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둘레길과 용산가족공원을 돌아보고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으로 갔다
방학이라 어린 학생들이 많아 조금 혼잡했고 사진 만들기가 어려웠다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이 연못에 비춰 보여 거울못이란 이름을 얻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 十層石塔 · 경기 개풍 경천사 · 고려 1348년 · 국보 제86호)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운 십층석탑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고려 석탑의 전통적인 양식과 이국적인 형태가 조화를 이루며, 고려인이 생각한 불교 세계가 입체적으로 표현된 석탑이다
사면이 튀어나온 기단부에는 사자(獅子) · 서유기(西遊記) 장면 · 나한(羅漢) 등을 조각했다
목조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탑신부에는 1층부터 4층까지 부처와 보살의 법회 장면을 총 16면에 조각하였으며
지붕에는 각각의 장면을 알려주는 현판이 달려 있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다섯 분 혹은 세 분의 부처를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지붕만을 복원하였다
이 탑은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가 일본으로 밀반출하였으나, 영국인 E. 베텔과 미국 언론인 H. 헐버트 등의 노력에 의해 1918년에 반환되었다
1960년에 경복궁에 복원되었으나 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해 보존상 문제점이 드러나 1995년 해체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0년간 보존처리를 진행한 후,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용산 이전 개관에 맞춰 현재의 위치에 이전 ·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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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의 높은 유리 지붕으로 조명이 없이도 밝게 보인다
오른쪽 첫 번째 방인 구석기방으로 들어간다
구석기시대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루어 낸 최초의 문화 단계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플라이스토세 중기(약 78~13만 년 전)로 추정된다
그들은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였다
이를 위해 동굴이나 강가에 머무르면서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고 발달시켰다
주먹도끼 / 경기 연천 전곡리 2007년 발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선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한반도 구석기시대 이른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동아시아에서 특히 우리나라 전곡리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주먹도끼가 발견됨으로써
서양은 주먹도끼 문화권이고 동아시아는 찍개 문화권이라는 그 동안 통용되어온 모비우스 문화권 개념을 폐기해야 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도구의 제작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 · 나무 · 동물의 뼈와 뿔 등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구석기시대 도구의 대부분은 돌을 가공하여 만든 뗀석기이다
나무나 뼈는 땅속에서 오랫동안 보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뼈 도구는 드물지만 석회암지대 동굴 유적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되맞춘 몸돌 / 전남 순천 죽내리 1996~1997년 발굴 · 경기 연천 전곡리 1994년 발굴 · 충북 단양 수양개 1983~1985년 발굴
석기 되맞추기는 유적에서 발견되는 조각들을 다시 붙어보는 것으로 구석기인들의 석기 제작 기술을 알 수 있는 방법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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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뗀석기
자연에서 우연히 깨진 돌과 사람이 때려서 만든 석기는 어떻게 다를까?
뗀석기는 일정한 형태를 보이며 규칮적이면서 집중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특정한 돌감이 선호되기도 하였다
유적에서 발견된 몸돌과 격지를 되맞추는 작업은 뗀석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석기의 질감
8. 규암(硅岩) / 9. 모루(臺石) 대전 용호동 1999~2001년 발굴
규암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뿐아니라 단단하여 구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널리 사용된 재료이다
석기 제작기술이 발달할수록 혼펠스 · 흑요석 등 입자가 고운 돌감이 사용되었다
찍개
4. 경기 파주 주월리 · 가월리 2002~2003년 발굴 / 5. 경기 안성 개정리 2009년 발굴 / 6. 7. 충북 청원 만수리 2006~2007 발굴
8. 경기 파주 금파리 1989~1992년 발굴 / 9. 강원 양구 상무룡리 1987~1988년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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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은 사냥을 통해 다양한 자원을 얻었다. 그러나 식물 채집 역시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다
이른 시기 대형 석기들은 주로 규암이나 석영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냥과 체집 활동 시 상황에 따라 찌르고 자르거나, 파고 긁어내고 빻는 등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긁개 / 경기 연천 횡산리 · 2000년 지표조사
주먹도끼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이른시기를 대표하는 석기다
삼각형이나 타원형을 기본형으로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날카로운 날을 만들었다
석기의 표면에는 자연면이 많이 남아있으며 두께는 두터운 편이다
사냥 · 동물의 해체 · 가죽 · 나무 · 뼈의 가공 등 다양한 작업에 쓰였다
1940년대 미국의 고고학자 모비우스는 세셰의 구석기문화를 서양은 주먹도끼 문화권 · 동아시아는 찍개 문화권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전곡리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주먹도끼가 빈번히 발견됨으로써 그동안 통용되어온 모비우스 이론을 폐기해야 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슴베찌르개
돌날을 이용해 만든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의 찌르개이다
아랫부분에 잔손질로 만든 슴베를 자루와 결합하여 창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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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의 발달
이른 시기의 대형 석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또한 전문적인 기능을 지닌 다양한 종류의 석기가 등장하였다
혼펠스 · 규질혈암(셰일) · 흑요석 등 고운 입자의 새로운 돌감을 사용하여 약 4만 년 전 무렵부터는 돌날을
약 2만5천 년 전 무렵부터는 작은 돌날을 만들었다
밀개 · 홈날 · 뚜르개 · 새기개
뚜르개
돌날 몸돌 · 돌날
1. 충북 단양 수양개 1983~1985년 발굴 / 돌날 2. 충북 단양 수양개 1983~1985년 발굴 / 3. 전남 순천 죽내리 1996~1997년 발굴
작은돌날 / 대구 월성동 2006년 발굴
돌날
작은돌날의 결합 방법
흑요석으로 만든 도구 / 밀개 · 새기개
밀개 2. 강원 양구 상무룡리 1987~1988년 발굴 / 새기개 3. 강원 홍천 하화계리 1991년 발굴
정신세계와 예술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에 들어서면 정신세계와 예술적 표현을 살펴볼 수 있는 무덤이나 동굴벽화 · 상징물 등이 발견된다
한반도에서도 무덤이나 뼈 예술품이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있으나 인간이 의도적으로 표현한 결과물인지에 대해 아직 명확하지 않다
최근 구석기시대 그림을 그릴 때 사용되기도 하였던 안료인 철석영과 흑연이 발견되어 사용 대상과 방법에 대해 궁굼증을 높이고 있다
신석기시대
약 1만 년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토기와 간석기를 만들었던 시기이다
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살며 고기잡이 · 사냥 · 식물채집을 통해 먹을거리를 얻었다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으며 농사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일본열도 · 중국 동북지역 · 러시아 연해주 등 주변 지역과 정보, 자원을 공유하였다
만년 전후의 한반도
약 1만 년전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한반도의 지형, 동식물상은 현재와 비슷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추운 기후에 사는 대형 동물이 사라지고 멧돼지, 사슴과 같이 작고 빠른 동물들이 나타났다
다양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운반, 보관, 조리하기 위해 토기가 만들어졌고 빠른 동물을 잡기 위해 활과 화살이 사용되었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와 화살은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간석기
1. 충북 청원 노산리 2005~2006년 발굴 / 2. 진주 장흥 월평 2001년 발굴 / 3. 전남 장흥 신복 2003~2004년 발굴 / 4. 충북 단양 수양개 1983~1985년 발굴
화살촉
강원 동해 망상 2001~2003년 발굴 / 강원 동해 월소 2007~2008년 발굴
화살촉
다양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운반, 보관, 조리하기 위해 토기가 만들어졌고 빠른 동물을 잡기 위해 활과 화살이 만들어졌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와 화살은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바다로 나간 사람들
신석기시대에는 빙하가 녹으면서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곳곳에 강이 생겨났다
신석기인들은 자원이 풍부한 강가와 바닷가에서 생활하면서 고기잡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도구를 개발하였다
특히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작살과 이음낚시를 사용하여 고래, 상어 등 바다동물과 큰 물고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음낚시
빙하가 녹으면서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곳곳에 강이 생겨났다
신석기인들은 자원이 풍부한 강가와 바닷가에서 생활하면서 고기잡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도구를 개발하였다
결합식 작살
1. 강원 고성 문암리 2002년 발굴 / 2.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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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작살과 이음낚시를 이용하여 고래, 상어 등 바다동물과 큰 물고기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물추
강원 양양 오산리 1981~1983년 발굴 · 서울 암사동 1971~1975년 발굴
원거리 교류
신석기인들은 부족한 자원을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얻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원의 분포 상황과 이용방법, 제작기술 등 다양한 정보의 교환도 이루어졌다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제주, 일본열도,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 먼 지역 간에도 접촉이 이루어졌다
특히 한반도 동남해안 지역과 일본 규슈 지역 간에는 신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원거리 교류 · 나무껍질을 이용한 배
신석기인들은 부족한 자원을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얻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원의 분포 상황과 이용방법, 제작기술 등 다양한 정보의 교환도 이루어졌다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제주, 일본열도,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 먼 지역 간에도 접촉이 이루어졌다
특히 한반도 동남해안 지역과 일본 규슈 지역 간에는 신석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갈판과 갈돌
도토리나 가래 등 견과류를 가루로 만들거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되었다
도토리 저장 구덩이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식물로는 도토리가 있다
도토리는 떫은 맛이 나는 타닌(tannin)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날로 먹기 힘들다
신석기인들은 이를 없애기 위해 밀물과 썰물이 있는 바닷가 구덩이에 넣어두거나 토기에 물을 채워 담가놓았다
떫은 맛이 빠지면 공이로 빻거나 갈판과 갈돌로 가루를 내어 조리해 먹었다
식물 채집과 농사 짓기
식물 채집은 신석기시대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도토리, 가래, 살구 등 다양한 야생 식물을 먹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석기인들은 점차 땅을 일궈 조, 기장 등을 재배하였다
농사는 자연이 주는 그대로가 아니라 인간이 특정 자원을 생산해내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땅을 일구고 이삭을 거두기 위해 괭이, 낫 등을 사용하였다
뒤지개
부산 범박동 2002년 발굴 / 경남 김해 수가리 1978~1979년 발굴 / 부산 동삼동 1970~1971년 발굴 / 서울 암사동 1971~1975년 발굴
옷짓기
신석기시대 옷 짓기와 관련된 유물로는 가락바퀴, 바늘 등이 있다
가락바퀴는 가운데 난 구멍에 축을 꽂아 회전력을 이용하여 실을 꼬아 뽑는 도구다
이렇게 뽑아낸 실로 가죽을 꿰매어 입거나 간단한 형태의 옷감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의 등장
토기는 1만 년전 인간이 진흙을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화학적 변화를 깨닫고 만든 최초의 발명품이다
토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끓이고 데치고 삶는 등 다양한 조리방법이 가능해져 먹을 수 있는 재료가 많아지고 보관, 운반도 이전보다 손쉬워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생활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사람들은 한 곳에 비교적 오래 머물며 생활하게 되었다
시기와 지역에 따른 변화
신석기시대 한반도에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토기가 만들어졌다
기원전 8천 년 경 제주에서 최초의 토기가 출현한 이래
기원전 6천 년 경 동해안과 남해안에서 덧무늬토기와 누른무늬토기, 기원전 5천 년 경 중서부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하였다
서북, 동북, 중서부, 남부 내륙, 남해안 등 지역에 따라 생김새와 무늬에 차이가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늬가 점차 줄어드는 공통된 모습도 보인다
바리(鉢) / 서울 암사동 1971~1975년 발굴
실용과 예술, 토기
토기는 음식을 조리하고 담는 실생활도구였지만 신석기인의 예술작품이자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토기 겉면에는 점토 띠를 붙이거나 새기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둥근 면을 따라 일정한 크기와 형태로 아름답게 배치한 모습은 신석기인의 뛰어난 미적감각과 공간 구성력을 보여준다
또한 토기는 사람의 뼈를 추려 넣은 무덤으로도 사용되었다
독널 /경남 진주 상촌리 1996~1998년 발굴
무덤은 죽음에 대한 신석기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는 경우가 많으나 동굴을 무덤으로 이용하거나 뼈만 추려 토기 등에 넣기도 하였다
신석기인들은 꾸미개로 죽은 이를 치장하고 토기, 석기 등 필요한 물건을 무덤 안에 넣었다
부산 가덕도 유적 41호 무덤
팔다리를 굽혀묻기(屈身葬)한 인골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은 키 160cm를 전후한 40대 남성으로 X자 모양으로 놓인 두 팔에 투박조개로 만든 팔찌를 차고 있었다
발찌(동물 이빨) / 경남 통영 연대도 1988~1992년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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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과 예술
생활이 안정되면서 신석기인들은 팔찌나 목걸리, 귀걸이를 만들어 자신의 몸을 꾸몄다
또한 사람의 얼굴, 여성, 동물, 배 모양을 띤 예술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꾸미개나 예술품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도 목적이 있지만 집단의 신앙 · 의례와 관련되거나 소속, 사회적 신분 등을 나타내는 성격이 강했다
얼굴이 새겨진 토기 / 경북 울진 죽변 2009~2010년 발굴
꾸미개 돌 · 뼈 · 조가비
10. 강원 양양 오산리 2006~2007년 발굴 / 11. 꾸미개(돌) 인천 운서동 2008년 발굴
12. 경남 완도 여서도 2005년 발굴 / 13. 부산 동삼동 1971년 발굴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는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를 주 무대로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되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민무늬토기(無文土器), 간석기(磨製石器), 목기(木器)가 사용되었고
청동기는 권위의 상징물이나 의기(儀器)로 일부만 소유할 수 있었다
벼농사 등 농업이 발달하면서 오늘날 농촌과 비슷한 대규모 마을이 생겨났고 집단 내에서는 사회적 계층화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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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곡을 위주로 한 밭농사는 신석기시대에 시작되었으나, 청동기시대에 와서 벼농사가 시작된다
벼농사는 잉여 생산물의 증가는 물론 농경도구의 발달을 초래하였고
한편으로는 노동력과 수확물을 관리하고 분배하는 계층이 나타나게 되는 등 사회적인 모습까지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돌도끼 / 경기 수원 1963년 구입
농경과 마을의 탄생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을 바탕으로 정착 생활이 본격화하면서 큰 규모의 마을들이 생겨났다
주로 움집에서 살았는데, 집터 안에는 화덕자리, 기둥 구멍, 저장 구덩이 등이 있었다
집터는 면적이 큰 장방형에서 작은 원형 · 방형으로 변화한다
마을 유적에서는 논과 밭, 물길, 우물, 마을 전체를 두른 도랑, 울타리 등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농경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돌칼의 상징성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인 돌칼은
규모가 큰 주거지나 일부 무덤에서만 출토되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 소유하였을 것이다
길이 40cm가 넘는 대형인 것, 손잡이 부분이 과장되어 실용성이 없거나 장식된 돌칼은
신분을 상징하는 의기의 일종으로 단순한 칼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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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의 등장
농경 사회에서는 수로 굴착, 거대한 고인돌 조성 등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 노동이 강조되었다
이와 더불어 잉여물의 분배 등을 둘러싼 여러 갈등을 조정하는 인물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마을 규모가 커지면서 마을 내부는 물론 마을 간에도 격차가 생기며, 일부 지배자는 주변 여러 마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무덤에 부장되는 청동칼과 돌칼 등은 이러한 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별처럼 달처럼 생긴 도끼들
톱니날 도끼 혹은 바퀴날 도끼라고도 하며,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 막대자루를 꽂아서 사용했다
이것은 실제 무기나 지휘봉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돌창
청동기시대에도 농경과 함께 수렵과 어로 등 생업 활동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최근 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대가 출토되었고, 땅을 파서 만든 함정도 발굴되었다
이와 더불어 수렵과 관련된 유물로서 창이나 동물뼈 등이 있다
농경문 청동기
앞면에 솟대를, 뒷면에는 농경의례를 표현한 청동의기(靑銅儀器)로서 생산과 풍요를 비는 의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 새가 나무가지 위에 앉은 모습은 농촌 마을의 솟대를 연상시킨다
뒷면에는 사람이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거나
머리에 긴 깃이 달린 모자를 쓴 사람이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벌거벗은 모습을 상징하듯 성기가 노출되어 있다
밭고랑 아래에는 또 한 사람이 괭이를 치켜든 장면이 있다
민무늬토기(無文土器)
청동기시대에는 토기 겉면에 무늬가 거의 없는 민무늬토기를 사용했다
굵은 모래나 돌가루를 섞어 다소 거친 진흙으로 빚어 한댓가마에서 구웠으며 바닥이 납작하고 적갈색을 띤다
민무늬토기 아가리에는 간단한 선무늬나 구멍무늬, 점토띠 등이 있는 경우도 있으며
토기 겉면을 잘 문질러 붉은색이나 검은색을 낸 것도 있다
민무늬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특징을 보이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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