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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다시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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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313년 평양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강에서 지린성 · 쑹화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으로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화, 음악,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환런(桓仁), 지안(集安)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성, 무덤, 궁궐터, 집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장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왜(일본)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불꽃 맞새김무늬 관(금동 · 고구려 5~6세기)

 

 

 

 

글자가 새겨진 벽돌

지린성 지안의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된 벽돌이다

이 무덤들은 대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무덤 위쪽에 기와를 이은 건물을 세웠거나, 무덤을 지키는 사람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돌은 무너진 돌무지 속에 기와와 함께 섞여 있었으며, 한쪽 면에는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吉祥句)가 새겨져 있다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 연꽃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강서대묘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에 있다. 삼묘리에는 3개의 흙무지돌방무덤이 삼각형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는데

제일 남쪽의 가장 큰 무덤이 강서대묘이다

강서대묘 무덤 안의 돌 벽면에 사신도가 있다. 고구려 무덤 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사신 중 현무

널방 북벽 현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현무는 거북을 감은 형상으로 거북이와 뱀이 마주 보면서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고구려의 무기 / 투겁창과 물미

고구려 군사력의 주요한 바탕은 우수한 제철 기술로 만든 강력한 무기에 있었다

실제 출토된 철제 무기들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의 강철과 같이 단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고구려 415년)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임진강 유역과 양주 분지 일원, 한강 하류역, 금강 유역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 옛 절터에서 흙으로 만든 많은 소조불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가부좌로 앉아 배 부분에 손을 깍지 낀 선정인 자세의 부처와 시무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한 보살 입상들이다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이다

 

 

 

 

못신

고구려 금동신발은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지안 삼실총과 통구 12호분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 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연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발은 실제 사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의례용이나 껴묻거리로 보인다

 

 

 

 

백제의 건국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온조의 형인 비류와 함께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하였다(기원전 18)

 나라 이름은 십제(十濟)라 하였으며 그후 백제(百濟)로 고쳐 불렀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 한산(漢山) 아래로 위례성 주민을 옮겼는데 한성의 위치는 풍납토성 · 몽촌토성 등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몽촌토성에서는 대형 집자리 · 제사 관련 건물지 · 도로 등이 확인되어 초기 백제 도성의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

 

 

 

 

생산 기술의 혁신

 

 

 

 

대부(大夫)가 새겨진 항아리(백제 4~5세기)

풍납토성에서는 '대부(大夫)'가 새겨진 항아리와 '정(井)'이 새겨진 항아리가 출토되었는데

고구려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대부정(大夫井)'이 새겨진 토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는 중국에서 관리를 일컫는 말이며 '정'은 벽사의 의미가 있는데 기우제와 같은 제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모(金銅冠帽)

금동관모는 신분을 상징하는 꾸미개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주로 출토된다

이러한 형태의 금동관모는 공주, 서산, 천안, 익산, 나주, 고흥 등 백제 영역뿐만 아니라 가야와 일본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금동관모는 금동신발, 중국도자기 등의 고급 물품과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들은 백제가 마한의 세력을 통합해 나가는 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금동신발(金銅飾履 · 전북 고창 봉덕리 1호무덤 · 백제 5세기)

백제 중앙 정부는 흡수 통합한 지역의 수장들에게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중국도자기 등을 내려주며 협조와 충성을 요구하였다

고창 봉덕리 1호 무덤 4호 돌방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용무늬와 봉황무늬가 투조된 것으로서 이 무덤이 고창지역 최고 수장층 무덤임을 보여준다

 

 

 

 

관 꾸미개(왕비) / 金製冠飾 · 백제 공주 무령왕릉 6세기 · 1971년 발굴 · 국보 제155호

왕비의 관꾸미개는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가 대칭형의 구도로 표현되어 있고 달개는 달려 있지 않다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령왕릉

웅진기를 대표하는 제25대 왕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으로 공주 송산리고분군에 위치한다

이 무덤은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졌다

무덤은 벽돌로 쌓아 만든 벽돌 무덤으로 내부에서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4,6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중국 남조와 관련된 것이나 신라 · 왜와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도 있어 백제 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준다

관 꾸미개(冠飾)나 귀걸이 등은 백제 고유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백제 문화의 독창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귀걸이

 

 

 

 

목걸이

 

 

 

 

웅진에서 사비로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재위 523~554)은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겨 국가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사비 천도 이후에도 불교를 장려하고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영토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비기에는 한성기부터 축적되어 온 백제의 문화가 절정기에 이루렀는데, 예술과 종교에서는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다

 

 

 

 

 

사비도성

사비 도성은 왕궁을 중심으로 남쪽에 동서-남북 방향의 도로가, 방어성인 부소산성이 배후에 위치하며, 도성의 바깥은 나성(羅城)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성의 내부는 중 · 상 · 하 · 전 · 후부의 5부(部)로, 부는 다시 항(巷)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부의 존재는 전부(前部) 등 행정구역 명칭이 새겨진 돌과 기와 · 목간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왕궁은 부소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관북리 추정 왕궁터에서는 대형 건물터 · 도로 · 저장고 시설 등이 확인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회백색의 토기는 크기가 일정하게 통일되어 있어 사비기의 규격화된 토기 생산 모습을 보여준다

 

 

 

 

회백색 토기

 

 

 

 

햇살가리개살 꼭지 / 충남 부여 부소산성 · 백제 7세기

 

 

 

 

백제의 익산 경영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백제 문화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왕으로

익산 지역에는 왕궁리 유적 · 쌍릉 · 미륵사지 · 제적사지 등 무왕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의 천도설과 관련된 곳으로 주목 받고 있는데, 이 유적은 처음에는 왕궁으로 조성되었다가 뒤에 사찰로 바뀌었다

쌍릉은 7세기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부장된 나무널은 무령왕릉 나무널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었으며 널 꾸미개도 화려하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세워진 사찰로 삼국 제일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은 사비지만, 익산은 백제 왕실이 멸망하기까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던 지역이다

 

 

 

 

백제의 불교문화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원년(384) 중국 동진에서 전래되었다

또 백제의 불교문화는 왜에 전해져 일본 불교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꾸미개

꾸미개는 신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기능 외에도 신분을 나타내기도 한다

백제의 지배층은 각종 꾸미개를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은제 관꾸미개와 허리띠장식 등이다

은제 관 꾸미개는 은판을 길게 오려 줄기를 만들고 꽃봉오리를 장식한 것으로 부여의 능산리고분을 비롯하여 논산 · 남원 · 나주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奈率) 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와 같이 백제는 관료의 등급에 따라 허리띠장식을 달리하여 관직체계를 표시하였다

 

 

 

 

사택지적비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글자는 화강암 한 면을 다듬고 네모 모양으로 나누어진 칸에 새겨져 있다

현재 4행만 남아 있는데, 각 행에는 세로로 14자씩 있다

비문은 중국 육조시대 사륙변려체로 그 내용은 사택지적이 금당을 세우고 탑을 쌓은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비문 양식 및 글자체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사택지적비 내용

 

 

 

 

백제의 문자

문자는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과 정보를 후대에 전해주는 역활을 하는데, 금석문 · 목간 · 토기 · 기와 등에 새겨져 부족한 문헌사료를 보완해준다

백제의 금석문은 칠지도 · 무령왕릉 묘지석 · 창왕명석조사리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역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나 유적의 성격 등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묵서명 목간(墨書銘木簡) /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 충남 부여 쌍북리 ·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목간은 가늘고 긴 나무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종이가 보급되기 이전에 종이를 대신하였다

먹으로 쓴 묵서 목간이 일반적이나 칼로 새긴 것도 있다

이러한 목간은 간단한 문서기록이나 꼬리표, 낙서나 연습용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풍납토성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토기와 벽돌이 출토되어 한성기에도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늬벽돌(보물 343호)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여덟 종류의 무늬벽돌이다

네모 모양의 벽돌은 크기가 일정하고 네 귀의 측면에 홈이 파여 있어서 서로 연결하여 고정시킬 수 있다

회화성이 뛰어난 무늬벽돌은 당시 예술과 건축, 종교와 사상적인 측면까지 살펴 볼 수 있어 가치가 크다

 

 

 

 

백제의 기와

웅진기와 사비기를 거치면서 연꽃무늬를 주로하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 확립된다

웅진기에는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기술의 바탕 위에 새로이 남조 양(梁)의 기와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이전과는 다른 기와를 제작하였다

사비로 도읍을 옮긴 이후에는 도성 안팎에 많은 사찰이 세워짐에 따라 제작도 활발해졌으며 양식도 다양해졌다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은 신라와 왜에도 전해졌는데, 왜에 파견된 와박사(瓦博士)는 와스카(飛鳥) 기와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독널(삼국시대)

독널무덤은 세계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서도 선사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서 4~5세기 무렵 흙을 높게 쌓고 그 안에 커다란 독널을 매장한 거대한 고분이 유행하였다

독널무덤에서는 금동관, 금동신, 목걸이 및 고리자루칼 등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어 이 지역을 지배하던 실력자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가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기원 후 42년 수로왕에 의해 김해지방에서 건국되었다

초기에는 이 지역의 풍부한 철을 기반으로 금관가야와 아라가야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가야 토기의 발생

가야는 높은 온도의 밀폐 가마, 고속 회전 물레 등 더욱 발달된 토기 제작기술로 회청색의 아주 단단한 토기를 만들었다

 

 

 

 

굽다리 접시(가야 5~6세기, 경북 고령 지산동)

가야 토기는 곡선적인 다리를 가진 굽다리접시와 다양한 형태의 그릇받침이 특징적인데 높은 온도에서 구워 대체로 밝은 회청색을 띠고 있다

3세기 후반 금관 가야(김해 일대)에서는 물결무늬가 새겨진 화로 모양의 그릇받침과 입술이 바깥으로 꺾인 굽다리접시

그리고 두 귀가 붙은 항아리가 등장한다

 

 

 

 

가야의 철 생산과 철기

 

 

 

 

고리자루칼(가야 5~6세기)

6. 경남 함천 옥전 1988년 발굴 / 7. 경북 고령 지산동 1995년 발굴 / 8. 경남 함안 도항리 1992년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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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칼 · 창 같은 철제 무기가 많이 출토되는데

특히 용과 봉황 등을 장식한 고리자루칼(環頭大刀)은 지배자의 신분과 정치체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물로 추정된다

가야는 풍부한 철자원과 우수한 철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가야의 건국신화

가야의 건국신화는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두 가지가 전해진다

 

 

 

 

가야의 갑옷

가야지역에서 널리 사용된 갑옷은 큰 철판 20~30매를 이어서 만든 판갑옷으로 가야무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판갑옷은 오른쪽 앞 몸통, 왼쪽 앞 몸통, 뒷 몸통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뒷 몸통과 앞 몸통은 분리할 수 있도록 하거나 가죽 경첩 등으로 연결하여 갑옷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가야의 말갖춤

말갖춤은 말을 타고 부리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이르는 말이다

말갖춤은 크게 마차용과 승마용으로 나뉘는데 가야의 말갖춤은 모두 승마용이다

 

 

 

 

가야의 대외교류

가야는 바다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철자원을 바탕으로 중국, 북방, 왜뿐만 아니라 서역과도 교류하였다

최근 백제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던 닭머리모양주둥이를 가진 청자호가

남원지역 가야무덤에서 확인되어 중국의 북조뿐만 아니라 남조와도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솥과 청동대야 등은 북방과의 교류를 잘 보여준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로 방패꾸미개, 원통모양청동기, 옥제 화살촉과 갈색 토기가 대표적이다

또 옥전유적에서는 서역계의 유리잔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가야 사람들의 생활

가야 사람들의 생활을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으며 무덤이나 생활유적에서 발견되는 유기물이나 토기 등으로 일부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경사진 맞배지붕의 꼭대기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쥐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이것을 모르는 쥐 두 마리는 장난스럽게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왼쪽은 이 토기를 재현한 것이다

 

 

 

 

신라

한반도 남동쪽에 있던 진한 12국 가운데 경주지역의 사로국이 성장 · 발전한 나라다

 

 

 

 

신라 금관 · 금허리띠 / 경주 황남대총 1973년 발굴 신라 5세기 · 국보 제 191 · 192호

신라의 황금문화와 최고의 금속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금목걸이

 

 

 

 

누금기법 금귀걸이

누금기법은 금속공예품의 표면을 금속알갱이 등을 이용해 표면에 접착하는 기법이다

 

 

 

 

굵은고리 금귀걸이

경주 보문동 합장분과 양산 금조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리 표면이 누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중심 고리에는 수백 개의 금 알갱이로 거북등무늬와 꽃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화려하다

 

 

 

 

관꾸미개 / 경북 경주 황남대총 신라 5세기 · 보물 제630호

관모에 끼워 장식하는 것으로 새날개의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다

양쪽 날개에는 수많은 달개가 달려 있어 화려하게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관모(경주 금관총 신라 5세기 · 무게 139g)

맞새김무늬가 있는 여러 장의 금판을 연결하여 만든 화려한 모자이다

남성의 머리 위에 쓰는 것으로, 주로 관꾸미개와 함께 출토된다

 

 

 

 

신라와 실크로드

신라는 중국 등 주변 국가뿐만 아니라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리 그릇의 전래

 

 

 

 

유리공예품

 

 

 

 

은잔 / 경북 경주 황남대총 신라 5세기 · 보물 제627호

거북등무늬 안에 새, 노루, 범, 말, 사람 등의 여러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특히 사람은 큰 눈, 높은 코를 가진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속그릇

신라에서는 흙으로 만든 토기와 금, 은, 청동 또는 철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다

금속그릇은 권위나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 쓰다가 무덤에 함께 묻혔다

 

 

 

 

신(금동) / 경북 경주 식리총 신라 5세기

신발의 바닥만 남은 것으로, 거북등무늬 안에는 짐승얼굴과 새무늬가 있고

그 둘레에는 가릉빈가(새 몸에 사람 얼굴) · 새 · 기린 · 날개 달린 물고기 등이 새겨져 있다

11개의 연꽃무늬에는 작은 못(스파이크)를 붙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자루솥(청동) / 경북 경주 식리총 · 신라 5세기

액체를 데우는 그릇이다. 손잡이는 용, 발은 말발굽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부분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되며, 뚜껑이 있는 것도 있다

 

 

 

 

신라의 무기

 

 

 

 

말갖춤

 

 

 

 

신라의 무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경주 일대에 산처럼 솟아있는 무덤들은 신라의 권력과 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한 조형물이다

 

 

 

 

문자로 보는 신라

6세기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계를 갖추고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 서울 북한산 비봉 · 신라 진흥왕 16년(555)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이 지역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연수'명 은그릇(延壽銘銀盒) / 경북 경주 서봉총 신라 451년

얇은 은판을 두드려 만든 합으로 그릇의 바닥과 뚜껑 안쪽에는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에 대왕이 3근 6량을 사용하여 만들다 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연수'라는 연호는 동아시아에서 확인되지 않은 연호이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 / 경북 포항 냉수리 신라 503년 · 국보 제264호

503년 신라 지배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의 호족이 절거리(節居利)에게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지배귀족이 의논하여 명령을 결정하고, 이후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후 비석을 세웠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 경북 포항 중성리 신라 501년

신라 지배층이 포항 중성리 지역 호족에게 명령을 내려 궁(宮) 즉 토지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조정한 내용에 대해서 기록한 비석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넓어진 영토에 기념비를 세우다

신라는 6세기에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법과 문서를 통하여 지방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남산신성비 제1비 / 경북 경주 탑동 신라 591년

진평왕 13년(591) 신라 왕경인과 지방민을 동원하여  경주 남산에 산성을 쌓고 건립한 비석이다

 

 

 

 

감문 · 구리벌 · 구벌 · 고타 · 추문

그 중 '구리벌'의 내용 "구리벌군 상살자촌에 사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곡물)"

 

 

 

 

각지로 퍼져가는 신라문물

6세기 신라는 이전과 같이 정복한 지역에서 물자를 빼앗아 오던 단계에서 벗어나 정복지를 신라의 지방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겨누거나 힘을 합치면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 정세를 잘 이용하여 삼국통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불교와 사찰 건축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신성한 천경림을 베어낸 곳에 세웠으며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는 원래 궁궐이 만들어질 장소에 건립되었다

 

 

 

 

뼈단지

불교를 수용한 이후 불교식 장례풍습인 화장이 새롭게 시행되었다

화장한 인골을 담아 묻기 위하여 일상용 토기와는 다른 화장용 뼈단지를 제작하였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운 석탑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밀반출하였으나

영국 언론인 E. 베델과 미국 언론인 H.헐버트 등의 노력에 의해 1918년에 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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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전시실을 나와 이동식을 하고 시계를 보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이 3층인데 1층도 반만 보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