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3실

조선3실에서는

17세기 사회 재건을 위한 노력 ·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18세기 탕평과 문예 부흥 · 19세기 민의 성장과 시대 전환 등을 안내한다

 

 

17세기 / 선조 -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국가 기강은 해이해졌다

국가와 지배층은 유교 윤리를 더 강조하여 이러한 위기를 타개했다

유교적인 신분제를 강화하고 성리학적 종법(宗法) 질서를 생활화하여 사회를 재정비 했다

예학(禮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북벌론(北伐論)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유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이자 사회를 통합하려는 전략이었다

피폐해진 국가 재정과 조세 제도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다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처럼 전쟁으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위성공신박진교서(衛聖功臣朴晉敎書) / 조선 1613년(광해군 5)

위성공신은 임진왜란 때 세자였던 광해군(재위 1608-1623)을 따르며 공을 세운 80명에게 내린 공신 칭호이다

박진(1560-1597)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로 일본군을 맞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전쟁 초반 관군이 연이어 패배를 거듭하던 상황에서 박진은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 제수되어

무너진 지휘 체계를 복구하고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영천성과 경주성을 탈환했다

그 공은 인정 받아 사후 3등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공신 자격을 박탈당했다

 

 

 

 

족보간행 · 청풍 김씨 가계도

조상을 기리고 계보를 정리하는 작업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며 조선시대부터 족보를 본격적으로 간행하기 시작했다

전란 이후 족보 간행이 매우 증가했다

17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로 대동법 시행과 화폐 주조를 건의한 김육(金堉 1580-1658)을 들 수 있다

김육은 청풍김씨 청로상장군파(淸虜上將軍派) 14세이다

아들 김좌명(金左明 1616-1671)도 대동법 확산에 힘썼고

손자 김석주(金錫胄 1634-1684)는 금속활자 한구자(韓構字)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대 환국(換局)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당시 이 집안은 서인에 속해 있었는데, 김석주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예의 정치학 · 붕당 정치 계보

서경덕 · 이황 · 이이 등 지방에서 기반을 다진 성리학자들이 학파를 형성했다

학파는 정파가 되어 붕당(朋黨)을 이루었는데, 붕당은 각각의 학설에 따라 예론 · 정치 · 사회 정책을 논쟁하며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상례비요(喪禮備要) / 조선 1648년(인조 26) 초간

성리학자 신의경(申義慶 1557-1648)이 짓고 예학의 종장(宗匠)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574-1656)이 보완하여 간행한 상례(喪禮) 지침서이다

이 책은 「가례(家禮)」에 기초하고 여러 학자의 해설을 덧붙여서 상례의 모든 단계를 상세하게 정리했다

상례 때의 인간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그림과 도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성종 아필석각(成宗御筆石刻) / 조선 1662년(현종 3) 이전

성종(재위 1464-1494)이 형님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초상화를 보며 느낀 감상을 쓴 글을 대리석에 새긴 것이다

석각된 돌 가장자리는 탑본을 할 때 종이를 쉽게 분리할 수 있도록 세모지게 떼어 두었다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부터 양란 이후 손실된 왕실 수장품을 정비하고자

선대 왕의 글씨를 모아서 돌에 새기는 작업을 진행했으므로, 이 무렵 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특히 선대 왕의 위업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승한다는 자세로 역대 임금들의 글씨를 보존했다

임금의 필적 보존은 유교의 조상 존중 자세와 연결되었으며, 후손들이 선대왕에 대해서 사후에 갖는 효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임진록(壬辰錄) / 조선 17세기 이후

임진록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필자 미상의 고전소설이다

이순신, 곽재우, 사명당을 비롯한 많은 영웅들이 도술(道術)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왜적을 굴복시킨 내용을 더욱 과장하기도 하고

패배한 전투를 승리한 전투로 바꾸는 등 허구적인 내용을 기술하기도 했다

7년 간 이어진 참혹한 전쟁 후 국토는 황폐화되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긴 전쟁으로 상처 받은 백성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소설들이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유충렬전(劉忠烈傳) / 조선

유충렬전은 영웅의 일생을 소설로 엮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군담소설(軍談小說 전쟁을 배경으로 창작된 소설)이다

주인공 유충렬은 간신 정한담의 모함으로 가족과 헤어져 고난을 겪게 된다

유충렬은 무예를 배우며 때를 기다리다가 남적과 북적이 쳐들어 와 천자가 항복하려고 할 때 등장하여 천자를 구출한다

이후, 호왕(胡王)에게 잡혀간 황후 · 태후 · 태자를 구출하여 공을 세우고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줄거리이다

두 번에 걸쳐 호국(胡國)을 정벌하고 호왕을 죽인다는 내용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된다

 

 

 

 

예조계후입안(禮曹繼後立案) / 조선 1653년(효종 4)

1653년(효종 4)에 허방한(許邦翰)이 양자를 입양하고자 하여 승인한 문서이다

조선 전기 재산 상속의 권리와 제사의 의무는 자식들에게 균등하게 주어졌으나

성리학적 사회 질서가 정착되면서 종손에게 상속이 집중되고 적서(嫡庶)의 구분이 엄격해졌다

따라서 종손이 없는 종가에서는 동종(同宗)의 후손을 양자삼아 제사를 잇게했다

 

 

 

 

징비록(懲毖錄) / 조선 17세기 초 이후 필사

징비록은 임진왜란 영의정을 지내며 국정을 이끈 서애(西厓) 류성룡이 지은 임진왜란 기록이다

제목인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禮其懲而毖役患)"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전란의 원인과 전황을 밝히고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이 책의 저술 목적이 함축되어 있다

 

 

 

 

기축봉사(己丑封事) / 조선 1717년(숙종 43) 간행

송시열은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에게 올린 상소문 「기축봉사(己丑封事 1649)」에서 주자학 수용과 대명의리론을 강조했다

그는 명(明)의 망국 이후 직접적 북벌이 아닌, 때를 기다리며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 사상을 전환했다

 

 

 

 

열성어필탁본첩(列聖御筆拓本帖) / 조선 1722년(경종 2)

조선시대에는 선대 왕의 자취를 기리는 여러 사업의 하나로 왕이 남긴 글씨를 간행하는 관례가 있었다

전란 이후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부터 선대 왕의 글씨를 모아서 돌에 새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석각에 종이를 대고 물을 뿌려 붙인 후 거의 마르면 솜뭉치에 먹을 묻혀 두두리는 탑본(搨本) 작업으로

첩을 만들어 보존하거나 보존하거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글씨마다 왕의 개성과 필력이 드러나 있다

 

 

 

 

두창경험방(痘瘡經驗方) / 1711년 이후 중간본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 박진희(朴震禧)가 지은 두창 전문서이다

전반부는 동의보감을 인용하여 두창에 관한 초온을 다루고 후반부는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두창의 진행 단계에 따른 치료법을 정리하였다

 

 

 

 

자휼전칙(字恤典則) / 1783년(정조 7)

1783년(정조 7) 흉년과 가난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정조의 명으로 반포한 법령집이다

총 아홉 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문과 한글을 함께 썼다

정조는 자휼전칙을 제정한 이유를 강조하며 조정과 지방 수령들이 책임지고 버려진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다

실제로 한양 5부에서 4~10세 걸식 아동들을 진휼청에 보고하면 이곳에서 아이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했다

우선 이들을 진휼청 밖 빈터에 흙집을 지어 살게 하고, 세 살 이하의 버려진 영아들에게

젖 먹일 수 있는 유모를 찾아주거나 지원자를 물색해 양육에 필요한 양식과 의복을 지급하며, 병에 걸리면 혜민서에서 치료했다

 

 

 

 

두관휘편(痘科彙編) / 1807년(순조 7)

청나라 적옥화(翟玉華)가 저술한 두창전문서로, 1807년(순조 7) 경상도 관찰사 윤광안(尹光顔 1757-1815)이 대구의 경상감영에서 간행했다

19세기 전반 경상도에서 두과휘편을 비롯한 여러 종의 두창 전문서가 간행된 까닭은

영남까지 잘 오지 않던 두창이 이 시기에 해마다 유행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시종통편(時種通編) / 1817(순조 17)

이종인(李宗仁 1756-1823)이 편찬한 인두법(人痘法)에 관한 의서이다

19세기 이후 인두법을 수용한 중국 의서들의 이론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약연(白磁藥碾) / 조선 17-18세 · 침구와 침통 / 조선

 

 

 

 

대보단 그림(大報壇圖) / 조선 1830년(순조 30) 간행

숙종(肅宗 재위 1661-1720)은 영(明)이 멸망한 지 60년이 되던 해인 1704년(숙종 3)에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신종(神宗)과 명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보단을 창덕궁에 건립했다

대보단은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강화된 존명의리(尊明義理)와 조선이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국가임을 표방하는 중화사상을 반영한다

 

 

 

 

대동법(大同法)

대동법은 조선 최고의 개혁이다

대동법은 특산물 대신 쌀 · 옷감(布) · 화폐로 세금을 내면

공인(貢人)이라는 상인이 공가(貢價)를 받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각 기관에 공급하는 세금 제도이다

이 제도로 국가 재정이 계량화되었고 화폐와 상품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대동법은 마을이 아닌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땅이 없는 백성의 부담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었으나

지주층의 반발로 시행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광해군 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 효종 때 김육(金堉 1580-1658) 등의 노력으로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다

대동법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조선 1849년(헌종 15)

본받을 만한 역대 왕의 선정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 효종편에 효종의 업적으로 대동법의 시행 관련 내용을 자세하게 수록했다

효종편에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업적으로 대동법의 시행 관련 내용을 자세하게 수록했다

대동법은 특산물을 바치던 것을 쌀로 바치게 하고, 땅이 있는 사람에게 부과하던 개혁적인 조세 제도이다

기득권의 반대로 전국적 시행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51년(효종 2) 8월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육은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호서(지금의 충청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김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호남으로 확대 실시를 꾀하였고

호서대동법의 성공적인 시행에 힘을 얻어 1658년(효종 9)에 호남(지금의 전라도) 지역에도 대동법을 시행했다

김육 사후에 백성들은 돈을 모아 부의하였으나 후손들이 받지 않자 평택에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세웠다

 

 

 

 

전제후록(田制後錄) / 조선 1770년(영조 46)

조선 후기 학자인 유형원의 사회모순 비판이 담긴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전제후록(田制後錄)」 부분이다

그는 토지문제 · 정치 · 국방 · 학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했다

수세와 세금의 지출을 다룬 「전제후록」에서는 공납의 폐단을 상세히 언급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인 대동법을 옹호했다

 

 

 

 

18세기 숙종 - 경종 - 영조 - 정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여러 당파로 권력을 교체하며 정국을 주도하는 환국정치(換局政治)에 주로 의존했던 것과 달리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정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蕩平策)으로 국정을 안정시키고 유교적인 이상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18세기 초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고 영조는 조세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상업 유통망이 활성화되면서 한양이 상업 도시로 성장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실력이 있는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인 계층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과 서양의 발전된 학문이 들어와서 학문이 다변화될 수 있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이루어졌고 문예가 부흥한 시기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 / 정약용 · 조선 19세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지방관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책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경계해야 할 부분으로 당대 유행하던 장기 · 쌍륙 · 골패 등의 도박을 언급했다

유흥 문화의 성행과 이를 경계하는 사대부 지식인이 공존하는 19세기 조선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춘풍전(李春風傳) / 조선 19세기

이춘풍은 조선 후기 유흥을 즐기는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로지 돈만 쓰는데, 도박과 기방 출입 등으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이 소설은 방탕한 삶을 경계하고 근면한 생활을 할 것을 가르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독자들은 이춘풍의 유흥 생활을 보며 대리만족하기도 했다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이춘풍

춘풍이 오입하여 하는 일마다 방탕하고, 세전지물(대대로 내려오는 물건) 누만금(굉장히 많은 돈)을 활용하여 없이할 제

남북촌 오입쟁이와 한 가지로 휩쓸려 다니며 호강하여 주야로 노닐 적에, 모화관 활쏘기와 장악원 풍류하기 · 산영에 바둑두기 · 장기 · 골패 · 쌍륙 · 수투전

육자배기 · 사시랑이 · 동동이 · 엿방망이 하기 · 아이보면 돈주기 · 어른 보면 술대접하여 · 고운 양자(얼굴) 맑은 소리 · 맛 좋은 일년주며

벙거짓골 열구지탕 · 너비할미 갈비찜에 · 일일장취(매일매일 취하고) 노닐적에 · 청루미색(청루의 어여쁜 기생) 달려들어

수만금을 시각없이 천하부자 석숭인들 그 무엇이 남을손가 · 티끌같이 진토같이 다 마른다

 

 

 

 

도박을 경계한 정약용

요즘 유행하는 것은 바둑 · 장기 · 쌍륙(雙六) · 투전(投錢) · 골패(骨牌) · 윷놀이이다

 

여러 가지 내기 놀이 중에서도 심보가 나빠지고 재산을 탕진하며 가문과 친족이 근심하는 것으로 투전이 으뜸으고, 쌍륙과 골패가 그 다음이다

관리가 포탈하고, 뇌물 받는 것도 대부분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쌈지 · 부시와 부시통 · 담배대 걸이 · 담배대 / 18-20세기 초 · 골패와 골패 / 19세기

 

 

 

 

도박과 단속

재물로 도박하는 자는 장(杖) 80에 처하고 판 위에 흩어진 재물은 관청에 들이며

도박판을 열어 장소를 제공한 사람도 같은 죄로 하되 현장에서 발각된 자만 검거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한 등급 더하여 처벌한다

대명률(大明律)

 

 

 

 

풍요로운 삶

어른어른 빛나는 물건들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구나

깔개는 몽고 것이요, 안석은 일본에서 왔네

은주시대 청동기 골동품에 보배로 장식한 쟁반이며 서늘한 자리 상아로 엮었고 따뜻한 전방석 봉황을 수놓았네

이조원(李祖源 1735-1806) 「대고(大賈)」

 

 

 

 

빈군한 삶

젖먹이 아이마저도 군적에 올려졌더라오

집에 무엇이 남았나, 외양간의 누런 송아지 한 마리뿐이었소

그 놈 팔아 관가에 돈 마치고 나니 또 포흠이 남아 있더라오

베틀로 베 몇 필 만들어 모두 겨울 군복 만들라고 주었더니

어이 한 자 한 치 베인들 남겨, 내 아랫도린들 가릴 수 있었겠소

입고 먹을 것도 없으니 어떻게 이 한 해 보낼는지

홍양호(洪良浩 1724-1802) 「유민원(流民怨)」

*

자매명문(自賣明文) / 조선 1852년(철종 3)

1852년 10월 김팔득과 장봉금이 송참봉(宋參奉) 댁 노비 개복(介福)에게 자식 4명을 16냥에 매매하며 작성한 문서이다

김팔득이 중병을 앓아 생계가 어려워지자 자식들을 장녀 미뿐이(美分叱伊), 차녀 연분이(連分伊), 아들 노미(老未), 삼녀 삼분이(三分伊)을 매매하였다

문서의 끝부분에는 장봉금이 본인임을 증명하는 손바닥 그림과 남편 김팔득 · 증인과 문서를 작성한 정박생원(朴生員) 댁 노비 팔십금(八十金)의 서명이다

 

 

 

 

거창가(居昌歌) / 조선 19세기 중반

19세기에는 토지 소유세를 걷는 제도인 전정(田政)과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납부하는 군포를 징수하는 제도인 군정(軍政)

백성 구휼제도인 환곡(還穀)을 운영하는 지방관의 비리가 크게 증가했다

거창 지역 삼정(三政)의 폐단을 폭로하는 거창가에는 백성의 곤궁한 삶이 반영되어 있다

거창가 앞에는 한양가가 수록되어 있다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 / 조선 18세기

지리학자 정상기(鄭尙驥 · 1678-1752)가 18세기 중엽에 조선의 전국지도인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 지도가 〈동국지도〉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 중 하나로 세로 272.2cm · 가로 137.5cm에 이르는 희귀한 대형 지도이다

백두산 등의 북부 지방을 정확하게 표현했고, 현재의 독도인 우산도(于山島)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鹿屯島)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의 영토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축척을 일률적으로 활용한 전국지도로 정상기가 고안한 백리척(百里尺 · 100리를 1척으로 하는 축척)이 사용되었다

또한 이 지도에는 2,200여 개에 달하는 지명이 다양한 기호로 표기되어 있어 지리정보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지도의 가장 기본적인 용도는 국가통치와 방어인데, 이에 부합하도록 이 지도에는 육로 · 해로 · 수로가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전통 지도의 결정판인 〈대동여지도〉 탄생의 밑거름이 된 지도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대동여지도와 목판

대동여지도는 1861년 김정호가 제작하고 목판으로 인출하여  간행한 전국지도로 우리나라 남북 120리 간격으로 구분해 22층으로 나누었다

모두 펼쳐 연결하면 세로 약 6.7m · 가로 약 3.8m의 초대형 지도가 된다

산줄기와 물줄기 표현이 상세하고 정확하며 오늘날의 지도퍼럼 정보를 가로로 표기한 점이 특징이다

대동여지도를 새긴 목판 12매에는 제작 이후에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오류를 고쳐 보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김정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민족의 지도 제작 전통이 집대성된 최고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 표제 ·  대동여지도 4층 5판과 6판 · 대동여지도 8층 19판과 7층 8판

 

 

 

 

대동여지도 지도표(大東輿地圖 地圖表) · 대동여지도 표제(大東輿地圖 標題) / 조선 1861년(철종 12)

오늘날의 책으로 치면 속표지(제1책)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라는 지도 이름과 제작연대를 비롯하여

지도를 간행한 사람이 고산자(古山子)인 김정호임을 밝혀 두었다

당저십이년신유(當宁十二年辛酉)라는 연대는 철종 12년 곧 1861년(신유년)을 나타내는데 당저는 「바로 그 당시 임금」을 뜻하는 말이다

 

 

 

 

대동여지도 속 한성지도 / 조선 1861년 · 철종 12 · 대동여지도 목판 / 조선 1861년 · 철종 12

대동여지도 제1책에는 한성지도 두 점이 수록되어 있다

그 하나는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이고 다른 하나는 도성도(都城圖)이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왕조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지도이다

경조는 서울을 뜻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이며, 오부는 중부 · 북부 · 남부 · 서부 · 동부 등 한성부의 다섯 행정구역을 뜻한다

풍수지리 관념에 따라 삼각산(노을날 북한산)에서 백악(오늘날 북악산)으로 내려오는 산줄기를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또한 한성과 주변지역을 잇는 교통로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도성도는 성곽 궁궐과 관청 등 국가 중요 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도성 내부의 시가지를 그린 지도이다

*

김정호는 모두 60여 개의 목판 양면에 각종 지리 정보를 새긴 뒤 인쇄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지구도(地球圖)〉라는 세계지도를 직접 조각했다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기록에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처럼 김정호는 조각에도 능했다

목판의 크기는 대개 가로 43cm · 세로 32cm 내외이며, 수령 100년 정도의 피나무로 만든 것이다

목판 하나에는 남북 120리 · 동서 160리의 지리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12개의 목판과 여러 판본에는 〈대동여지도〉를 처음 간행한 이후에도

김정호가 교정과 수정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지도제작

조선시대에는 지도 제작 기술이 발전하여 국가와 민간에서 여러 종류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전국 지도와 도별 지도를 비롯하여 한양과 지방의 지도 · 세계지도와 외국 지도 · 군사지도와 여행 지도 등 다양한 성격의 지도를 만들었다

세계 지도와 외국 지도에는 조선의 세계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지방 지도는 행정에 용이했고 군사지도는 지형과 통신 체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중국의 발전된 지도 제작 방법을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적응하여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지도를 창조했다

 

 

 

 

수선전도(首善全圖) / 조선 19세기 중반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 서울 지도이다. 「수선」은 서울을 뜻하는 말이다

한양 도성과 도성 밖 남쪽의 한강 · 북쪽의 도봉산 · 서쪽의 마포 · 동쪽의 답십리까지 포함하였다

북한산과 도봉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가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도성의 윤곽과 도성 내부의 정보가 상세히 보인다

지도의 축척은 정보가 많은 도성 안은 균일하게 적용하였지만, 정보가 적은 도성 밖은 소축척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영조 · 정조대에 제작된 도성도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도성에 비해 넓은 주변 지역을 좁은 지면에 싣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목판에 정교하게 서울을 그려 넣어 판화로서도 가치가 높다

 

 

 

 

한벽루 시(寒碧樓 詩) / 조선 1688년 · 농암집(農巖集) 권3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한벽루는 청풍부(淸風府) 관아에 있던 누각으로 남한강과 금병산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어서 호서 제일의 누각으로 유명했다

퇴계 이황 · 서애 유성룡 · 고산 윤선도 · 다산 정약용 등 유명한 문인들이 한벽루(보물 제528호)를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안동 김문의 김창협은 청풍부사로 재직할 때 주변 산수를 유람하면서 여러 편의 시와 글을 남겼다

그의 한벽루 시에 배를 타고 단양과 청풍 지역의 자연 풍광을 감상하는 유람의 묘미가 잘 녹아 있다

한벽루는 충주댐 건설로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되었다

 

 

 

 

단산별곡(丹山別曲) / 조선 후기 · 신광수(申光洙 1712-1775)

평양과 주변 지역의 생활 풍속과 명승 · 역사 인물을 노래한 「관서악부(關西樂府)」의 작가 신광수가

영월부사로 재임하던 시절(1772-1774)에 단양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지은 작품이다

단산은 단양의 옛 이름이다

신광수는 단양의 명승지를 신선의 거처로 노래하거나 선경화(仙境化)하는 동시에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로서 백성들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이상향에서 살게 하고 싶은 마음도 함께 표현하였다

 

 

 

 

한벽루 / 이방운(李昉運 1761- ?)

한벽루는 충주댐 건설로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되었다

 

 

 

 

산수 유람 문화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보러 가고 자신의 감흥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

산수 유람의 동기 · 과정 · 평가를 글로 남기는 일은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송도 · 지리산 · 금강산 · 관동 · 사군(四郡 / 제천 · 단양 · 청풍 · 영춘현) 지역이 대표적인 유람지였다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산수는 단순한 유람 공간을 넘어 유람지로서 도(道)를 깨우치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학문과 생활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에는 아름답게 느끼고 자유롭게 노닐거나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 산수를 인식했다

 

 

 

 

일본과의 외교

조선은 일본 류큐(琉球) 등과의 외교를 교린(交隣)이라 했다

조선은 이들에 대해 강격책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일본을 포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했다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문화 교류를 이어갔다

 

 

 

 

일동시문(日東詩文) / 조선 1711년(숙종 37) 이후 · 조태억(趙泰億 1675-1728) 편집

1711년 통신사(通信使)의 정사(正士)로부터 받은 시와 편지 등을 편집하여 만든 첩(帖)으로, 현재 총 8첩이 남아 있다

에도막부의 관료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과 필담(筆談)과 창화(唱和)를 나눈 흔적이다

당대 막부의 관료이자 유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대마도 번에 소속되어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담당했던 아메노모리 호슈(兩森芳洲 1668-1755) 등으로부터 받은

필담과 창화시가 남아 있어 통신사와 일본인 사이의 소통과 문화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사로승구도권(詳 槎路勝區圖卷) / 조선 1748년(영조 24) · 이성린(1718-1777)

부산에서 에도(江戶)에 이르는 조선시대 통신사행의 여정을 담은 그림이다

사로(槎路)는 뱃길, 승구(勝區)는 경치가 좋은 곳을 의미한다

1748년(영조 24) 홍계희(洪啓禧 1703-1771)를 정사로 하는 제10차 통신사 여정을 총 30장면으로 나누어 그렸다

도착지를 중심으로 일본의 주요 명승지나 인상적인 경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면의 오른쪽 상단에 지명(地名)이 적혀 있다

작자는 1748년 통신사 수행화원이었던 이성린(1718-1770)으로 추정된다

 

 

 

 

조태억 초산(趙泰億 肖像) /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 · 에도시대(1711년)

「일동시문(日東詩文)」을 편집한 1711년 통신사행의 정사 조태억의 초상이다

1711년 에도막부의 어용회사(御用繪師)인 가노 쓰네노부가 그렸다

화면 왼쪽 하단에 「법인고천수필(法印古川叟筆)」이라는 묵서와 「양박(養朴)」이라는 인장이 있다

고천수(古川叟)와 양박(養朴)은 쓰네노부의 호(號)이다

당시 통신사의 부사(副使)였던 임수간(任守幹 1665-1721)의 사행록 「동사일기(東磋日記)」에

1711년 11월 8일 "관백(關白)이 화사를 보내어 조복(朝服)과 양관(梁冠)을 그려 가지고 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소화외사(小華外史) / 오경원(吳慶元 · 1764-?) · 조선 1830년(순조 30) 간행

고려 말부터 1824년(순조 24)까지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기록한 책이다

범례에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 · 작은 중국)」로 보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태도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본편은 명나라와의 대외관계에 대한 내용으로 사신 파견을 비롯해 임진왜란 · 병자호란 때의 외교관계 등을 자세히 서술했고

속편에는 왜란 때 온 명나라 지휘관의 명단이 있다

별편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가 이미 멸망한 지 60년이 되는 1주갑(一周甲) 기념일에 제례를 지내기 위해

숙종이 대보단(大報壇)을 만들고 행했던 제례와 각종 행사의 절차를 기록했다

 

 

 

 

항해조천도(航海早天圖) / 조선 1624년 · 후대 모사본

이덕형(李德馨 1566-1645) 일행은 인조(재위 1623-1649)의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명(明)으로 사행을 떠났다

평북 곽산(郭山)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중국 등주(登州 현 펑라이시(蓬萊市)에 도착해서 다시 육로로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친 뒤 사행길 여정을 그려 첩으로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승정기원후 연호가 쓰인 납석제 태합(蠟石製胎盒) / 조선 1819년(순조 19)

출산 후 태를 멓어 묻은 태합이다

이 태합에는 "승정기원후 195년 기묘년 3월 22일에 묻었다(崇禎紀元後百九十五年己卯三月二十二日埋誌)"고 새겨져 있다

승정기원후란 명의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재위 1628-1644)의 연호인 숭정을 사용하여 기년(紀年)하는 방식이다

'숭정기원후 195년'은 1628년을 기준으로 195년이라는 뜻인데, 간지년을 기준으로 1819년(순조 19)임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공식적인 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써야 했지만 민간에서는 청에 대한 반감으로 명의 연호를 계속 썼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망우당집(忘憂堂集) / 조선 18세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시문을 모은 책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낙동강 일대를 막아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전쟁 초기 불리했던 전세를 만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망우당집에는 1592년 의병을 일으키면서 임금에게 올린 「창의시자명소(倡義時自明疏)」와

의병을 일으킨 내력이 기록된 「용사별곡(龍蛇別曲)」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정보의 나무 호패 / 조선 1712년 · 숙종 36 · 이정보의 상아 호패 / 조선 1748년 · 영조 24

이정보는 계유년(1693)에 태여났으며 20세인 임진년(1712)에는 동부학당(중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동학생으로

한성 5부 중 동부의 숭교방(현재 혜화동) 1계 6통 4가에 거주하고 있음을 이 호패에서 알 수 있다

조선 초 한성 지역은 도성 안과 도성 박 10리(4km) 이내였다

도성 안을 동 · 남 · 서 · 북 · 중부 5부(部)로 나누고 그 아래 방(坊) · 계(契) · 동(洞)을 두었다

도성 밖 행정구역은 면 단위였는데,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한성의 경계가 확대되어 방으로 포함시켰다

*

이정보는 계유년(1693)에 태여났으며 40세인 임자년(1732)에 문과에 급제했고

56세인 무진년(1748)에 2품 이상 관직에 임명되었음을 이 호패에서 알 수 있다

*

호패는 16세 이상 남자의 신분으로 신분에 따라 재질이 달랐다

상아 호패 · 2품 이상 관리 / 뿔 호패 · 3품 이하 관리 / 나무 호패 생원과 진사 및 일반백성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숙종은 사회 제도를 재정비하여 문화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왕이다

정국을 주도하는 집단과 이를 견제하는 집단을 급격히 바꾸는 환국(換局)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왕권을 강화했다

그리고 중요한 여러가지 사회 ·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이양법을 보급하여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고,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했으며 상평통보를 유통시켰다

또한 오가작동법(五家作統法)과 호패로 향촌사회를 통제했다

숙종이 추진했지만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정책은 상당 부분 영조와 정조 때 결실을 맺었다

 

 

 

 

숙종대왕계시(肅宗大王啓示) / 조선 1676년(숙종 2)

숙종(재위 1674-1720)이 관직을 사직하고 물러나 있던 우의정 허목(許穆 1595-1682)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오는 과정에서 내린 글이다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 및 한성부 ·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의 관원에게 그 직책에서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해 말했다

여기에는 자신의 옆에서 허목이 우의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숙종의 마음이 담겨 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영조는 백성의 입장에서 정책을 고민하고 추진한 왕이다

정치 세력 간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을 주도하여 국정을 안정시켰고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왕실 교육에 힘썼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의례를 정비했다

그는 세제(世弟)로 책봉되기 전 궁궐 밖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토대로 백성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군대와 관련된 양역(良役)의 개혁안인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했으며, 잔인한 형벌 제도를 개선했다

그리고 개천 바닥을 깊이 파는 준천(濬川) 사업을 실시하여 홍수 피해를 줄였다

 

 

 

 

영조대왕 어진(英祖大王御眞) / 광무4년 경자이모(光武4年 庚子移模)

영조 51세 때의 초상화이다정면을 향하지 않고 특이하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이다

이는 초상화가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에 봉안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세자시강원 전교현판(世子侍講院 傳敎懸板) / 1745년(영조 21) 10월 28

세자시강원에 걸렸던 현판 중 하나로, 영조가 강의를 자주 건너뛰는 세자를 훈계하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세자에 대한 교육을 서연(書筵)이라 하며, 세자시강원에서 담당했다

영조는 어린시절 총명했던 사도세자에게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그 기대를 저버려 훗날 비극을 초래했다

*

어릴 때 하는 공부는 하루만 건너뛰어도 안타까운데, 이를 빠트리는 이유가 너무 많다

예전 선비들이 말한 것처럼, 나는 부모님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 전에도 강학(講學)을 하였다

하찮은 일들을 핑계대어서야 되겠는가?

이후로는 기일(忌日)에도 수업은 예에 따라 할 것이며, 궁 밖으로 나가는 날 외에는 모두 수업하도록 하라

「속대전(續大典)」에도 기록해 두어다

 

 

 

 

사도세자 묘지(思悼世子墓誌) / 1762년(영조 38)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게 된 사도세자(1735-1762)의 묘지이다

이글을 직접 지은 영조는 아버지가 이렇게 만고(萬古)에 없는 일을 하게 만든 이유는 사도세자의 그릇된 행동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조명되고 있다

 

 

 

 

현륭원어필(顯隆園御筆) / 조선 18세기

영조(재위 1724-1776)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10세 무렵에 쓴 글씨이다

어린 시절 총명했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 첩에 쓴 글은 사도세자가 「천자문(千字文)」과 「효경(孝經)」의 문장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이 총명함에 영조는 흐뭇해하며 이를 모사하여 첩으로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조선 1758년(영조 34) 이후

홍계희(洪啓禧 1703-1771) 등이 영조의 명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상례(喪禮)에 관한 부분을 보충하여 간행한 책이다

상례의 상세한 절차와 의식 · 왕의 지시 사항 등이 수록되어 있는 왕실의 상례지침서이다

영조는 상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므로 그 법도를 잃기 쉽다고 생각하여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책을 편찬하라고 했다

특히 검약(儉約)을 강조하는 영조의 정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어제대훈(御製大訓) / 조선 1741년(영조 17)

영조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왕통(王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인해 발생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주동자들을 처벌한 후

신하들을 가르치고 타이르기 위해 직접 지은 글이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당쟁을 그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신임사화는 경종 대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는 중에도 계속 논란이 되었다

 

 

 

 

성호집(星湖集) / 조선 1774년(영조 50) 초간 · 1922년 재간행

숭정(崇禎)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재위 1628-1644)의 연호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청이 명을 물리치고 중국의 주인이 된에도 오랑캐의 나라라며 청을 부정했다

명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청 황제들의 연호를 기록하는 대신에 '숭정기원(崇禎紀元)을 사용했다

이익은 이러한 풍습이 청과의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우려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정조는 제왕학(帝王學)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왕이다

규장각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지방 인재를 선발하고 실력이 있는 서얼을 등용하여 권력이 일부 세력에 집중되응 것을 막으려고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계획 도시 화성(華城)을 세웠다

화성은 동서양의 축성법과 과학기술이 조화를 이룬 결과이다

화성 행차에는 금난권전(禁亂廛權) 폐지로 활동 공간이 넓어진 경간상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추진한 개혁들은 그가 갑자스럽게 죽으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중화척

정조가 지은 시가 은으로 적혀 있는 자이다

당(唐)나라의 덕종(德宗) 정원(貞元) 연간에는 음력 초하루인 중화절(中和節)마다 대신과 종친들에게 공평함을 의미하는 자를 내려 주고

관료(百官)들은 농서(農書)를 올려 농사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본받아 정조도 매년 2월 1일을 중화절로 삼고 신하들에게 자를 내려 주었다

이 자에는 모두 다섯 개의 눈금을 새겼는데, 한 눈금의 길이는 대략 5cm이다

 

 

 

 

화성성역도(華城城役圖)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조선 1801년(순조 1)

화성성역의궤는 공사 일지 · 동원된 장인의 명단 · 사용된 물품의 종류와 수량 등 화성 건축과 관련된 자료를 수록한 책이다

수원 화성은 주거와 군사 기능을 모두 갖춘 계획 도시이다

전통적 축성 기법에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개발한 거중기를 활용하여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였다

 

 

 

 

이 편지는 즉시 찢어라 / 1798년(정조 22) 6월 5일 저녁 · 정조신한(正祖宸翰) 수록

정조신한은 정조가 당대 노론의 대표 인물이었던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당시 정치적 현안들을 용의주도하게 조정하며 정국을 이끌어 가고자 했던 국왕 정조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정조는 인사문제 · 민심의 동태 · 형벌 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해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고 있다

*

안부는 생략한다

처분의 개략을 기록하여 서료(徐僚 서용보 徐龍輔 1757-1824)에게 보냈으니, 바로바로 얻어보기 바란다

임금의 처분이 비록 이와 같아도 겉으로는 아주 온화하고 지나치리만큼 느슨해야 하니

즉시 서료와 우상(右相 이병모(李秉模 1742-1806)에게 편지를 보내고 경은 힘써 준론(峻論)을 견지하는 것이 어떠한가?

즉시 거행하기에는 경들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우선 논의를 통하여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어떠한가?

이 편지는 즉시 찢어라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 조선 1797년(정조 21) 초간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윤리의 모범이 되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엮은 책이다

효자와 충신 · 열녀 · 믿음을 지킨 벗 등 150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수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이고, 우리나라 사람도 17명이 등장한다

판화와 함께 한글 풀이를 넣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어제윤음(御製綸音) / 조선 1798년(정조 21)

윤음은 국왕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가르침이다조선의 왕은 정월 초하룻날이나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윤음을 내렸다

여기에서는 노인을 봉양하고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과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소학 · 오륜행실도 · 향약에 관한 책을 간행하여 반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반 백성에게도 알리기 위해 한글로 번역한 윤음을 뒤에 덧붙였다

 

 

 

 

경화세족과 북학파

한양에 대대로 거주한 양반인 경화세족(京華世族)은 현실에서는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세속(世俗)을 벗어난 고아(古雅)한 삶을 추구했다

그들은 책 · 서화 · 골동품을 수집하고 감상했으며, 그 감정을 문학과 예술 작품을 남겼다

그들은 종종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청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은 실용적이고 발전된 지식을 갈망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국 문물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연행(燕行)에서 알게 된 외국의 발전된 학문과 기술을 수용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로 삼자는 북학(北學)을 주장했다

 

 

 

 

김광수묘지(金光遂墓誌) / 조선 18세기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6-1770)는 문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지식인이다

그러나 벼슬보다는 골동품 수집에 취미를 가져 일생을 그림, 글씨와 옛 물건에 푹 젖어 자기만의 멋을 가지고 살았다

이 묘지명은 김광수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서예로 이름을 날린 이광사(李匡師 1750-1777)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쓰게 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조선 1848년(헌종 14)

역대 왕들의 선정을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뽑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영조(재위 1724-1776)의 대표 업적 중 하나가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깊이 파는 준천(濬川) 사업이다

당시 청계천에는 모래가 많이 쌓여 비만 오면 개천이 범람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영조는 준천 사업에 백성들이 동원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해 인부를 공요해서 진행했고

이는 백성들의 홍수 피해도 줄이고 실업 문제도 함께 해결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 대한제국 1901년(광무 5) 간행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그의 종형제인 사신 박명원(朴明原 1725-1790)을 따라

1780년에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재위 1725-1795)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이 책은 건륭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북중국과 남만주 일댈르 둘러본 후, 그곳의 문인 · 명사들과 교유한 이야기를 기록한 여행기이다

특히 청과 조선의 문화 차이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18-19세기 조선 지식인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발달된 기술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백과사전 · 총서 · 개인 저술에서 표출했다

당시에는 개인의 내면과 일상에 주목하는 소설과 소품문(小品文)도 유행했다

문체(文體)가 정신을 반영한다고 여긴 정조는 성리학적 거대 담론을 담은 고문(古文)을 진작하고자 했지만 소모품의 유행을 막을 수 없었다

18세기 홍대용(洪大容 1731-1783)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은 청나라 문인과 교유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교유가 역사과 문화 · 풍속 · 학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걸쳐 이루어졌다

 

 

 

 

벼루 · 복숭아 모양 연적 · 필가(筆架) · 묵호(墨壺) / 조선 19세기

 

 

 

 

김수항 · 김창협 간찰(金壽恒 · 金昌協 簡札) / 조선 17-18세기

김수항(1629-1689)과 그의 셋째 아들 김창협(1651-1708)이 유창(兪瑒 1614-1690)과 그의 아들 유득일(兪得一 1650-1712)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이를 통해서 두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김창협은 유득일이 보낸 선물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는데, 특히 좋은 먹과 붓에 감탄하고 있다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 조선 18세기

이 책은 유금(柳琴 1741-1788)이 이덕무(李德懋 1747-1793) · 유득공(柳得恭 1748-1807) ·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이서구(李書九 1754-1825) 네 사람의 초기 시 작품을 약 100수씩 엮은 시집이다

유금은 1776년(정조 즉위년)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에 다녀왔는데, 그때 이 시집을 가져가 청나라 문인들에게 서문과 평어를 받았다

「한객건연집」으로 청대 문학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철옹간찰(澈翁簡札) / 청 1829년(선종 도광제 9)

청의 학자들이 조선 문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간찰첩이다

조선 후기 청과 조선 문인들 사이의 교류 양상을 잘 보여 준다

단순한 안부 등의 일상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서화금석(書畵金石)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이 편지는 철옹(澈翁) 오숭량(吳嵩梁 1766-1834)이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김명희(金命喜 1788-1857)에게 보낸 것이다

 

 

 

 

조선시대 제사 · 제기 / 조선 18-19세기

 

 

 

 

18-19세기 문화 특성을 반영하는 청화백자(靑華白磁)

청화백자는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려서 장식한 백자이다

시대에 따라 백자의 형태 · 문양 · 유색(釉色)이 달라지는데 18세기와 19세기의 사회 변화가 청화백자에 반영되어 있다

18세기에는 사군자(四君子)나 산수 등 문인 취향의 화제를 담백하게 표현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으나

19세기에는 청화백자 안료의 색이 짙어지고 문양이 화려해지며 종류가 다양해졌다

이는 청나라에서 값싼 무명청이(無名淸異) 안료를 대량으로 수입하여 청화백자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고

화려한 청나라 자기의 영향으로 장식적인 문양을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 살고 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문양의 청화백자와 동일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경제력이 있는 계층이 늘어나 청화백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다양한 청화백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용무늬 항아리(白磁靑畵雲龍文壺) / 조선 18세기

용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동물로 여겨져서 제왕(帝王)의 권력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전 기간동안  용무늬 백자 항아리를 꾸준히 제작했다

이는 용무늬 항아리가 임금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운현' 글자가 있는 보상화 넝쿨무늬 접시 / 조선 1864년(철종 15) 이후

접시 안쪽에는 '복(福)'자가 있고, 뒷면 가운데에 '운현(雲峴)'이라는 글자가 있으며 주변을 보상화 문양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운현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0)의 자택인 운현궁을 뜻한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하응의 집을 운현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운현이라는 글자로 보아 운현궁에서 사용한 접시로 생각된다

*

복자 무늬 접시 / 1844년(헌종 10) · 1848년(헌종 14)

헌종(憲宗 1834-1849) 때 한글로 그릇 바닥에 명문을 쪼아 새긴 백자 여러 점이 전해지고 있다

 

 

 

 

척화비(斥和碑)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0) 2023.01.24
국립중앙박물관 대한제국  (0) 2023.01.24
국립중앙박물관 조선2실  (0) 2023.01.24
국립중앙박물관 조선1실  (0) 2023.01.24
여주 영월공원  (0) 202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