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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발해)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 장군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조영이 말갈장수 '걸사비우'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당과의 전투에서 걸사비우가 죽고 걸걸중상도 무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 중 죽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698년 길림성 동모산 부근에 나라를 세우고 「진(震)」이라 했다

그 후 조영은 자신의 성을 '대'씨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발해만까지 뻗어나가라는 의미에서 〈발해〉로 고쳤다

 

 

발해

발해(698~926)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만주 동모산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전성기의 발해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海東天國)로 칭송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으며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다

 

 

 

 

발해 강역과 교통로

 

 

 

 

발해의 토기

발해의 토기는 크게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나누어진다

고구려계(우측)는 흑색이나 회색을 띠며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표면이 매끈하며 고구려의 토기와 닮았다

말갈계(좌측)는 적갈색을 띠며 낮은 온도에 구운 것으로 아가리 부근에 덧띠무늬가 부착되기도 한다

 

 

 

 

토제인물상, 골제장식판, 뒤꽂이(남북국시대(발해) 연해주 8~9세기)

발해 사람들은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해 담비나 표범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귀족들은 당나라나 일본에서 들여온 비단옷을 입었는데 지위에 따라 옷차림이 달랐다

일반 사람들은 대개 움집에 살았지만 왕족이나 귀족들은 녹색 유약까지 바른 화려한 기와를 올린 저택에서 살았다

이 밖에 각종 도구와 무기, 장식품 등은 주로 철이나 청동 등 금속으로 만들었는데 건축 양식처럼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대외교류와 문자

발해는 당과 서로 견제하면서도 당의 선진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는 한편 신라에는 발달된 문화를 전해 주기도 하였다

 

 

 

 

일본 헤이조교 출토 목간

발해사 목간 · 초피 목간 · 맥인급미 목간 · 견고려사 목간(남북국시대(발해) / 헤이조교 8세기)

일본 나라현 헤이조교에서 발견된 발해 관련 목간으로 글자 중에

발해사, 교역, 맥인, 발해의 특산품인 초피(貂皮)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발해와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견 고려사 목간'에는 758년 발해 사신 양승경과 함께 발해에 갔다온 일본의 오노다모리 일행을 특진시킨다는 내용이다

발해에 보낸 사신을 '견고려사'라고 하여 발해를 고려(고구려)로 칭하고 있다

 

 

 

 

중대성첩 사본(남북국시대(발해) · 841년)

함희 11년(841) 발해 중대성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의 필사본이다

발해와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짐승 얼굴 기와(남북국시대(발해) / 헤이룽장성 8~9세기)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길게 내민 혀 벌름거리는 코 등 사납고 험삼궃은 짐승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짙은 녹색 유약까지 입혀져 더욱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다

 

 

 

 

치미(남북국시대(발해) / 헤이룽장성 8~9세기)

진한 녹색 유약을 발랐으며 두 날개는 새의 깃을 표현하였다

날개와 몸통 사이 7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머리가 꽃모양으로 생긴 장식을 맞추어 넣었다

 

 

 

 

발해의 불교

발해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던 것은 불교였다

 

 

 

 

글씨가 있는 불비상(남북국시대(발해) · 834년)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듣는 승려와 보살이 있다

위에는 용으로 보이는 2마리의 동물이, 아래에는 글씨와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함화 4년(834) 발해 허왕부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허왕(許王)이 관할하던 관청이 있었고 그 허왕 위에 황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머리(남북국시대(발해) · 헤이룽장성 8~9세기)

건물 기단에 끼어 넣어 장식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깎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팠다

 

 

 

 

용머리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의 도성에서 몇 개 출토되었지만 형태와 조각 기법은 모두 같다

 

 

 

 

발해의 건축

수막새와 벽돌(남북국시대(발해) / 연해주 8~9세기)

발해 건물터에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한민족 특유의 난방시설인 구들이 있어서 발해 건축 양식이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준다

 

 

 

 

수막새와 암키와(남북국시대(발해) / 지린성 1165(2) · 1174 · 1176)

 

 

 

 

발해의 도성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상경, 중경, 동경, 서경, 남경의 5경을 두었다

 

 

 

 

해동성국 발해 연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