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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908년 일제가 경성감옥으로 지은 이래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면서 이곳은 역사관이자 교육의 현장으로 새롭게 단장해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문을 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정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예전 보안과 청사)

정문에 들어가면 바로 앞에 있다

 

 

 

 

제국주의의 침략

1876년 강화도조약 · 1894년 청일전쟁 · 1895년 을미사변 · 1904년 러일전쟁 · 1905년 을사늑약 · 1910년 강제병합

 

 

 

 

을사오적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 어전회의에서 이등박문은 종이와 붓을 들고 늑약의 가부를 묻는다

한규설 · 민영기 · 이하영 등 대신들이 통곡을 하면서 반대를 썼다

이때 일본에 매수된 이완용 · 박제순 · 이근택 · 이지용 · 권중현 등은 찬성을 표했다

이등박문은 8명의 대신 중 5명이 찬성했으니 다수결로 조약은 체결된 것이라고 했다

 

 

 

 

을사늑약문 / 1905. 11. 17

이등박문은 일본공사와 외부대신 박재순을 불러 서명토록 했으니 이로써 나라는 망했다

후일 이완용이 말했다. "찬성을 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다"고

 

 

 

 

기유각서 / 1909. 7. 13 · 관보 / 1907. 10. 23 · 한일합방조약문 / 1910. 8. 29

 

 

 

 

영상관

강우규 사세시(辭世詩) 영상이 나오고 있다

*

단두대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有身無國 豈無感想)

 

 

 

 

의병장 이강년 동태 보고서

 

 

 

 

이강년 의병장 옥중서한 / 1908년

문경 의병장 이강년(1858~1908)이 아들에게 사후의 일을 부탁한 편지다

 

 

 

 

요 / 일제강점기

수감자 노역시 탈주를 방지하기 위해 허리에 채웠던 형구로 길이 3m · 무게 5kg이나 나간다

 

 

 

 

의열투쟁

개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제의 요인이나 친일파를 처단하고 식민지 통치기관을 파괴하였던 독립운동 전략의 하나다

이는 적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재명 · 강우규 · 채경옥 · 송학선 의사 등이 거사를 결행하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항일결사 조직과 활동

독립운동가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을 결성하였고

이 조직을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군자금 모집 · 친일파 처단 · 일제 군·경 및 주요 요인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광복회 · 의열단 · 27결사대 · 조선민족대동단 등의 국내외 비밀결사 조직원들이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 또는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독립운동가 수형기록표

독립운동가의 기록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5천여 장의 수형기록표를 통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되새겨보는 공간이다

 

 

 

 

수형기록표

대부분 이름표를 붙인 정면 · 측면 사진과 성명 · 나이 · 신장 · 지문번호와 특징 등이 써있다

 

 

 

 

6 · 10만세운동

순종의 인산일 약 30여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5~600여 명의 학생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시위를 전개하였고 지방 곳곳에서도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이 시위로 서울에서 212명이 체포되었고 권오설 · 권오상 · 이선호 · 유연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 가운데 권오설 열사가 1930년 4월 옥사하였는데 일제는 고문 흔적을 감추고 열사의 혼마저 가두어 버리고자

시신을 철로된 관으로 봉인하고 유족에게 인계해 끝내 열어보지 못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6 · 10만세운동 판결문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한국어 사용금지 등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여 사전 편찬 및 한글 보급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던 단체다

1942년 10월부터 1944년 2월까지 한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한글학자 33명을 검거하였고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는 해산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재조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이윤재 · 한징이 옥중 순국하였고 이극로 · 최현배 · 이희승 · 정인승 · 정태진 등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교신과 성서조선

성서조선은 1927년 7월 일본에서 김교신이 발행한 기독교 계통의 월간잡지인데

1942년 3월호 권두언에 김교신이 부활의 춘(春) · 조와(弔蛙)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 문구가 민족의 소생을 부르짖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이 사건으로 김교신 · 함석헌 · 송두용 · 유달영 등 18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사형장 지하 시신수습실 모형

천정 중앙에 빨간 철제 모양의 틀이 교수형 집행을 위한 개폐식 마루판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다

강우규 절명시가 왼쪽에 화상으로 나온다

 

 

 

 

사형장 지하 시신수습실 우측 벽

순국하신 독립지사들의 사진들로 강우규 · 유관순 누나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노인단(老人團)의 길림성 지부장으로 

1919년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8월 서울에 잠입하여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정무총감 · 만철(滿鐵)이사 · 일본경찰 등 37명을 사상시켰다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 · 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에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물고문실

강제로 수조에 머리를 짐어넣거나 코나 입에 물을 마구 들이부어 호흡을 곤란하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방법이다

심지어는 폐에 물이 차서 흉막염에 걸려 매우 고통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취조실

일제는 재판을 받기 전 미결로 수감되어 있었던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경찰서로 이송하여

취조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고등계 형사를 직접 서대문형무소에 파견하여 이곳 지하에서 취조하였다

 

 

 

 

고문실

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의식을 억누르고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취조하면서 고문과 구타를 자행하였다

한국인들에 대한 이 같은 폭력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고

정치 사상적으로도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하다는 열등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민을 지배하는데 유화책을 쓰지 못하고 무차별적인 강압과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폭력적 통치방법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방식과 비교해 보아도 사상 유래가 없는 비인륜적 행위였다

 

 

 

 

손톱찌르기 고문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를 손톱 밑으로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 방법으로

심할 경우 손톱뿐 아니라 입속까지 마구 찔러 고통을 주기도 했다

 

 

 

 

상자고문

상자 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놓고 사람을 상자에 집어 넣고 마구 흔들며 못에 찔리게 하여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다

 

 

 

 

벽관 고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주었던 고문도구로

벽에 서있는 관이라 하여 벽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지하 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으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 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

 

 

 

 

중앙사

1923년 제10 · 11 · 12옥사와 연결하여 옥사 전체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신축되었던 2층 건물이다

1층은 간수들의 사무공간으로 이용되었고 2층은 전체 공간을 강당으로 꾸며 수감자들의 교회당 즉 전향교육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1층 간수사무실

서대문형무소의 규모와 운영조직 · 운영인력 · 교회 · 감시와 통제 등이 도표와 함께 걸려있다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 중 김광섭의 「나의 옥중일기」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아~벌려야 한다

뛰는 것은 항문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요, 아~ 하는 것은 입에 문 것도 없다는 증거이다

감방과 공장 사이로 조그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다니다간 벼락이 떨어진다"

 

 

 

 

백범일지

1947년 초판본이다

 

 

 

 

독방

1평도 안되는 좁은 공간으로 일제가 애국지사들에게 육체적인 고문과 심리적 · 정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 설치했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애국지사들을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하였다

특히 애국지사들을 특수범죄자로 분류하여 전기와 변기도 없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러한 독방에 투옥시킨 후 고문과 폭행 등 갖은 악행을 일삼았다

 

 

 

 

감방

수감자의 생활공간은 주로 감방과 공장이였다

수감자의 하루는 대부분의 시간이 노역이었고 하루 30분의 운동시간이 주어졌다

또한 서신은 한 달에 한번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감방은 가장 넓은 것이 13㎡ 크기로 보통 40~50명을 수용하여 수감자들이 누워서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수감자들 사이에는 일체의 대화가 허용되지 않았다

 

 

 

 

감방

한편 감방 내부에는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 나무로 만든 통에 볼일을 해결하였고

통풍과 채광이 잘 되지 않아 매우 비위생적이고 열악하였고 난방 또한 없었다

 

 

 

 

타벽통보법

감방 벽을 딱딱 두드려 미리 정해 놓은 암호로 수감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었을 때 그 옆방에 먼저 수감되었던 김정련 선생이 타벽통보법을 알려주다가

외곽을 순찰 중이던 간수에게 들키자 김정련 선생이 똥통을 뒤집어 엎고 소란을 피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발각되면 두 사람은 계호계로 끌려가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눈알이 빠지도록 매를 맞고 2~3년의 가형을 받게된다

 

 

 

 

환기구 구멍 · 예전 화장실 자국

옥사 외벽에는 일정한 간격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는 옥사 내부 감방이 마루로 되어 있어 썩고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뚫어 놓은 일종의 환기구다

1층은 마룻널 위와 아래에 2층은 마룻널 위쪽에만 구멍을 뚫어 환기를 시켰다

또 일제 때는 감방 내부에 별도의 화장실이 없어 나무로 만든 통에 볼일을 해결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감방의 외벽을 허물고 화장실을 외부에 매달아 설치하였으나

1987년 서울구치소 이전 후 철거되어 그 자리에 다시 벽돌을 쌓았으나

화장실이 매달려 있던 부분은 원형 벽돌과 다르게 하얗게 변색되어 그 흔적이 남아있다

 

 

 

 

독방 용변 배출구

독방의 수감자는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용변을 치울 때 조차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룻널 끝쪽에 구멍을 내어 용변을 보고 밖으로 배출하였다

이에 그 구멍 밑에는 용변을 받는 사각통을 두어 외부와 접촉없이 용변을 해결하게 하였다

그 흔적이 현재 3개의 배출구로 남아있다

 

 

 

 

이병희 / 1918~2012년

할아버지 이원식 독립지사는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끈 독립운동 1세대이며

아버지 이경식 애국지사는 1925년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약했던 분이다

이병희 여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던 열여섯 살 때 종연방적에 들어가

당시 공장 근로자 500여 명에게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잡혀 4년 반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4월 출옥한 이 여사는 1940년에 베이징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했고 문서와 무기 등을 전달하는 연락책의 역할을 다했다

 

 

 

 

이병희 여사

이육사는 이병희 여사와 먼 친척이며 이 여사 보다 2년 늦게 베이징으로 건너와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 여사는 1943년 9월 일본경찰에 의해 베이징 감옥에 구금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육사도 함께 투옥됐다

이 여사는 이듬해 1월 11일 풀려났으나, 이육사는 16일 옥고를 치르다 순국했다

안타까운 비보를 들은 이 여사는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하고 급하게 빌린 돈으로 화장했다

이후 「광야」 등 이육사가 마분지에 쓴 시와 만년필 등 유품을 챙겼다

이육사 유골과 유품을 일제가 훼손할까 염려한 이 여사는 한동안 유골단지를 품에 안고 다니다 유가족에게 전달했다

해방 이후 이 여사는 독립운동 사실을 숨겨왔으나 이육사의 업적을 찾아 나선 당시 전문가 등을 통해서 밝혀졌다

항일 독립투쟁을 하셨고 고문으로 숨져간 이육사 시인의 주검을 거뒀으며 유품을 수습하여 우리 겨레에게 전해준 항일독립운동가다

 

 

 

 

리영희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리영희

생활은 간소히 생각은 높게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지, 물질은 중요하지 않아

넥타이 300개를 가진다고 해서 그 물질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나?

오히려 물질이 주인이 되고 물질의 예속물이 되는거야

 

 

 

 

전태일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합니까?

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다?"

 

 

 

 

이돈명

1974년 4월에 발생한 민청학련사건의 영향을 받아 인권옹호 활동과 반독재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1970~80년대 인권운동에 전념 이후 전민학련 · 전민노련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고은 / 1933.4.10~ 

1970년 전태일 분신자살로 현실 인식 시작

1974년 민족민주주의 운동에 투신 자유실천문인협회 결성 초대 대표간사

1977년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서울구치소 수감

1979년 YH사건 시 농성현장을 격려 지도하여 문동환 · 이문영 등과 함께 서울구치소 수감 고막파열 · 청각 손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20년 선고

 

 

 

 

 중앙사와 연결된 부채꼴 모양 옥사

 

 

 

 

노역의 기록

1923년 지어진 건물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형무소 · 군부대 · 관공서 등의 관용물품을 조달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옷감과 의복이 생산되었으며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는 군수용품이 생산되었다

 

 

 

 

붉은 벽돌

서대문형무소 옥사 신축 시 사용되었던 벽돌

1920년대 마포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제작된 당시 각종 표식이 새겨져 있다

 

 

 

 

유관순 열사 지하 감옥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들만을 수감하고 고문하기 위해 1916년 신축한 여성 옥사다

1934년 경에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지하 감옥으로 매립하였으나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발굴 복원하였다

복원된 지하 감옥의 면적은 190㎡ · 높이는 1.48m로 허리를 똑바로 펼 수도 없으며

채 1평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어 악랄한 일제 만행의 생생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1920년 10월 유관순열사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다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도 한다

 

 

 

 

이화학당 재학 당시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

 

 

 

 

서대문형무소 사각연못

일제강점기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던 나전칠기 공장이 있었던 자리로 해방 이후에는 빨래터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연못 바닥은 배수시설이 잘되어 있으나 많은 양의 물이 안산에서 내려와 자연스럽게 고여 있는 곳이다

 

 

 

 

한센병사

한센병을 앓고 있는 수감자를 격리 수용하기 위하여 1923년에 지은 격리 옥사로

건물 내부 전면에 복도가 있고 그 후면에 작은 감방 2개와 큰 감방 1개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난방이 되지 않았던 다른 옥사와는 달리 오른쪽 중앙 하단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9옥사 · 격벽장

 

 

 

 

사각연못

제11옥사 · 제10옥사 · 제9옥사가 뒤에 있다

 

 

 

 

제10옥사 · 제9옥사

제9옥사는 1920년대 지어진 2층 옥사 건물로 유일하게 중앙 간수소와 연결되지 않은 독립옥사로

소위 정치사상범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이 집중 수감되어 특별 감시와 통제를 받았던 곳이다

 

 

 

 

추모비(작품명 민족의 빈 그릇 / 작가 임승호 · 2010년 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되새기기 위해 조성하였다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선열들의 민족정신과 자유와 평화를 향한 의지를 한데 모으고

그 모아진 의지를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부에 투영된 선열들은 현재까지 발굴된 총 165분으로 지속적으로 추가 발굴하여 등재할 예정이다

 

 

 

 

격벽장 원형 터

일제강점기 수감자들의 운동시설인 격벽장이 있었던 원래의 자리다

이곳에서 부터 사형장쪽으로 방사형의 격벽장이 있었으며 가운데 직사각형 부분은 간수가 서서 수감자를 감시하던 곳이다

현 위치에서 뒤편으로 약 20여 미터 이전하여 2011년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격벽장 배부

수감자 상호간에 대화를 방지하고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칸막이 벽(격벽)을 만들어 각 칸에 수감자들을 분리 수용하여 운동을 시켰던 운동시설이다

 

 

 

 

통곡의 미루나무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된 미루나무로 사형장에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하여 이름 붙어졌다

 

 

 

 

사형장 안쪽 미루나무

밖의 나무와 같은 시기에 심었으나 너무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형장 / 사적 제324호

1923년 지어진 목조건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하였던 장소다

사형장은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사형장 내부

 

 

 

 

교수형 사형장

사형장치는 교수형 집행을 위한 개폐식 마루판과 교수줄 가림판 뒤쪽에 위치해

마루판을 밑으로 내리는 레버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루판 아래 지하공간에 시신 수습실이 배치되어 있다

 

 

 

 

시구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시신을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은 비밀 통로다

고문 등으로 그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을 외부에 공개했을 때 사회적 파장이 우려되는 경우 · 시신을 인도할 유족이 없는 경우 등에 사용되었다

원래 길이는 약 200m로 바깥과 연결되었으나 해방 직전 일제가 붕괴시켰다

이것을 지난 1992년 독립공원 조성 시 발굴하여 약 40m를 복원하였다

 

 

 

 

사형장 / 사적 제324호

 

 

 

 

옥사 터 붉은 벽돌

본래 옥사가 있던 자리로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의왕시로 이전한 후 철거되었던 지역이다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은 감방이 있었던 자리다

 

 

 

 

추모비 · 망루 · 한센병사

 

 

 

 

정문 망루 · 여성옥사(유관순 지하 감옥)

 

 

 

 

유관순 지하감옥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들만을 수감하고 고문하기 위해 1916년 신축한 여성 옥사다

1934년 경에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지하 감옥으로 매립하였으나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발굴 복원하였다

복원된 지하 감옥의 면적은 190㎡ · 높이는 1.48m로 허리를 똑바로 펼 수도 없으며

채 1평도 안되는 독감방 4개가 있어 악랄한 일제 만행의 생생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1920년 10월 유관순열사가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다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순국하신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도 한다

 

 

 

 

서대문형무소 건축물 부재

1908년 개소 이후 1987년까지 운영기간 동안 쓰였던 건축물의 일부 부재로서

오른쪽부터 건축물과 건축물을 연결한 회랑의 기초석 · 건축물의 하중을 담당하던 줄기초와 독립기초 및 기둥부재

그리고 지붕마감 및 장식재로 쓰인 두겁석과 취사장 바닥재 해체된 옥사에서 나온 원형벽돌이다

 

 

 

 

취사장

수감자들의 밥을 짓기 위해 1923년 만들어진 취사장이다

1937년 증축되었으며 1988년 철거되었던 것을 2010년 복원하였다

내부에는 취사장 복원당시 발굴되었던 기관실 유구터와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각종 기념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기념품점

취사장이였던 기념품점 유리 바닥 밑으로 당시 보일러실과 연도 등이 남아있다

 

 

 

 

취사장

예전 사진이 벽에 붙어 있다

 

 

 

 

취사장

예전 사진이 벽에 붙어 있다

 

 

 

 

무쇠솥

증기로 찜을 하여 밥을 짓던 가마솥으로 일본 사토철공소에서 제작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망루가 보이는 담장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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