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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의식의 궤범(軌範)'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이다

그중에 왕이 읽어보도록 정성껏 만든 어람용 의궤가 있다. 왕이 열람한 후에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모아 보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건너간 외규장각 의궤는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

《외규장각(外奎章閣) 의궤(儀軌), 그 고귀함의 의미》는

외규장각 의궤 전량(297책) · 서궐도안 · 조영복 초상 · 효종 상시호 옥책 등 국가지정문화재 및 유네스코 기록유산 의궤

도설로 복원한 궁중 연향 복식 등 460점이 전시되어 있다

 

 

외규장각과 의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조선 왕실의 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보물창고이다

왕실의 상징인 금보(金寶)와 옥책(玉冊) · 선왕(先王)의 보배 같은 글귀와 유구한 역사를 담은 왕실족보 등 조선의 정체성이자 왕조의 역사 그 자체이다

그중에 가장 많은 것이 의궤(儀軌)이다

 

 

 

 

보록(寶盝) · 인함(印函) / 조선

어보(御寶)를 담는 외함

 

 

 

 

외규장각지안(外奎章閣止案) / 1856년(철종 7)

1856년(철종 7) 11월에 작성한 강화도 외규장각의 형지안(形止案)이다

형지안이란 지금의 관리 대장과 같은 것이다

내용을 보면 외규장각의 내부 구조와 물품의 보관 상태를 알 수 있다

중앙 안쪽에 3층의 봉안장이 있었고, 여기에 왕과 왕실 구성원들이 책봉될 때 받은 옥책(玉冊) · 금보(金寶) · 교명(敎命)을 보관하였다

왕실의 위상을 직접 상징하는 가장 귀한 의물(儀物)들이다

나머지 공간에는 탁자들을 배치했는데, 그 위에 각종 서적이나 족자(簇子)들을 올려 두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 것이 의궤이다

1856년 형지안 1책에서 확인되는 의궤만도 430여 책에 달한다

왕실의 가장 귀한 물건들과 함께 보관할 만큼, 의궤는 귀한 책이었다

 

 

 

 

철종(哲宗)의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왕비 책봉 옥책(玉冊) / 대한제국 1908년 · 옥

 

 

 

 

홍재전서(弘齋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 · 선원보(璿源譜)

정조의 글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인쇄본 / 1814년(순조 14)

정조의 글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필사 / 1787년(정조 11)

조선 왕실 족보「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조선

 

 

 

 

명나라 숭정황제의 글씨 탑본 / 조선

외규장각 중앙 봉안장의 옆 탁자에는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 재위 1628~1644)의 글씨를 탑본한 족자가 9점 놓여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을 때 군대를 파견해 준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를 높이 기렸고

사대부들은 숭정황제의 글씨를 탑본이나 첩으로 만들어 소장하기도 했다

「사무사(思無邪)」라고 쓴 이 글씨는 공자가 고대 중국의 시를 모은 경전 「시경(詩經)」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꼽은 것이다

「생각의 사특함이 없다」는 뜻이다

 

 

 

 

흑칠함(黑漆函) / 조선

 

 

 

 

주칠함(朱漆函) / 조선 후기

 

 

 

 

왕의 책 외규장각 의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 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이다

한번에 3부에서 많게는 9부를 만들었는데, 그중 1부는 왕이 읽어보도록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업무를 맡은 관청이나 국가 기록물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로 보냈다

왕에게 올린 것을 어람용(御覽用) ·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한 것은 분상용(分上用)이라고 한다

외규장각 의궤는 몇 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왕을 위해 만든 어람용이다

왕이 열람을 마친 후 어람용 의궤는 왕실의 귀한 물건들과 함께 규장각 또는 외규장각에 봉안(奉安)하였다

후대의 왕들이 꺼내보면서 예법에 맞는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왕을 위한 책 외규장각 의궤는 후세를 위한 모범적 선례(先例)이자 영구히 전해야 할 왕조의 정신적 문화자산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람(御覽)의 품격

어람용 의궤는 일반 서책에서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장황(粧䌙) 방법을 썼다

최상의 재료만 모아서 가장 뛰어난 솜씨의 장인(匠人)이 조선만의 미의식으로 완성하였다

그 결과 어람용 의궤는 일반적인 서책과는 다른 격조를 지니게 되었다

눈길을 사로잡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화려함 · 일부러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아함 · 이것이 바로 어람의 품격이다

 

 

 

 

어람용 헌종국장도감의궤(1) / 1850년(철종 1) · 분상용 헌종국장도감의궤(1) / 1850년(철종 1)

 

 

 

 

분상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 1725년(영조 1)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비교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어람용 의궤는 최상의 재료를 써서 최고의 전문가가 만들었다

은은하게 품위가 배어나는 비단 표지와 반짝반짝 빛나는 놋쇠장식, 깨끗하고 윤기나는 고급 종이에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쓴 글자

섬세한 솜씨로 그려넣은 그림까지 어느 하나 평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

분상용 의궤는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중요한 국가행사의 기록이기 때문에 종이로 표지를 만들고 실로 묶는 일반적인 서책보다 격을 높였지만

튼튼한 삼베로 표지를 만들고 화려한 장식은 생략하여 실용성을 높였다

 

 

 

 

어람용 의궤의 장황(粧䌙)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대부분 초록색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푸른색 비단이나 염색하지 않은 비단을 사용하기도 했다

비단에 들어간 무늬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구름무늬이다. 두둥실 뜬 뭉게구름에 하늘하늘한 꼬리를 드리운 모습이다

화려한 연꽃넝쿨무늬가 표현된 비단도 많이 썼다. 풍성한 잎사귀가 달린 넝쿨이 큼직한 연꽃 봉오리를 감싸고 있다

구름이나 연꽃 사이사이 반짝이는 보배무늬가 들어간 비단도 보인다

영조(재위 1724~1775) 때에는 왕실에 앞장서서 검소함을 강조했다

이때 만든 의궤는 별다른 무늬가 없는 비단을 사용하여 단아한 멋을 살렸다

 

 

 

 

어람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하) / 1725년(영조 1)

 

 

 

 

어람용 의궤의 장황(粧䌙)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대부분 초록색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푸른색 비단이나 염색하지 않은 비단을 사용하기도 했다

비단에 들어간 무늬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구름무늬이다. 두둥실 뜬 뭉게구름에 하늘하늘한 꼬리를 드리운 모습이다

화려한 연꽃넝쿨무늬가 표현된 비단도 많이 썼다. 풍성한 잎사귀가 달린 넝쿨이 큼직한 연꽃 봉오리를 감싸고 있다

구름이나 연꽃 사이사이 반짝이는 보배무늬가 들어간 비단도 보인다

영조(재위 1724~1775) 때에는 왕실에 앞장서서 검소함을 강조했다

이때 만든 의궤는 별다른 무늬가 없는 비단을 사용하여 단아한 멋을 살렸다

 

 

 

 

의궤

의궤는 매번 3부 내지 9부를 만들었는데, 그중에 단 1부만은 최고급 재료로 지극한 정성을 들여 만든 후 왕에게 올렸다

이것을 어람용 의궤라 한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은 몇권을 제외한 대부분이 어람용이다

 

 

 

 

의소세손책례도감의궤 / 1751년(영조 27)

1751년(영조 27)에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을 왕세손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惠嬪 ·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1750년(영조 26) 8월 27일에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원손(元孫)으로 불렸다

원손을 크게 아낀 영조는 바로 이듬해에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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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는 면은 왕세손 책봉 때 수여하는 죽책(竹冊)의 제작과 관련한 부분이다

크기가 일정한 대나무 쪽을 5개씩 한 첩으로 묶어서 만든다고 되어 있다

대죽(大竹) 2통 · 초주지(고급 한지) 반장 등 제작에 사용한 각종 재료의 이름과 수량도 꼼꼼하게 적었다

 

 

 

 

사도세자묘소도감의궤(하) / 1677년(영조 38)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1735~1762)가 세상을 떠난 후 묘소를 조성할 때의 과정과 절차를 기록한 의궤의 하책이다

묘소 조성을 총괄한 묘소도감의 하부 기관인 조성소(造成所) · 노야소(爐冶所) · 대부석소(大浮石所) 등의 업무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묘역에 건물을 짓거나 · 각종 철물을 제작하거나 · 석재를 다듬는 등 능을 조성할 때 필요한 작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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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는 면은 장례 기간 동안 사도세자를 제사지내던 관청인 혼궁도감(魂宮都監)에서 조성소에 보낸 공문서이다

묘소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도록 제상과 병풍 등 몇몇 기물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보내는 물품의 목록도 적었다

왕실 장례에서 필요한 기물을 매번 새로 만들지 않고, 다른 관청에 보관하던 것들을 재사용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영조왕세제책례도감의궤(상) / 1721년(경종 1)

1721년(경종 1) 영조(재위 1724~1776)를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지금 보는 면은 책례도감의 하위 기구 중 하나인 일방(一房)의 관원 명단이다

일방에서는 왕세제 책례 때 수여하는 교명 · 죽책 · 면복 등의 제작을 담당하였는데

품목마다 직책과 이름을 구분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업무분장이 확실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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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여나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1721년 후사가 없던 이복형 경종(景宗 1720~1724)에 의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얼마 후 경종이 결국 병으로 승하하자 1724년(영조 즉위) 왕위에 올라 조선 21대 왕이 되었다

 

 

 

 

희빈중궁전책례도감의궤 / 1690년(숙종 16)

1690년(숙종 16)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1659~1701)를 왕비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희빈 장씨는 중인 집안 출신으로 궁녀가 되었다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왕자를 낳아 희빈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왕비가 되었다

이때의 왕비 책봉 의식 절차 · 의식의 준비 및 진행과정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이 의궤에 정리되어 있다

지금 보는 면은 왕비 책봉 때 하사한 금보와 옥책 등 의물 제작 내역을 적은 부분이다

 

 

 

 

단 하나의 책, 외규장각 의궤 유일본

의궤는 한 번에 3부 · 9부를 만들었지만 지금 단 한 부만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의궤를 「유일본」이라고 한다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유일본 위궤가 29책 포함되어 있다

외규장각 의궤 중 유일본 중에 의소세손의 장례에 관한 것이 있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와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이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의 첫 번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의 큰 사랑을 받아 태어나고 얼마 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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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손의 장례는 이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의식 절차를 새로 마련했다

장례 복식과 각종 물품 등의 격식을 왕세자보다 낮추고 세자빈보다 높여서 왕세손의 지위를 명확하게 설정했다

이러한 내용들이 이 의궤들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 왕세손의 장례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상 · 하) / 1752년(영조 28)

1752년(영조 28) 영조의 맏손자 의소세손(1750~1752)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이다

분상용이 따로 남아 있지 않은 유일본이자 조선시대 세손의 장례 기록으로서도 유일한 자료이다

상권 마지막에는 의소세손의 관과 시책(諡冊), 부장품과 각종 제사 물품을 싣고 묘소로 가는 발인(發引) 행렬을 그린 반차도가 28면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다른 반차도에 비해 인물 및 기물의 형태와 색채가 선명하여 완성도가 높다

만장(挽章)의 경우 총 60개로 숫자를 줄여서 세자의 장례보다 격을 낮추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세손을 특별히 아꼈던 영조의 배려로 관을 실은 가마 대여(大輿)의 뒤에 세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했던 세손강서원 및 세손위종사 관원들을 따르게 했다

다른 발인반차도와 달리 횃불을 든 봉거군과 망촉(촛불)을 든 망촉군이 표현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행렬 규모를 줄였기 때문이다

 

 

 

 

헌종실록(憲宗實錄) / 1851년(철종 2)

1834년 11월부터 1849 6월까지 헌종 재위 기간의 일을 수록한 실록이다

권 제13 헌종 12년(1846) 1월 26일 기사에 익종(翼宗)의 무덤 수릉(綏陵)의 이전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보인다

헌종이 대신들에게 수릉을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자 영부사 조인영 등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아뢰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없어지고, 전주사고에 보관하던 것만 가까스로 전란을 피했다

이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추가로 인쇄하여 새로 건립한 사고에 분산시키고, 전주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에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현종 때 마니산 사고를 인근 정족산으로 옮기면서 실록도 이봉(移奉)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정족산사고본이다

전시된 실록은 정족산사고본(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전주시가 현대인쇄기술로 다시 펴낸 것이다

 

 

 

 

익종수릉천봉도감의궤 / 1846년(헌종 12)

1846년(헌종 12) 양주 천장산(天藏山)에 있던 효명세자(익종 · 1809~1830)의 묘 수릉을 용마봉(龍馬峯) 아래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본격적인 업무 내용을 기록하기에 앞서서 수릉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헌종과 신료들 사이에 오고간 논의의 구체적인 내용을 앞부분에 수록하였다

*

헌종이 처음 수릉 이전을 제안하자 신하들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은 실록의 기록과 동일하다

이후 헌종과 신하들은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여러 차례 만나 논의도 하고

실제로 수릉의 풍수 입지에 문제가 있는지 현장 점검도 2차례나 진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 주요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과 국정 운영 기조로서의 군신합의(君臣合議)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익종의 어린시절 글씨 / 1819년(순조 19)

익종(翼宗 · 1809~1930)이 11세 때 쓴 글씨로 만든 첩이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박영원(朴永元 1791~1854)에게 써서 내려준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구절로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자는 장수한다(知者樂仁者壽)」는 내용이다

 

 

 

 

옥책 탑본 / 대한제국 1902년(광무 6)

1902년 고종황제가 자신의 양아버지인 문조익황제(익종)와 어머니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에게 올린 옥책의 탑본이다

광무 3년(1899)에 익종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시호를 익황제라고 했었는데, 이때 존호를 다시 올려서 「굉유신휘수서우복(宏猷愼幑绥緖佑福)」이라고 하였다

 

 

 

 

궁궐 건축의 모든 것

외규장각 의궤 중에는 건축공사에 관련된 것도 있다

궁궐이나 종묘 · 왕실 사당을 새로 짓거나 수리한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런 의궤를 통틀어서 「영건의궤(營建儀軌)」라고 부른다

 

 

 

 

숙종실록(肅宗實錄) / 1728년(영조 4)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숙종 재위 기간의 일을 기록한 숙종실록이다

1720년(경종 즉위) 11월에 편찬을 시작하여 1728년(영조 4) 3월에 완성하였다

어진박물관 소장본은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전란을 피한 전주사고본(정족산사고본)을 저본으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전주시가 현대 인쇄기술을 적용하여 펴낸 것이다

권 제25 숙종 19년(1693) 3월 23일 정묘일에 경덕궁(敬德宮 지금의 경희궁)과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경희궁 수리 중 땅 속에서 인골(人骨)이 발견되자 숙종이 잘 수습하여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령하였다는 내용이다

숙종실록에는 1693년 3월부터 7월까지 진행된 경희궁 보수 공사 관련 언급이 단지 4건 수록되었는데, 그 중 최초의 기사이다

 

 

 

 

경희궁수리소의궤 / 1693년(숙종 19)

1693년(숙종 19)에 추진한 경덕궁(敬德宮 지금의 경희궁)의 보수 공사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이다

분상용 의궤가 전하지 않는 유일본이다

이 의궤는 공사를 담당한 관청인 수리소가 설치된 1693년 3월부터 공사가 끝난 7월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수리소 설치 이전에 이미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덕궁이 처음 건립된 광해군 대부터 인조 대를 거쳐 현종 대에 이르는 동안 훼손된 전각들을 포함하여

40여 채의 건물에 대한 수리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어서 경희궁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궐도안(西闕圖案) / 조선 19세기

지금의 경희궁 전경을 그린 초본이다

12장의 종이를 이어 붙여서 경희궁의 여러 전각과 주변 언덕의 자연경관을 담았다

경희궁은 1829년(순조 29)에 큰 불이 나서 1831년(순조 31)까지 2년여에 걸쳐 새로 지었는데

이때의 공사 내용이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주요 전각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도 실려 있는데 〈서궐도안〉과 비교해 보면 건물 배치나 구도가 약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서궐도안〉은 순조 때 경희궁에 불이 나기 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궐도안(西闕圖案) / 조선 19세기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을 시작으로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경복궁은 심하게 훼손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렸다

지금의 경희궁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서궐도안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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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희당(緝熙堂) · 추모당(追慕堂) 등이 있다

 

 

 

 

남별전중건청의궤 / 1677년(숙종 3)

태조 · 세조 · 숙종 · 영조 · 순조의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인 남별전(南別殿)을 고쳐 지을 때 작성한 의궤이다

「미포상하식(米布上下式)」이라는 항목에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품삯이 정리되어 있다

목수 · 조각장 · 석수 등 전문기술자인 장인들은 한 달에 쌀 9말을 받았는데, 단순 일꾼들도 똑같이 9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한 장인들은 의무적으로 동원되었던 것과 달리 일꾼들은 돈을 주고 모집하였기 때문에

일을 하려는 사람이 적을 때에는 기술자만큼이나 많은 돈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 1824년(순조 24)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1770~1822)를 제사지내기 위해 사당을 짓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중에 「장료식(匠料式)」이라는 항목이 있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품삯 내역이다

이 시기에는 장인들의 품삯이 일반 일꾼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장인들 사이에서도 기술분야 및 일의 양에 따라 지급받는 액수가 달랐다

18세기 후반 들어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전문 기술자인 장인들도 적절한 대가를 받고 일을 하게 되었고

일반 일꾼들은 그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임금 수준이 낮아지게 된 것이다

 

 

 

 

생생하게 그림으로

사람들은 의궤를 「조선기록문화의 꽃」이라고 말한다

다른 기록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아름다운 그림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대상의 세부 특징을 잘 묘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빨강 · 파랑 · 노랑 · 초록 등 천연색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의궤 속 그림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진을 보듯, 조선시대 국가 행사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각자료이다

글자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림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궤 속 그림은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목적을 가진 행사였는지, 예법에 맞는 의례절차와 형식을 갖추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형태를 설명하는 도설(圖說)

의궤 속 그림 중 특정한 행사 장면이나 건물 구조 · 행사 때 사용한 건물의 형태 등을 그린 것을 도설이라 한다

설명하려는 대상의 기본적인 생김새뿐만 아니라 비례감 · 색감 · 전반적인 분위기까지 글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외규장각 의궤 297책에서 도설이 포함된 의궤는 172책(약 60%)이다. 그중 대략 70%에 해당하는 115책이 왕실장례식과 관련한 의궤들이다

기간이 길고 매우 복잡한 장례를 차질없이 치르기 위해서 명확하고 상세한 규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만큼 도설도 많이 수록하였던 것이다

 

 

 

 

현경혜빈양례도감의궤(3) / 1816년(순조 16)

1816년(순조 16) 혜경궁으로 더 잘 알려진 혜빈 홍씨(惠嬪 洪氏 · 1735~1815)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총 4권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권3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기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원소(園所 · 묘소)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쓸 것과 신주(神主)를 모시는 혼궁(魂宮)에서 사용할 것 두 부류를 제작하였는데

과자류와 과일류를 담는 우리(于里)와 촉대(燭臺) · 향로 등 총 133건의 명칭과 수량 · 재질 · 크기 · 무게를 적었다

뿐만 아니라 제기마다 그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채색한 도설을 바로 옆에 실었다

 

 

 

 

산뢰(山罍) / 조선 20세기 · 희준(犧尊)과 상준(象尊) / 조선 18세기

산뢰는 산과 구름 · 우레 문양을 넣은 술항아리다

각종 제사 때 술 따르는 용기들을 올려놓는 준소상(樽所床)에 한 쌍을 진열한 후 한 쪽에는 맑은 물 · 다른 한 쪽에는 맑은 술을 담았다

몸체에 굵은 띠를 둘러 구획한 후 우레 · 구름낀 산봉우리 · 삼각형 문양을 넣은 모습이다

우레와 구름은 왕의 은덕이 우레나 구름처럼 세상에 널리 퍼진다는 의미이다

산뢰에 담긴 물과 술은 표주박 모양의 긴 국자로 뜬다

손잡이에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어서 용작(龍勺)이라고도 한다

술항아리 하나마다 용작 하나씩을 갖추는 것이 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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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犧尊)은 소의 모습을 본뜬 술항아리이고, 상준(象尊)은 코끼리의 모습을 본뜬 술항아리이다

제사 때 술 따르는 용기들을 올려놓는 준소상에 한 쌍씩 올려놓고 한 쪽에는 맑은 물 · 다른 한 쪽에는 제사용 술을 담았다

이 희준과 상준의 배 부위와 뚜껑 안쪽에는 「문희묘(文禧廟)」라는 글자가 있다

문희묘에서 사용한 제기라는 표시이다. 문희묘는 문효세자(1782~1786)를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정조의 맏아들로 출생 이듬해에 바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지만, 5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효의왕후국장도감의궤(3) / 1821년(순조 21)

1821년(순조 21)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1753~1821)의 장례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총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세 번째 책에 각종 제사 때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제기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제기마다 명칭과 수량 · 재질 · 크기 · 무게를 적고, 바로 옆에 제기의 모습을 그린 채색도설도 수록하였다

신주를 모시는 혼궁에서 사용한 제기 중 가장 먼저 소록된 것은 술항아리인 희준(犧尊)과 상준(象尊)이다

소와 코끼리 모습을 본뜬 그릇의 형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현경혜빈원륭원원소도감의궤(하) / 1816년(순조 16)

1815년(순조 15) 사도세자의 빈(嬪)이자 혜경궁 홍씨로 더 잘 알려진 헌경혜빈(獻敬惠嬪 · 1735~1815)이 훙서(薨逝)하자

사도세자의 묘소 현륭원에 합장하면서 제작한 의궤이다

상 · 하 2책 중 하책 첫 머리에 사수도(四獸圖)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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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는 장면은 사수도 중 북쪽을 수호하는 현무(玄武)의 모습이다

이전에는 거북과 뱀이 뒤엉킨 귀사합체(龜巳合體) 형상이었으나

이 시기의 현무는 뱀이 사라지고 입에서 상서로운 기운인 영기(靈氣)를 뿜는 거북만 남았다

이러한 변화는 영조 때 왕실 상례(喪禮)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사수도 도상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상) / 1757년(영조 33)

1757년(영조 33) 숙종의 두 번째 비 인현왕후 김씨(1687~1757)의 묘소 조성에 관한 의궤이다

상 · 하 2책 중 상책 첫머리에 사수도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보는 장면은 사수도 중 백호(白虎) · 주작(朱雀)의 도설이다

이전 시기에 백호는 불꽃무늬인 화염문(火焰文)을 두른 신령한 모습이었으나

이제는 화염이 사라진 채 산에서 어슬렁 걸어 나오는 호랑이(출산호 出山虎) 모습으로 바뀌었다

가장 획기적으로 변한 것은 주작이다

머리와 다리가 3개인 삼수삼족(三首三足)의 봉황에서 하늘을 나는 붉은 새의 형태로 바뀌었다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하) / 1849년(철종 즉위)

1849년(철종 즉위) 조선 제24대 왕 헌종(재위 1834~1849)이 승하하자

이보다 앞서 세상을 뜬 왕비 효현왕후의 묘소 바로 옆에 능을 조성하면서 만든 의궤이다

상 · 하 2책 중 하책에 찬궁(櫕宮)에 그려 붙였던 사수도(四獸圖) 도설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보는 장면은 사수도 중 청룡(靑龍)의 도설이다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으로 신성함을 상징하는 불꽃무늬 화염문(火焰文)을 두르고 몸을 S자형으로 틀어 날고 있다

이전 시기에 ⊃자형에 비해 더 역동적으로 바뀐 모습이다

주변에는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배치되어 있다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하) / 1843년(헌종 9)

1843년(헌종 9) 헌종(憲宗)의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1828~1843)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묘소 경릉을 조성한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상 · 하 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권 첫머리에 찬궁도(櫕宮圖)가 수록되어 있다

찬궁은 왕과 왕비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매장하기 전 임시로 모셔둘 때 사용한 집 모양의 구조물이다

지금 보이는 도설 속의 찬궁은 왕릉의 부속 건물인 정자각에 설치했던 것으로 나무로 골격과 벽체를 세우고 죽망(竹網)으로 지붕을 덮었다

내부 사방 벽에는 종이를 바른 후 방위에 맞춰서 청룡(靑龍) · 백호(白虎) · 주작(朱雀) · 현무(玄武)를 그렸다

 

 

 

 

정조의 왕릉에 묻었던 명기(名器) / 1800년(순조 즉위) · 효종에게 올린 시호 옥책 / 1659년(헌종 즉위)

1800년(순조 즉위) 정조(재위 1776~1800) 장례 때 능에 같이 묻었던 명기이다

명기란 망자가 저승에서 사용하도록 그릇 · 장신구 등 각종 기물이나 노비 · 가축 등을 작게 만들어서 무덤에 넣어주는 부장품이다

효종의 장례 때에는 소(筲) · 앵(甖) · 갱발(羹鉢) · 와부(瓦釜) · 작(爵) · 보(簠) · 궤(簋) 같은 제기(祭器) 종류와

와훈(瓦壎) · 와경(瓦磬) · 와특종(瓦特鐘) 같은 악기, 갑주(甲胄) · 동궁(彤弓) · 과(戈) 같은 무기 등을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조의 명기 구성과 일치하는 항목이 많아 주목된다

효종의 능에 부장한 명기들도 이와 비슷한 크기 및 형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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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헌종 즉위) 조선 제17대 왕 효종(재위 1649~1659)이 승하하자

선문장무(宣文章武) 신성현인(神聖顯人)이라는 시호(諡號)와 효종(孝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면서 제작한 옥책이다

길게 다듬은 옥 6편을 묶어서 1첩을 만들고 이 첩을 다시 12개 연결한 후 그 위에 글귀를 새기고 금니(金泥)를 채웠다

시호란 존귀한 사람이 죽은 후 그의 공덕을 현창하기 위해 생전의 행적에 합당한 의미를 담아 지어주는 호칭이다

국왕의 경우 승하한 직후에 신하들이 모여 그 업적을 살펴서 지어 올렸다

묘호는 돌아가신 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에 붙인 호칭으로서 역시 신하들이 의논하여 정하였다

왕의 시호와 묘호가 정해지면 그 내용을 옥(玉)에 새겨  책처럼 엮어서 시책(諡冊)을 만들었다

효종의 발인 행렬을 그린 「효종국장도감의궤(孝宗國葬都監儀軌) 상」 〈발인반차도〉 제10면에 보이는 '시책요여(諡冊腰轝)'에 실었던 시책이다

 

 

 

 

효종국장도감의궤(상 · 하) / 1659년(현종 즉위)

1659년(현종 즉위) 5월에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장례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이다

장례를 주관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해서부터 5개월 뒤 시신을 묘소인 영릉(寧陵)으로 옮겨 장사지내고

창경궁으로 돌아와 문정전(文政殿)에 신주를 봉안하기까지 국왕 장례 전 과정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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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 하 2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상권 마지막에 30면에 걸친 〈발인반차도〉가 수록되었다

장례 기간 동안 빈전(殯殿)에 모시고 있던 효종의 혼백(魂帛)과 재궁(梓宮 관)을 모시고 묘소를 가는 발인 행렬을 그린 것이다

선도(先導) 관원으로 시작해서 국왕의 평소 행차 때와 같은 구성의 길의장(吉儀仗)과 국왕 장례에서만 쓰는 의장인 흉의장(凶儀仗)

그 뒤를 따르는 여러 관원들로 이루어진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 국장 발인 행렬의 일반적인 구성을 따르고 있다

 

 

 

 

효종국장도감의궤(상 · 하) / 1659년(현종 즉위)

 

 

 

 

왕조의 정통을 세우다

바른 예법으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다. 권위가 있으면 위상도 높아진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실의 위상을 정립하고 강화하기 위한 의례가 각별히 중요했다

특히 왕에게는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사회적 인정, 즉 정통성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다

정통성에서 나라와 백성을 이끌 자격과 명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왕과 왕실의 위상과 정통성은 의례를 통해 시각적으로 들어나고 확인되었다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를 공포하거나, 국왕에게 위엄을 부여하거나, 왕실의 지위를 격상하는 의례이다

바른 예법에 따라 엄숙하면서도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왕과 왕실의 특별한 존재감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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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가 왕세자 책봉 때 받은 교명(敎命) / 1812년(순조 12)

왕세자 책봉 때 수여하는 교명은 국왕이 왕세자에게 내리는 훈유(訓諭)와 당부를 적은 것이다

왕조의 미래를 책임질 왕세자의 지위가 존귀하면서도 막중함을 강조하고, 본분과 책임을 다하여 훌륭한 왕이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효명세자의 교명은 책례도감의 하부 기구인 일방(一房)에서 만들었다

홍색 · 황색 · 남색 · 백색 · 흑색의 오색 비단에 먹으로 내용을 쓴 후 옥으로 만든 축(軸)을 대어 만 두루마리 형태이다

교명이 시작하는 홍색 비단에 오르내리는 용 두 마리와 교명(敎命)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비단을 짤 때 무늬로 넣어 직조한 것이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중 「일방의궤」에 교명의 크기, 재질 및 형태를 그린 도설(圖說)이 실려 있다

실제 유물과 비교해보면 동일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효명세자가 왕세자 책봉 때 받은 옥인(玉印) / 1812년(순조 12)

왕세자 책봉의 핵심은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보는 앞에서 왕이 세자에게 죽책과 교명 그리고 옥으로 만든 도장 옥인을 전해주는 것이다

옥인은 왕세자의 상징으로서 실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의례용 도장이다

효명세자의 옥인은 책례도감의 하부 기구인 이방(二房)에서 만들었다

정사각형의 보신(寶身) 위에 머리를 치켜 든 거북이 앉아 있는 형태의 보뉴(寶鈕)를 일체형으로 조각하고 붉은 인수(印綬)를 달았다

바닥면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고 새겼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에 옥인의 형태를 그린 도설도 수록되어 있다

 

 

 

 

문효세자의 책례(冊禮) 장면을 그린 병풍 / 1784년(정조 8)

문효세자의 왕세자 책봉 의례 장면을 그린 병풍 8폭 중 제2폭~제4폭이다

왕이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 장면을 그린 〈왕세자선책도(王世子宣冊圖)〉이다

그림 속에 보이는 건물은 창덕궁 인정전이다

전각 중앙에 정조가 앉았던 어좌(御座)가 보이고, 그 앞으로 신하들이 예복을 입고 엎드려 있다

오른쪽에 엎드린 신하들 앞에 놓인 탁자에는 왕세자에게 줄 교명과 죽책 · 옥인을 올려놓았다

책봉 선포가 끝나면 담당 관원들이 이 의물(儀物)을 받들고 중희당으로 가서 왕세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전각 뜰에는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서서 왕세자의 선포를 지켜보고 있다

 

 

 

 

효명세자가 왕세자 책봉 때 받은 죽 / 1812년(순조 12)

효명세자가 책봉 때 받은 죽책으로 붉은 대나무 조각 36개를 6개씩 연결하여 만들었다

죽책은 장차 왕위를 계승할 사람임을 선포하는 일종의 임명장이다

앞면에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내용의 왕명을 새긴 후 금니(金泥)로 글자를 채우고, 위 아래를 넝쿨무늬로 장식한 변철(邊鐵)로 마무리하였다

효명세자의 죽책은 책례도감 소속 일방(一房)에서 만들었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중 「일방의궤」에 죽책의 크기와 재질 · 죽책의 형태를 그린 도설은 물론 죽책에 새긴 왕명의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 1812년(순조 12)

제23대 왕 순조의 적장자 효명세자(1809~1830)를 왕세자로 책봉한 과정을 담은 의궤이다

책봉의례(책례 · 冊禮)를 거행하기까지의 논의부터 행사준비과정, 개별 의례의 내용까지 상세하게 수록되었다

왕세자 책례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그런데 당시 문효세자는 겨우 네 살이었기 때문에 장중한 의례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염려되어 의례 절차를 두 단계로 나뉘었다

먼저 인정전에서 왕세자 책봉을 선포하는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를 거행하고

이어서 세자를 모시고 신하들이 희정당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던

왕세자에게 교명 · 죽책 · 옥인을 전달하는 '왕세자자내수책의(王世子自內受冊儀)를 올린 것이다

장차 보위(寶位)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는 중요한 의례인 만큼 실수 없이 예법에 맞게 잘 치를 수 있도록 참여자들의 동선(動線)까지도 일일이 정리해 놓았다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 / 1713년(숙종 39)

1713년(숙종 39) 숙종의 어진 도사(圖寫)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재위 중인 국왕의 얼굴을 화원이 직접 보고 그린 어진 관련 의궤 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앞서 1695년(숙종 21)에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도 장녕전(長寧殿)에 봉안하게 하였는데

이 어진이 숙종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하여 이때 다시 그리게 된 것이다

이때 숙종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어진을 대할 때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해 돌아가신 선왕(先王)의 어진에 올리는 사배례를 살아 있는 왕의 어진에도 적응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국왕의 어진 또한 실제 국왕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며 사배례를 관철시켰다

그 구체적인 의례의 내용이 의궤 속에 수록되어 있다

 

 

 

 

조영석이 그린 조영복 초상화 / 1725년(영조 1)

사대부 출신 화가 조영석(1686~1761)이 자신의 맏형 조영복의 54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1724년(경종 4) 조영복이 충청도 영춘(永春 · 단양)으로 귀양을 가자 그를 찾아가 초본(草本)을 그렸고, 조영복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듬해에 채색한 것이다

1713년(숙종 39) 도사(圖寫)한 숙종의 어진을 1748년(영조 24)에 다시 그릴 때

영조가 이 그림이 실제 조영복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고 칭찬하면서 조영석에게 숙종 어진을 맡아 그려보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조영석은 기예(技藝)로 왕을 섬기는 것은 사대부의 예가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영조는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도 따로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단종장릉봉릉도감의궤 / 1699년(숙종 25)

1698년(숙종 24)부터 1699년(숙종 25)까지 노산대군(魯山大君 · 1441~1457 · 재위 1452~1455)을

단종(端宗)으로 복위하면서 그의 무덤을 왕릉으로 높여 다시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처음에 단종의 무덤은 제대로 된 봉분도 없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지역 향리였던 엄흥도(嚴興道)가 그의 시신을 거두어 가매장하였던 것이다

1516년(중종 11)에서야 가매장한 자리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을 뿐이다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비로서 왕릉의 모습을 갖추고 장릉(莊陵)이라 불리게 되었다

단종의 무덤을 왕릉으로 봉하기 위한 논의 과정과 왕릉으로 고쳐 조성한 공사의 구체적 내용이 의궤에 날자별로 정리되어 있다

왕으로 바뀐 무덤 주인의 지위에 맞추어 왕릉으로서의 격식과 위상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잘 살필 수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때 올린 시호 금보 / 1698년(숙종 24)

1698년(숙종 24) 폐위 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던 단종(재위 1452~1455)을 왕으로

그의 부인 노산군 부인을 왕후(王后)로 복위하고 시호를 지어 올리면서 제작한 금보이다

복위 과정을 기록한 「단종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端宗定順王后復位祔廟都監儀軌)」에 금보의 모습을 그린 도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거북 형태의 보뉴가 달린 점은 동일하지만, 거북의 자세가 약간 다르다

단종 금보에는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지보(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之寶)」 · 정순왕후 금보에는 「단량재경정순왕후지보(端良齊敬定順王后之寶)」를 새겼다

 

 

 

 

동학지(東鶴誌) / 20세기

단종(재위 1452~1455)과 관련된 사찰인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의 문헌자료를 모은 것이다

동학사는 세조(재위 1455~1468)가 직접 행차하여 단종과 단종을 모신 여러 신하들을 제사지낸 사찰이다

지금도 동쪽에 숙모전(肅慕殿)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 단종과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상권에 단종 연간의 중요 사실들을 모은 「단종대왕실기(端宗大王實記)」가 수록되어 있다

더불어 단종과 관련된 인물 및 유적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서

단종이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배당하던 일과 조선 후기의 단종 복위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분무녹훈도감의궤(상 · 하) / 1729년(영조 5)

1729년(영조 5) 3월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 · 이인좌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이들을 분무공신(奮武功臣)으로 책봉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난의 평정을 총지휘한 오명항 등 정공신 15인과 8,776명에 달하는 원종공신을 선정하고, 이들을 포상한 내용을 담았다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예로써 우대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더불어 난을 진압하는 동안 각지에서 중앙에 올린 보고문서, 난의 주동자들을 잡아들인 후 심문한 내용

영조가 역모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비망기(備忘記)까지 다양한 성격의 자료를 총망라하여

무신난을 둘러싼 영조 즉위 초반의 정국을 자세하게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오명항 분무공신화상 / 조선 후기

1728년(영조 4) 3월에 발생한 무신난(戊申亂 ·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녹훈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이라는 작호(爵號)를 받은 오명항(1673~1728)의 공신화상을 베껴 그린 이모본(移模本)이다

오명항은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에 임명되어 무신란 진압을 총지휘하였으며

한 달도 안되어 난을 평정하는 큰 공을 세움으로써 1등 공신이 되었다

 

 

 

 

회맹축 목판(會盟軸 木版) / 조선

1404년(태종 4) 태종이 건국 초기의 삼공신(三功臣 / 개국공신 · 정사공신 · 좌명공신)과 함께 회맹할 때 작성한 회맹문을 판각한 목판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신으로 책봉되면 국왕과 역대 공신 및 그 적장자손들이 모여 신의와 충성을 맹세하는 제례인 회맹제를 열었다

회맹제가 끝나면 당시의 제문과 참석자 명단으로 구성된 회맹축을 제작해서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공신들에게 나누어 준 외맹축은 목판에 새긴 후 인출하는 방식이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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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분무공신교서 / 1728년(영조 4)

1728년(영조 4) 3월에 발생한 무신난(戊申亂 ·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 2등에 녹훈되고 함은군에 봉해진 이삼(1677~1735)의 공신교서이다

무신난을 평정하는 데 이삼이 세운 공로를 치하한 후 공신화상을 그려주고 본인과 부모 및 처자의 품계를 2등급 올려주며

노비와 말, 은자(銀子) 등을 내린다는 내용의 왕명을 적은 것이다

공신으로 책봉되었을 때 국가로부터 받은 은전(恩典)의 내역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상) / 1802년(순조 2)

1802년(순조 2)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1789~1857)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 상 · 하 2책 중 상책이다

세부 의례 절차를 따로 모은 「의주질(儀註秩)에 국왕의 친영의례 절차를 적은 납비친영의(納妃親迎儀) 항목이 보인다

왕비로 간택된 신부가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왕이 직접 나가 신부 부모에게 인사를 올린 후 신부를 데리고 궁궐로 돌아오는 의례이다

유교적 생활의례 정착을 위해 왕실이 앞장서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의례이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 1802년(순조 2)

1802년(순조 2)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1789~1857)의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 상 · 하 2책 중 하책이다

뒷부분에 66면에 걸친 채색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다

별궁(別宮)에서 친영의(親迎儀)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가는 왕과 왕비의 행차 모습을 그린 〈친영반차도(親迎班次圖)〉이다

처음에는 〈친영반차도〉에 왕비의 가마 행렬만 그렸으나 영조 때 이후로는 왕의 가마도 등장한다

수많은 가마와 의장대, 호위 병력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천천히 나아가는 왕의 행차를 장대하게 묘사했다

이어서 왕비의 행차가 뒤따른다

책봉 때 받은 교명 · 옥책 · 금보 · 명복을 앞세우고, 왕비는 큰 가마인 연(輦)을 탔다

 

 

 

 

헌종의 혼례 축하 그림 병풍 / 1844년(헌종 10)

헌종(憲宗 · 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1831~1904)와 혼례를 올린 후

이튿날 문무백관의 축하를 받는 진하(陳賀) 의례 장면을 그렸다

창덕궁 인정전 마당에 예복을 갖추어 입은 신하들이 엎드려 있다

실제로는 경희궁 숭정전에서 거행되었지만, 행사의 경사스러움을 기념하려는 목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인정전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전각 안팍으로 용기(龍旗) · 보검(寶劍) 등 의장과 왕이 타는 가마들이 보이고

화면 아래 담장 너머로 큰북 건고(建鼓)와 편경 · 편종 등 대형의 궁중 악기가 배치된 모습도 보인다

정전에서 거행된 국왕 혼례 축하 의례의 화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예궐반차도 / 18세기 후반

별궁에서 궁궐로 들어가는 신부의 행렬 그림이다

왼쪽 끝 여백에 「궁궐로 가는 행렬 그림」이라고 제목을 썼다

교명 등 의물(儀物)을 실은 가마와 수많은 관원들의 인도를 받은 신부 가마를 그렸다

그림 속에 신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신부의 가마 위에 교(轎)라고 쓴 것으로 보아 후궁인 빈(嬪)의 혼례임을 알 수 있다

후궁의 경우 신랑인 왕이 직접 맞으러 오는 친영례를 생략하고 혼자 궁궐로 이동하였으며

왕비나 왕세자빈이 연(輦)을 타고 가는 것에 비해 빈은 교를 탔기 때문이다

 

 

 

 

친경의궤(親耕儀軌) / 1739년(영조 15)

1739년(영조 15) 1월 28일 영조(재위 1724~1776)가 직접 참여한 친경 의례에 대한 의궤이다

이때 영조는 도성 돌쪽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농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인근의 동적전(東籍田)으로 가서 쟁기질을 했다

이 의례에는 인근 고을에서 선발된 100명의 농민과 75세 이상의 노인 40명 등 일반 백성들도 참여했다

의궤 앞부분에 친경의례가 열린 행사장의 배치도인 친경도가 있다

적전이 내려다보이는 관경대(觀耕臺) 바로 아래 중앙에 왕이 쟁기질을 할 자리인 친경위(親耕位)가 크게 써있고

그 옆으로 대신과 종친 및 여러 신하들의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각자의 자리에는 쟁기질을 몇 번씩 해야 하는지 횟수도 표시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조선

조선시대의 국가 의례는 5가지로 분류하였다

국가 제사는 길례(吉禮) · 국가 및 왕실의 경사는 가례(嘉禮) ·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 ·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흉례(凶禮)이다

이것을 오례라고 하며, 오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책이 「국조오례의」이다

「국조오례의」에는 농사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 선농제(先農祭)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그림 자료와 관련 설명을 모은 「서례(序例)」에서는 〈풍운 · 뇌우 · 산천 · 성황당〉 그림에 붙여 선농단이 도성 동쪽 교외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권2 길례에서는 국왕이 제사를 올릴 때의 절차인 '향선농의(享先農儀)'와

국왕 대신 신하가 제사를 올릴 때의 절차인 향선농섭사의(享先農攝事儀)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국왕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던 친경의례에서 국왕 거동 관련 의식만 수록한 것과 다른 모습이다

 

 

 

 

농사짓기의 수고로움을 그린 경직도(耕織圖) / 조선 후기

경직도는 일 년 동안의 농사 장면과 길쌈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중국 남송 때 절강성 어잠현의 현령이었던 누숙(1090~1162)이

농사 장면과 길쌈 장면을 시와 그림으로 엮어 황제께 바쳤는데, 이것을 후대에 본떠 그린 것이다

원래 45장면이었지만 지금은 농사 장면 12장 · 김쌈 장면 18장이 남아 있다

지금 보는 장면은 벼 베기 · 볏단쌓기 · 도리깨질 · 벼 까부르기이다

그림 위쪽에는 각각의 일감에 어울리는 시를 적었다

국왕은 항상 백성들의 농사짓는 노고를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선농단이 표시된 한양지도 / 김정호 1850년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로 유명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보다 앞서 만든 전국지도 〈동여도(東輿圖)〉 중의 한양 지도이다

중앙을 동그렇게 에워싼 성곽의 오른쪽 밖으로 「선농단(先農壇)」이 보인다. 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이다

선농단은 농경의 신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국왕이 직접 농사 시범을 보이는 친경의례의 시작이 선농단에서 올리는 제사였다

제사를 마친 후 왕은 선농단 오른쪽 '동적전(東籍田)'이라고 표시된 곳으로 갔다

「적전」은 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 땅을 말한다

이곳은 왕이 5번 쟁기를 밀어 밭을 가는 시범을 보였다

 

 

 

 

질서 속의 조화

각자의 역할에 맞는 예를 갖춤으로써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것. 조선이 의례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 모습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예를 실천하며 함께 만드는 질서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안락함은 크게 보면 나라를 경영하는 지향점이지만, 작게는 한 번의 행사에서도 실현하고자 한 가치였다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왕실 잔치이다

왕실 구성원과 초청 받은 손님들 ·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관원들 · 잔치의 흥을 돋우는 악공(樂工)과 여령(女伶)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의례 절차를 따르면서 즐거움을 나누는 왕실 잔치를 통해 예로 만든 질서 속에서 모두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사회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모란도 병풍 / 19세기 초

모란은 부귀와 영화의 상징이다

조선 왕실은 상서로움과 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다양한 의례용품에 모란무늬를 장식했다

특히 모란병풍은 왕실 경사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혜경궁의 자리에 펼친 모란도 병풍으로 관례(冠禮 · 성인식) 60주년을 축하하는 경사스러운 날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혜경궁이 사용한 모란 병풍과 유사한 병풍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전한다

전체 10폭인데, 각 폭마다 그림을 따로 그리지 않고 〈진표리도〉의 병풍처럼 전체 화면을 하나로 연결해서 그렸다

현재 남아 있는 모란도 병풍 중에서는 매우 드문 방식이다

시내가 흐르는 낮은 언덕에 큼직한 꽃봉오리가 무성하게 핀 모란꽃 나무가 군락을 이룬 모습을 묘사했다

도식적이고 정형화된 19세기 말 이후의 모란도 병풍과 달리 순수 회화 같은 느낌을 준다

 

 

 

 

질서 속에 함께 즐기다

흥겨운 잔치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진표리 행사 때에는 헌가(軒架)를, 진찬 행사 때에는 헌가와 등가(登歌)를 함께 배치하여 음악을 연주했다

등가는 가야금 · 거문고 · 아쟁 같은 현악기가 중심이 되고, 헌가는 피리 · 대금 · 퉁소 등 즉 관악기가 중심이다

특히 헌가 악기 중에는 건고(建鼓) · 삭고(朔鼓) · 응고(應鼓)와 같은 대형 북이 포함되어 화려하고 성대한 궁중 음악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진찬 때 등가와 헌가는 번갈아가며 연주했다

왕대비 · 왕 · 왕비가 혜경궁에게 절을 올릴 때나 혜경궁이 술잔을 들었을 때는 등가와 헌가가 동시에 연주하여 행사 주인공의 위엄과 존귀함을 강조하였다

 

 

 

 

편경과 편종(編磬 · 編鐘) · 건고(建鼓) · 응고(應鼓) · 축과 어(祝 · 敔)

 

 

 

 

그날의 잔치 속으로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의 내용과 도설을 활용하여

기사년(1809년) 진표리(進表裏) 및 진찬(進饌) 행사를 3D영상으로 재구성하였다

 

 

 

 

도설(圖說)로 복원한 조선시대 여령(女伶) 복식

여령은 조선시대 궁중 잔치나 의식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한 여성을 말한다

1809년(순조 9) 혜경궁 관례(冠禮 성인식) 60주년을 축하하고자 개최한 진찬에서도 4명의 여령이 혜경궁의 복을 기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때 여령들이 입었던 복식을 그린 도설이 「기사진표리진찬의궤(己巳進表裏進饌儀軌)에 실려 있다

노란색 긴 저고리와 빨간 치마, 알록달록 한삼(汗衫)과 화려한 화관까지 선명한 색감과 섬세한 표현이 돋보인다

*

이 도설을 기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우리 전통기술만 활용하여 복원한 조선시대 여령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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