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을 제일 길게 걷자면 남해 · 서해의 분기점인 땅끝마을과 고성통일전망대를 잇는 국토종주다
그와 대칭되는 남해 · 동해의 분기점인 오륙도와 서해 최북단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걷기로 했다
오륙도와 강화도의 인연을 이어주는 걷기다
부산역
KTX로 도착한 부산역에서 27번 버스를 타고 오륙도로 향했다
오륙도
27번버스 종점인 오륙도 SK뷰아파트 후문에서 오륙도로 향하는 동안 국토종주로 가슴 설레였다
오륙도
밀물과 썰물의 현상에 따라 동쪽에서 보면 6개 · 서쪽에선 5개로 보인다 하여 오륙도라 한다
동해 · 남해 분기점 안내판
해파랑길 · 이기대 해안산책로 시점이자 마침점인 오륙도 해안가에 있다
이곳을 이번 국토종주의 시점으로 잡고 안내판 중앙에 GPS를 놓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해파랑길
떠오르는 해와 바다색인 파랑을 합한 의미의 이름이다
또한 이 길은 갈맷길과 이기대 해안산책로이기도 하다
오륙도
오륙도해맞이공원으로 오르며 돌아 봤다
전망대(예전 군초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오륙도
철 이른 코스모스가 있다
농바위
숲길 산책로 오른쪽 끝으로 살짝 보인다
농바위
버들채나 싸리 따위로 함처럼 만들어 종이를 바른 궤를 포개어 놓도록 된 가구로써
제주의 성산포 해녀들이 남천동 해안가에 자리를 틀어 물질을 하면서 서로 위치를 알리는 수단으로 농바위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부처가 아이를 가슴에 안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배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돌부처상 바위라고도 한다
해운대 동백섬
듣기만해도 가슴 뛰는 곳이다
치마바위
이기대(二妓臺)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 경치 좋은 이곳에서 축하잔치를 열었는데
수영의 기녀 두 사람이 왜장에게 술을 권하고 술 취한 왜장과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는 곳이다
그 두 기생이 이곳에 묻혀 있어서 이기대라 한다
광안대교 · 해운대
공룡발자국
2000년 3월, 천체 · 지구 · 동식물 및 인류사 연구단체인 「자연사환경학회」의 조사로
약 6,500만 년 전(중생대 백악기 말)에 살았던 대형 초식동물인 울트라사우르스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된 곳이다
해녀막사
해녀들이 해산물 채취를 위해 어구 보관 · 잠수복 탈의 · 조업 후 휴식 장소로 40여 년 전에 만들어져 활용돼 오던 것을
2005년 이기대해안산책로 조성사업을 계기로 강한 파도에 견딜 수 있도록 정비 복원하였다
전체적인 형상은 거북이가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며 현재까지도 10여 명의 해녀들이 이용하고 있다
해녀막사
출입구가 있는 뒷쪽이다
현수교
갯바위를 잇는 짧은 현수교들이 있다
언덕 위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다
현수교가 있는 해안길을 돌아 본다
광안대교 · 해운대
용호부두 · 광안대교
GS하이츠자이아파트
바다로 왼쪽 고가도로가 광안대교의 시작이다
대천중학교
학교는 방학이지만 야구부원들이 훈련하고 있다
평화공원 6 · 25참전기념비
재한국 국제연합기념공원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생명을 바친
11개국 2,300여 명의 유엔군 장병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부산박물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시대별 문화상과
일제강점기 · 한국전쟁 등 부산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동래부사 유심 선정비(府使 柳淰 善政碑)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귀부 · 비신 · 이수 등 전체적으로 거의 훼손된 부분이 없어 보존 상대가 대단히 양호하며 부산지역에서 건립된 선정비로서는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으로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예가 드문 비석이다
이 선정비는 전체적으로 비신에 비해 이수와 귀부가 다소 작은 편이다
조각기법이 조선시대의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어 비석의 건립시기인 1651년 당시의 조각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건립연대가 명학하고 석재를 다듬은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동래 남문비(東萊南門碑) /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21호
임진왜란 때 동래성 남문에서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나머지 분들을 기리어
1670년(현종 11), 당시의 격전지였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웠던 것이다
비는 크게 파손되어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얼마되지 않지만 비문이 동래부읍지에 실려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은 1688년(현종 9)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전자는 이정영이 썼다
동래충렬비라고도 하는 이 비문의 규모는 높이 125cm · 폭 121cm이다
비의 머리석에는 쌍룡 조각이 있고, 아래쪽 대석은 없어졌다
비 머리석의 이수의 조각은 우아한 기법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척화비 /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18호
조선 말 고종 때 섭정의 자리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에 세운 비석이다
대원군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배격하고, 쇄국을 강화하기 위한 굳은 결의를 나타내고
백성들에게 서양 열강의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고종 8) 4월에 서울과 전국의 중요한 곳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는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여러 나라와 통교하게 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이 비석은 개항 당시의 절박한 사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약조제찰비(約條製札碑) /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17호
1683년(숙종 9)에 동래부사와 대마도 도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 조항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607년(선조 40) 두모포(수정동 부근)에 왜관이 설치되고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대마도 관인과 상주하는 일본인을 말하는 항거왜인이 거주하는 한편 양국 상인의 접촉도 많아졌다
이에 따라 밀무역과 잠상행위 등 폐단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는 여러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중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두모포에서 초량(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후 왜관 규모가 커지고 면적도 넓어진 까닭에 일본인들의 범법행위는 날로 심해졌다
이에 1683년(숙종 9)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환이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도주와 전문 5개조의 약조를 체결하였다
같은 해 8월 양측은 각각 한문과 일본어로 명문화하고, 비석에 새겼다
이 비를 조선 측은 수문 안에 달고, 일본은 왜관의 경계선에 세워서 널리 알리게 하였다
이때 조선이 세운 비석이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이다
동래부사 이택수 선정비(東萊府使 李澤遂善政碑) / 1774년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 / 부산유형문화재 제48호
조선 후기 대일외교의 실무관청이었던 유원각과 관련된 유일한 금석문 자료로서 비석의 건립배경과 목적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어 약조제찰비와 함께
왜관 및 조선후기부터 근대의 부산역사와 대일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비각은 전통적인 목조 기와지붕의 비각과는 달리 석조로 조성된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1906년에 건립되었다
유엔참전기념탑
커피간판 · 공중전화
부산공업고등학교로 가다 만났다
부산 남구청사
전포대로
문현교차로 육교에서 봤다
우암로 방향
문현교차로 육교에서 봤다
동천
부산항과 연결되는 동천이다
범천동 성가병원 방향이다
범천상가 방향이다
가야굴다리삼거리
남구청 앞 밀면집에서 점심을 하고 이곳에 이르렀을 때 해가 기울었다
맥도날드
더위로 아이스커피를 두 잔씩 마시고 빅터가 리필한 얼음을 걸으며 먹었다
개금동 지하차도
이곳을 지날 때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사상로
부산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사상 가마솥돼지국밥
샤워 후 저녁을 먹을 식당을 찾으러 괘법르네시떼역 근처 괘법동 뒷골목을 돌아 봤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29.7km · 소요시간 9시간 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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