 삼문이다
덕양재(德陽齋)
기우성의 후손들은 신라, 고구려에도 널리 퍼지고 고려에 이르러서도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 인종(1122~1146) 시대에 이르러 문하평장사를 지낸 기우성의 65대손 기순우가 행주기씨의 중시조(족보 1세조)로 기록되었으며
오늘날 행주산성 내성리에서 태여난 그의 6대손 손녀가 바로 원순제의 황후인 '기황후'이다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주기공신도비
(贈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判義禁府事 幸州奇公神道碑)
정무공 청백리 현암선생기건신도비
배다리술박물관 앞에서 삼성래미안아파트로 가는 토끼굴이다
삼성래미안아파트 담장을 끼고 산길을 오른다
산길을 잠시 걸으니 성사체육공원에서 올라오는 걷기길과 만난다
이곳에서 맞은편 산길로 걸었다
폐역이된 원릉역과 삼릉역 사이 철길이다
항상 평행일 것 같은 철길도 산모퉁이를 돌며 하나가 된다
원당삼거리 옆 건널목이다
원래 코스는 성사건널목에서 산으로 들어야 하는데 우린 철길을 따라왔다
장의중 효자정려각(고양시 향토유적 제59호)
장의중(1821~1895) 묘소 아래 30m 지점에 1905년 9월 고종이 하사한 「효자 학생 장의중 지려」 정려와 효자문이 있다
장의중 효자정려각 내부
장의중 묘
장의중은 구한말의 효자로 병석에 누우신 어머리를 위해 손사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했다 한다
이러한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고종으로부터 정려와 효자문을 하사받았다
정려각을 지난 산길에서 만들었다
도로공사로 끊어진 산길을 지난다
조선시대 종2품 가정대부 묘
조선시대 종2품 가정대부 묘
묘 위로 올라와 보니 비석의 글자는 마모되어 보이지 않지만 차돌봉 줄기가 보인다
정충문(精忠門)
충의제 삼문이다
충의제(忠義齋)
조선 제3대 태종대왕의 증손자이며 정충적개공신이신 율원군 이종 공의 부조지전으로 제향을 받들기 위한 제실이다
율원군사당 제실 삼문
율원군은 세종 15년(1433)에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3자 보성군의 제2자로 출생했다
고려 공양왕릉(사적 제191호)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 재위 1389~1392)과 왕비 순비(順妃)의 능이다
공양왕은 재위 4년만에 고려가 망하면서 폐위되어 원주에 추방되어 공양군으로 봉하여졌고
삼척에 옮겨져 그곳에서 태조 3년(1394) 춘추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태종 16년(1416) 공양왕으로 추봉되어 '봉릉(封陵)'이라 하였다
봉릉(封陵)
왕과 왕비 쌍릉 형식으로, 석물로는 비석 1좌씩과 석상이 놓였고, 장명등이 1좌,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 1필이 있다
비석은 봉릉 당초의 것으로 보이며, 왕릉 중간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비가 서 있다
병풍석, 난간석 등이 없는 간결한 왕릉이다
봉릉(封陵)
봉분과 고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보인다
봉릉과 공양왕 안내판
"공양왕은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제20대 신종의 6대손인 왕요를 찾아 왕위를 맡긴다
결국 그는 2년 8개월만에 고려가 아닌 조선의 왕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게 된다
공양왕은 이성계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을 예감하고 궁궐을 탈출해 남쪽으로 내달렸다
사방이 캄캄해졌을 때 산 저쪽에 불빛이 보여 살펴보니 절이었다
문을 두두리니 한 스님이 나와 왕의 행색을 살피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찌하여 천하의 주인이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셨는지요?
하지만 쫓기는 임금을 숨겨주었다가는 자칫 화를 입을 수도 있어
스님은 공양왕에게 저희 절은 위험하니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한 누각에 가 계시면 저희들이 매일 수라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공양왕은 그 누각으로 날라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그리하여 식사(食寺)리의 명칭이 유래하게 되었다"
문혜대빈정청주양씨단 · 세종왕자 수춘군 묘 가는 길 안내판
따뜻한 햇살이 빛나는 봉릉 앞 잔디에서 이동식을 하고 탄약대대 우측 철책을 끼고 걷는다
탄약대대 철책
탄약대대 언덕을 오르니 리본이 많이 매달려 있다
탄약대대를 지나 견달산으로 가는 길이다
일산 방향
광목장 앞 공사장에서 봤다
광목장
이곳에서 왼쪽 견달산 방향으로 걷는다
견달산 숲길을 오른다
하지만 고봉누리길 안내목은 광목장을 통과하라고 가르키고 있다
견달산 군부대 훈련장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곳이다
성석천
군부대 훈련장과 문봉낚시터를 지난 곳이다
고봉산
고봉이란 명칭은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봉은 고구려 이후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일산과 송포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고양'이란 이름이 만들어질 당시에 고봉에서 '고'자를 따고 덕양에서 '양'자를 딴 것이다
이전마을회관 · 성석동 진밭 두레패(고양시 향토문화재 제42호)
일산동구 성석동 고봉산 자락에 위치한 진밭마을의 전통 두레패 농악이다
이 두레패가 자리한 진밭마을은 고려,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오래된 마을로
논과 밭 그리고 자연촌락 형태의 마을이 남아 있어 두레패가 보존될 수 잇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송서재(松西齋)
함종어씨양숙공파종중회(咸從魚氏襄肅公派宗中會) 안내판이 걸려 있다
양숙사 함종문(襄肅祠 咸從門)
어세공(1432~1486) 선생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이다
공의 호는 송서(松西)이고 휘는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봉조하 어효첨의 둘째 아들로 태여나
형 좌의정 어세겸과 함께 문과에 급제(1456)하여 승지, 한성판윤, 경기도관찰사, 공조, 병조, 호조판서 겸 세자좌빈객을 역임하였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함경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어 정충출기적개공신으로 책훈되어 아성군으로 봉해졌다
고양누리길 안내판
양숙사에서 고봉산 방향으로 잠시 오르면 있다
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퇴천성공 휘 담명 지묘 증 정부인 강릉김씨부좌
성담명(成聃命) 부부 묘
고양 고봉누리길 안내판
고봉산 기슭을 걸을 때 해는 산너머로 기울었다
수연약수터
이곳 벤치에서 이동식을 하며 남은 거리를 확인했다
해가 저물었기 때문이다
고봉누리길 안내판 있는 계단을 오른다
고봉산 만경사
이곳은 차가 오를 수 있는 도로가 있다
안곡습지공원
만경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오른쪽 산길을 따라 돌아 나오니 앞쪽에 있다
증산성당
증산성당 아기예수 탄생 · 성모마리아상
산들대림아파트 버스정류장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7.5km, 소요시간 7시간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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