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東九陵)이란 도성 동쪽에 있는 9개의 능이란 의미로
조선을 세운 태조의 능으로부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지면서 동구릉이 되었다
학생 때 가본 기억으로 서너 시간이면 될줄 알고 역사문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해가 기우는 바람에 나중엔 거의 뛰다싶이 다녔다
동구릉 역사문화관
검표소에 계시는 분께 관람 안내를 받고 들어갔다
동구릉
조선왕릉 분포도
모두 119기에 이르는 무덤 가운데 능 42기 · 원 13기 · 묘가 64기이다
42기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 · 후릉을 제외한 40기가 남한에 있다
519년 27대의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왕릉 연표
1392년 조선 건국부터 1910년까지 519년간 27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의 왕릉 연표다
동구릉 안내판
조선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초기에는 석실 · 후기엔 회격으로 조성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짧지만 흥미로워 세 번 봤다
건원릉 산릉제례
조선 건국 이래 엄격하게 지켜온 산릉제례를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홍살문(紅箭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재실(齋室)
평상시 영 또는 참봉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며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홍살문을 지나 오른쪽에 있다
수릉(綏陵)
추존 문조(1809~1830) · 신정왕후(1808~1890)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22세에 요절하였으나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대되고 고종 때 문조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는 1834년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고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하였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 중 ·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인석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인석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 · 무인석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현릉(顯陵)
조선 제5대 문종(왼쪽) · 현덕왕후(오른쪽)의 동원이강릉이다
문종(1414~1452)은 제4대 세종의 맏아들로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2년만인 39세에 승하하였다
현덕왕후는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갔다 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1437년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올랐으며 1441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떴다
사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되었다
현릉(顯陵)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 5월에 승하하여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 해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 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건원릉 가는 길
건원릉(健元陵)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준다
건원릉(健元陵)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묻히기 원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太祖 健元陵 神道碑)
비각 안에 두 개의 비 중 왼쪽 조선 건국 17년에 세워진 태조 건원릉 신도비다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비(大韓 太祖 高皇帝 健元陵碑)
조선 멸망 10년 전 광무 4년(1900 · 고종 37년)에 세워진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비다
조선의 흥망이 두 비 사이에 있는 듯하여 묘한 감회에 젖는다
소전대(燒錢臺) · 망예위(望瘞位)
제의식은 손을 씻고 헌작함으로써 물에서 시작하여 소전대(후에 예감)에서 축문을 불사름으로써 불로 끝난다
또한 제의식도 수방(水方)인 동방에서 시작하여 화방(火方)인 서방에서 끝난다
또 축문을 태울 때 이를 지켜 보던 일을 망예라 하고 그 자리를 망예위라 한다
배위(拜位)
건원릉은 정자각 위 오른편에 배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것이다
조선의 왕릉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망예위 보다 작은 크기다
목릉(穆陵)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 · 의인왕후 박씨 ·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다
동원이강릉이다
목릉(穆陵)
난간석과 혼유석 · 망주석 1쌍 ·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동구릉에서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능이다
혼유석(魂遊石)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고 혼유석의 무게 7, 8톤에 달해 건릉 조성 당시 혼유석을 옮기는 데 1,000명이나 동원됐다고 한다
그 혼유석 밑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결국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도 9대 성종 능인 선릉과 11대 중종 능인 정릉을 훼손했을 뿐이다
꽃 문양의 망주석 · 문인석 · 무인석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 중 ·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인석 · 하계에는 무인석이 배치되었다
병풍석(屛風石)
사람 머리 위에 양의 모양이 뚜렸하다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십이지신상이 보이지 않는다
한 바퀴를 돌아도 안보여 두 바퀴째 돌 때 뭔가 알 듯한 분들이 오셨기에 여쭈어봤더니
요거 양이잖아요 고려 이후에는 머리 위에다 만들었어요 하며 일러주신다
정자각 · 비각
사진을 만드는데 양의 위치를 일러주신 분들이 오시더니 죄송하지만 사진 좀 만들어 주실수 있냐고 하신다
경주에서 자료를 만들러 오셨는데 카메라 뱃터리가 아웃이란다
의인왕후릉(懿仁王后陵)
두 분의 부탁으로 오른쪽의 의인왕후릉은 가보지도 못하고 다음 능으로 갔다
인목왕후릉(仁穆王后陵)
목릉 건너편에 있는 능으로 다음 능으로 가기 전에 만들었다
다음 능으로 가면서 인목왕후릉의 조각이 생동감이 있다고 몇 번을 설명하시며
인목왕후릉을 못보게한 게 미안해선지, 사진을 만들어 주는 게 고마워선지 같이 오신 분이 능을 설명해 주신다
휘릉(徽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으로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효종 · 현종 ·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혼유석(魂遊石)
잡귀를 막는 귀면(鬼面)을 새긴 둥근 북을 닮은 고석(鼓石) 5개가 받치고 있다
태조의 건원릉과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의 고석이 5개다
휘릉 정자각
양 옆에 익랑이 붙어 있는 휘릉의 정자각을 비추는 햇살이 많이 기울었고 능은 이미 그림자 속이다
5시 30분까지는 촬영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남향으로 앉은 능 뒤로 해가 기울면 능은 산 그림자 속인걸 이 때야 알았다
원릉(元陵)
조선 제21대 영조 · 계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조선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이르며 재위기간이 52년이다
정순왕후는 원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5세의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정되었다
원릉(元陵)
병풍석은 세우지 않고 난간석만 세운 쌍릉이다
점점 기울어가는 햇살에 마음이 급해진다
원릉(元陵)
혼유석과 망주석이 새로 세운 듯 깨끗하다
망주석(望柱石)
양쪽 망주석의 세호가 각기 아래와 위로 향하고 있다
문인석(文人石) · 무인석(武人石)
형상이 간결해지고 크기 또한 작아져 유약해 보인다
장명등(長明燈)
이 때부터 연꽃이 없어지고 모란이 나타났다
정자각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경릉(景陵)
조선 제24대 헌종 · 원비 효현왕후 · 계비 효정왕후 능이다
조선왕릉 유일의 삼연릉(三連陵)이라며 능 관리인이 말씀하시지만 시간이 없어 통과했다
아쉬움에 능이 살짝 보이는 곳에서 한 장 만들었다
숭릉(崇陵)
조선 18대 현종 · 명성왕후의 능이다
현종은 제17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조선 왕 중 유일하게 타국 청나라에서 태여났다
숭릉(崇陵)
능 관리인과 경주에서 오신 분이다
시간이 없어 인물이 들어가도 셔터는 눌러야 한다
숭릉 문인석
중계에 홀을 들고 미소를 머금고 있다
숭릉(崇陵) 난간석 축(丑) 자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다
난간석엔 12지신이 글자로 써있다
연꽃 · 모란꽃 무늬 장명등
숭릉(崇陵)
숭릉 초계에 세워져 있는 망주석의 세호도 보인다
숭릉 정자각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모두 맞배지붕인데 이곳만 팔작지붕이다
해가 완전히 기울어 갈 길이 먼 두 분은 벌써 저 멀리 가셨다
숭릉(崇陵)
다시 돌아 본다
혜릉(惠陵)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혜릉 사진을 만들고 가겠다 하니 그럼 저흰 먼저 가겠다고 하신다
혜릉은 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의 능으로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 세상을 떴고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증되었다
혜릉(惠陵)
한 줄기 빛이 길게 누운 혜릉을 뒤로하고 정문으로 향했다
그날 마지막으로 나온 탐방객이었던 것 같다
시간의 아쉬움이 남은 걷기였다
재실(齋室)
동구릉을 나오기 전 만들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9.9km, 소요시간 4시간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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