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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박물관 기획전시실

〈그날, 혜화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22년 한양도성박물관 하반기 기획전이다

창경궁로를 따라 혜화동로터리에서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걷다보면 도로 옆 언덕 위에 한양도성의 여덟 성문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이 있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던 이 문은 조선시대 도성의 동북쪽 출입을 관장하였다

강원도 ·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여진(女眞)의 사신들도 이 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또한 풍수적 이유로 폐쇄되었던 숙정문(肅靖門)을 대신하여 사실상 북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혜화문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수도 한양의 출입구를 지키고 방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사건 · 사고를 통해 옛 혜화문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기회가 되시길 바란다

 

 

그날, 혜화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혜화문을 열다 전시를 열며

 

 

 

 

한양도(漢陽圖) / 홍화문(昌慶宮), 혜화문(惠化門)이 되다

1396년(태조 5), 수도 한양의 방위를 위해 도성 주위에 성벽을 쌓고, 성의 내외를 드나들 수 있도록 여덟 개의 성문을 세웠다

그중 홍화문(弘化門)은 숙정문(肅靖門)과 흥인지문(興仁之門) 사이, 즉 흥덕동(興德洞) 뒷산과 타락산(駞駱山)이 만나는 고갯마루에 세운 성문이다

도성의 동북쪽 출입을 관장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동소문(東小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러나 1484년(성종 15)에 완공된 창경궁의 정문을 홍화문이라 정하게 됨에 따라 두 문의 이름이 서로 혼동된다고 하여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여러 기록에서 혜화문으로 바꿔 부른 시기를 1511년(중종 6)으로 밝히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1506년(중종 1)부터 바뀐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設)

조선 후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 1563~1628)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천문(天文) · 지리(地理)에서 초목 · 곤충에 이르기까지 총 25부문 3,435항목을 다루고 있다

19권 「궁실부(宮室部)」에서 도성 여덟 문의 위치와 이름에 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 1736~1806)이 조선시대의 정치 · 사회 · 문화를 서술한 역사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된 야사(野史)이다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에 도성의 동북쪽 문을 혜화문이라 하고 동소문이라 불렀음을 기술하고 있다

 

 

 

 

도성의 동북관문

혜화문은 도성의 동북 방면으로 통하는 출입구였다

조선 시대 내내 실질적인 성문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폐쇄되어 있었던 숙정문을 대시나여 사실상 도성의 북문(北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숭례문(崇禮門) · 흥인지문 · 돈의문(敦義門)과 함께 도성의 정문으로 분류되었다

혜화문을 나와 안암천(성북천)을 건너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양주 · 포천을 지나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길이 열린다

북도(함경도) 상인들의 물건들이 혜화문을 통해 들어왔으며, 멀리 철원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벼슬아치가 도성을 떠날 때도 이 문을 통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까지 도성에 들어오는 여진(女眞)의 사신(使臣)들이 왕래하던 문으로

혜화문을 통해 들어온 사신들을 흥인지문 근처에 설치한 객관(客館)인 북평관(北平館)에 머무르게 했다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김정호(金正浩 · 1804~1866 추정)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수록된 지도

수도 한양을 둘러싼 산줄기와 개천, 도로망이 자세히 그려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북쪽으로는 삼각산(북한산)까지 표현되어 있다

혜화문 밖으로 뻗어 나온 도로가 양주포천로(楊州抱川路)와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의 대표적 저술을 총망라하여 정리한 문집

모두 154권 76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며, 내용에 따라 시문집(詩文集) · 경집(經集) · 예집(禮集) · 악집(樂集)

정법집(政法集) · 지리집(地理集) · 의학집(醫學集)의 총 7집(集)으로 분류하여 만들어졌다

*

送尹无咎謫鐵原(송윤무구적철원) / 철원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윤무구를 보내며

 

惠化門開第一鍾(혜화문개제일종) / 첫 번째 쇠북소리에 혜화문이 열리더니

關河北去路重重(관하북거로중중) / 산 넘고 물을 건너 북으로 가는 길 겹겹이로세

 

山張寶蓋迎孤馬(출장보개영고마) / 보개산 펼쳐져 외로운 말을 맞이하고

霧鎖氷簾秘九龍(무쇄빙렴비구룡) / 얼음발을 안개가 내려 구룡을 숨겨주리

 

試幸暫游靑瑣闥(시행잠유청쇄달) / 다행히도 잠시나마 청쇄달(사슬무늬 궐문)에서 놀았지만

何如同上白雲峯(하여동상백운봉) / 우리 함께 백운봉을 같겠는가

 

傳聞新進多才俊(전문진다재준) / 듣자하니 신진 중에 뛰어난 인재 많아

玄鬢紅顔意態濃(현빈홍의태농) / 검은 머리 붉은 얼굴로 자신만만하다지

 

여유당전서 제1집 제3권, 시문집 시(詩)

 

 

 

 

다시 세운 성문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며 문루가 소실된 혜화문은 1744년(영조 20), 중건 공사를 통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이전까지 혜화문에 대한 수리는 1451년(문종 1) · 1630년(인조 8) · 1739년(영조 15) 등 몇 차례 있었으나, 문루를 새로 조성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공사는 당시 혜화문 관리를 담당하던 어영청에서 담당하였다

육축(陸築)의 홍예(虹霓)를 다시 쌓았고 1741년(영조 17)에 중건된 창의문(彰義門)의 문루를 본보기로 삼아 문루를 세웠다

문루의 현판은 조명리(趙明履 1697~1756)가 썼다

이후 1765년(영조 41) 비바람에 부서진 문루를 수리하였고 1837년(헌종 3) · 1852년(철종 3) · 1893년(고종 30)에도 손상된 부분에 대한 수리가 있었다

 

 

 

 

동소문(東小門)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이 18C에 그린 혜화문 주변이다

그림 속 혜화문은 문루가 없이 육축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혜화문 문루를 다시 세웠던 1744년(영조 20)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혜화문 옆으로 이어진 소나무 우거진 산봉우리는 현재 가톨릭대가 들어선 혜화동 1번지 일대이고, 산 밑 동네는 현재 대학로 일대이다

 

 

 

 

순성기행(巡城紀行)

1879년(고종 16)에 어느 유생(儒生)이 한양도성을 순성하고 작성한 기행문이다

한양도성 주변의 경관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흥인지문으로부터 낙산 · 혜화문 · 숙정문 · 백악 · 창의문을 거쳐 인왕산에 이르는 경로로 순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혜화문 사진엽서 / 일제강점기

 

 

 

 

혜화문 사진엽서 / 일제강점기

192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문루가 훼철되기 이전 혜화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정치에 모범이 될 만한 일들을 모아 후세의 귀감(龜鑑)으로 삼기 위해 편찬한 편년체의 역사책이다

1782년(정조 6) 완성된 영조 때의 보감에는 1744년(영조 20) 8월, 어영청에 명하여 혜화문의 문루를 짓게 하고 편액을 걸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국조방목(國朝榜目) / 18C

조선시대에 실시된 문과 시함의 급제자를 수록한 명부이다

구려 충렬왕(재위 1274~1308)에서 조선 영조 을미년(1775년 · 영조 51)까지의 문과 급제자가 연대순 · 시험 종별 및 성적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각 급제자의 자 · 생년 · 본관 · 거주지 · 응시 당시의 직위 · 신분 외에도 그의 사조(四祖 / 父 · 祖 · 曾祖 · 外祖)와 처부(妻父) · 관력(官歷) 등을 알 수 있다

 

 

 

 

광묘어제훈사(光廟御製訓辭) / 1746년 · 천의소감(闡義昭鑑)

1458년(세조 4) 왕이 세자 광(胱 · 예종)에게 내린 훈사(訓辭)를 1746년(영조 22)에 교서관(校書館)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책이다

당시 부제학이었던 조명리(趙明履 · 1697~1756)는 이 책을 찬집(纂集)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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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영조 31) 왕명에 따라 김재로(金在魯 · 1682~1759) · 이천보(李天輔 · 1698~1761) 등이 편찬하여 왕세자 책봉의 의의를 밝힌 책이다

세제(世弟) 책봉 때부터 왕위 계승의 취약성을 의식한 영조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천명해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판윤(判尹)이었던 조명리가 책 편찬에 찬집당상(纂集堂上)으로 참여하였다

 

 

 

 

도성문의 관리

조선 시대 한양도성의 성문은 도성을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성문의 관리는 도성의 방어에 있어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 후기의 혜화문은 어영청에서 보낸 6명의 수군문(守門軍)이 지켰다

이들은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에 맞춰 성문을 열고 닫았으며, 부험(符驗)을 관리하였다

인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수문군들은 성문을 닫고 빗장을 가로지른 후, 문의 위와 아래를 각각 자물쇠로 잠갔다

성문의 열쇠는 병조(兵曹)에 반납하였다가 다음 날 새벽에 받아와서 파루가 되면 문을 열었다

수문군들은 성문을 제시간에 여닫지 못하거나 관리 소홀로 성문 일부가 훼손되었을 경우

혹은 함부로 수직(守直)하는 자리를 비웠을 경우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여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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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성문을 늦게 열다 · 1740년, 성문 열쇠를 잃어버리다 · 1783년, 승려가 몰래 들어오다 등의 영상이 있다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 / 20C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기의 개화기에 주로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남긴 화첩이다

수록된 그림들은 배경 없이 인물 주위의 묘사로 이루어져 있어 등장 인물의 복식이나 행동 등에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 조선시대

「대명률(大明律)」 중에서 어려운 조항을 해설해 놓은 책이다

대명률은 조선시대 현행법으로 적용된 중국 명나라 형률서이다

건국 초 태조의 즉위 교서에 모든 범죄의 판결에 적용되는 것으로 원칙을 삼았으며

실용적인 활용을 위해 이를 윤색하여 1395년(태조 4) 「대명률직해(大明律直講)」를 간행, 500년 동안 현행 형법전(刑法典)으로 활용하였다

다만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바꾸어 썼다

 

 

 

 

혜화문, 그 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 노선이 1899년 개통되면서 한양도성의 성문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성문을 관통해 설치된 전차선로로 인해 도성 내외의 출입을 통제하던 성문 고유의 역할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 도성의 성문들은 도로 개수와 전차 노선의 확장 등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철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는 퇴락한 혜화문을 수리 · 보존할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문루를 헐어내고 그 재목(材木)은 매각하였다

문루 없이 남아 있던 혜화문의 육축은 1938년 동소문~돈암정(敦岩町) 구간의 간선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사라진 성문이 되었던 혜화문에 대한 복원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의 일로, 마침내 1994년 원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13m 옮겨 복원되었다

 

 

 

 

조선시대 혜화문의 건립과 수리

 

 

 

 

경성전차 및 버스안내도 / 일제강점기

1930년대 경성 시내 전차 및 버스 노선을 표시한 지도이다

1933년 부영(府營) 버스의 운영주체가 경성부에서 겅성전기로 바뀜에 따라 전차 노선을 중심으로 버스의 운행 노선이 재편되었고

부(府) 내에서는 전차와 버스를 자유롭게 환승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치 형태로 그려진 혜화문의 위치와 동소문(東小門)~돈암리(敦岩里) 구간의 버스 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시가지계획평면도(京城市街地計劃平面圖) / 1936년

1936년 경성부(京城府)의 관할 지역이 확장된 이후 토지구획정리사업 및 도로확충계획에 관한 지도의 청사진이다

경성부는 1936년 12월 26일에 가로 및 토지구획정리지구를 결정하고 1937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였다

혜화문에서 돈암구획정리시행지를 연결하는 도로건설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혜화문 복원공사 계획도(惠化門 復元工事 計劃圖) / 1989년

태창건축사사무소에서 혜화문 복원공사를 위해 작성한 도면이다

혜화문 육축 및 문과 연결되는 성곽 구간의 복원 계획을 그린 전개도이다

일제강점기 전차 노선 개설 및 도로 확장 등의 토목공사로 지형이 변함에 따라 복원되는 혜화문은 도로보다 약 10m 정도 높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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