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김노경의 아들로 태여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에 생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철종 7)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계를 탈피하여 신 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 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經學) · 금석학(金石學) · 문자학(文字學) · 사학(史學) · 지리학(地理學) · 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박통하였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신례원버스정류소
시외버스를 내린 자리에서 추사고택행 버스를 탔다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
조선 후기 유행했던 황량한 이미지의 산수화 양식은 벗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매체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와 이재 권돈인과 황산 김유근은 드넓은 하늘 아래 나무처럼 서있는 두보가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이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시와 그림의 소재로 즐겨 사용했다
김정희의 대표작인 〈영영백운도 英英白雲圖〉의 소재도 이것이다
이 그림에 김유근이 화제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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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례원버스정류소에 있다
추사고택 버스정류장
신례원버스정류소에서 10시 15분 출발하는 버스로 왔다
예산 추사고택 안내판
추사기념관
먼저 기념관으로 갔다
추사 김정희 선생상
추사기념관 앞에 있다
고독한 예술혼 / 강관욱 · 설치 년도 2008년
고고한 예술혼을 지닌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주 유배시절을 상상하며
「옥돌괴」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고독을 조각작품으로 표현하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평(評)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초산(樵山) 유최진(柳最鎭 · 1791~1869)
스승 옹방강(翁方綱 · 1733~1818)
청나라의 고증학자로 명필로도 유명하다
경학 · 금석학 · 서화에 조예가 깊었고 탁월한 감식안을 갖춰 많은 제사(題辭) · 발문으로 서화 · 비첩 등을 고증하였다
1809년~1910년 북경에서 김정희를 만나 사제 관계를 맺고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완원(阮元 · 1764~1849)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 · 정치가이다
경학을 연구하였고 문자학 · 금석학 등 청나라 고증학을 집대성하는 연구와 저작을 남겼다
추사가 북경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은 완원의 제자라는 의미이다
제주도 유배기와 만년기
1819년 대과에 급제한 이래 출세가도를 달리던 추사는 183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부친 김노경도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1840년 윤상도의 옥사가 다시 문제가 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귀양살이 속에서 추사는 더욱 더 학문에 힘쓰고 서예와 그림에 몰두했다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호젓한 유배지에서 추사의 학문과 서예 · 그림은 더욱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또한 귀양살이의 고통과 슬픔은 추사의 예술로 승화되어 청경고아(淸勁高雅 · 맑고 굳세며 고상하고 아담함)하고
삼엄졸박(森嚴拙樸 · 무섭도록 엄숙하며 서툴고 순박함)한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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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온 추사는
1851년에 다시 권돈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추사는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였다
그림을 그리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한가로운 생활을 보내던 추사는 1856년 71세 나이로 서거하였다
내포문화숲길 방향안내판
화암사로 간다
추사 김정희 묘
추사 김정희, 초배(初配)인 한산이씨 · 계배(繼配)인 예안이씨가 합장되어 있다
묘에는 석상과 망주석 1쌍이 있고, 묘비는 1937년 9월에 세웠는데, 종인(宗人) 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썼다
내포문화숲길 안내목
화암사로 가는 길이다
오석산(烏石山) 각자(刻字) 바위
내포문화숲길 리본
화암사 · 용궁리 갈림길 안내판
소봉래 각자로 가려면 용궁리 방향으로 가야 한다
벤치 쉼터
소봉래 각자로 가는 길이다
소봉래(小蓬來)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이 바위는 일명 쉰질(50길)바위로 여기에 추사 김정희 선생은 소봉래라 새겨놓았다
스승인 담계 옹방강의 집 앞 석순(石筍)에 봉래(蓬萊)라 쓰여진 것을 보고 자신은 작은 봉래라 이르며 여기에 소봉래라 새겨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추사 선생은 소봉래학인(小蓬來學人) · 소봉래주인(小蓬來主人) · 소봉래(小蓬來) · 소봉래각(小蓬來閣)
소봉래산인(小蓬來山人) · 봉래산초(蓬來山樵) · 소봉학인(小蓬來學人) 등의 호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오석산(烏石山)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봉래(小蓬來)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소봉래(小蓬來)라는 글귀 밑에 「추사제(秋史題)」라 쓴 작은 글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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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로부터 약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제 화암사로 돌아간다
시경(詩經)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추사는 이곳을 자신의 이상향(理想鄕)으로 만들고자 했다
때문에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 1733~1818)을 상징하는 여러 문구들을 이곳 병풍바위와 쉰질바위에 새겨놓았다
소동파를 존경했던 옹방강 그리고 소동파와 옹방강을 존경했던 추사
이런 추사는 자신이 존경했던 소동파(蘇東坡)와 옹방강을 이 오석산(烏石山)에 흔적으로 남겨두어
자신의 학문의 뿌리 또는 이상향 내지는 선경(仙境)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는 화암사 중건 상량문에도 나타나는데 마지막 부분에 「소봉래의 선경을 꾸며주소서!」 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경(詩經)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시경은 시의 경계(境界) 또는 시흥(詩興)을 불러일으키는 풍취(風趣)라는 뜻으로 경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추사가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탁본 글씨를 화암사 병풍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예서로 쓴 이 글씨는 송나라 시인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던 인물인 육유(陸游 · 호 방옹(放翁)의 글씨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이 좋은 글씨를 후대에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이곳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각에서는 추사의 친필이라는 견해가 있어 연구가 필요한 필적이다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추사 김정희 선생이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의 집 대문 양쪽에
상견동파구거사(想見東坡舊居士) · 엄연천축고선생(儼然天竺古先生)이라는 대련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대련에서 추사는 천축고선생이라는 문구를 떠올려 이곳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에 유려한 행서로 새겨 놓은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소동파를 흠모하던 선비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소동파와 석가모니를 동일시한 것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얼마나 소동파를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천축국(인도)의 옛 선생님 댁」이라는 뜻으로 추사가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예산 화암사(華巖寺)
창건연대는 미상(未詳)이나 삼국시대의 고찰(古刹)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별사전(別賜田)으로 분급된 일대의 전토(田土)에 포함되어 그 일문(一門)에 세습되었다
1752년(영조 28)에 월성위가 중건하였으나, 그 후 대웅전이 소실되고 요사채만 남아 있다
추사 선생은 이곳 오석산(烏石山) 화암사에서 불교에 정심(靜深)하였고
1846년(현종 12)에 제주도 적소(謫所)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중건을 지시한 사실이 있다
이때 추사는 화암사중건상량문과 함께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 · 시경루(詩境樓) 현판을 써서 보낸다
이 현판들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8m · 둘레 3.2m · 나이 230년 · 지정일자 1982. 10. 15
요사체
화암사(華巖寺) 현판
요사채에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6m · 둘레 4.1m · 나이 228년 · 지정일자 1982. 10. 15
추사고택(秋史古宅)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 선생이 태여나서 성장한 곳이며 주변에는 추사 선생묘 · 월성위 · 화순옹주묘와 정려문 · 백송 · 화암사 등 추사 선생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있다
추사고택은 문간채 · 사랑채 그리고 안채 · 사당채가 있다
안채 · 사랑채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 관념이었는데
이는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안채
□자형으로 된 안채는 사랑채와 달리 사방이 막혀 내부가 보이지 않게 건축되었다
안채는 정면에 보이는 6칸 대청을 비롯하여 우측의 안방과 좌측의 건넌방 그리고 부엌 · 광 등이 있는데
이곳의 부엌은 난방 전용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안채 밖에 따로 두었다
영당(影堂)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당을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畫贊文)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해시계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이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건물 전체가 동서 방향으로 자리잡은 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 선생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추사고택 전경
1970년대 사진으로 정화사업 이전 모습이다
사진을 보면 안채 앞 농기구가 배치되어 있고 마당 앞 석년(해시계)에 소를 묶어 놓았다
고택의 처마 끝과 중첩되어 뒤로는 용산(龍山)이 보인다
우물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다
우물에는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월성위 김한신 묘(月城尉 金漢藎墓)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묘이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인물이 잘 생기고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귀한 신분임에도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시책문을 썼으며, 전각에도 뛰어났다
묘소 앞 비문에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월성위 김한신 묘비
화순옹주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이때 예조판서 이익정이 옹주의 절의를 기리고자 정려(旌閭) 할것을 청하자
부인으로서의 정절을 지켰다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불효하였므로 도리에 어긋난다며 청을 거절하였다
비문은 영조의 친필이다
작명등 · 문인석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도 합장되어 있는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묘 앞에서 봤다
화순옹주 홍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는 조선 영조의 차녀이자 정조의 고모다
화순옹주 부부는 자식이 없어 김한신의 형인 김한정(金漢禎)의 3남 김이주로 사후 양자를 삼는데
김이주의 손자가 추사 김정희이다
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紅門)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열녀유록대부월성위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정효공김한신배화순옹주지문
(烈女綏綠大夫月城尉兼五衛都揔府都揔管贈諡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
상지7년계묘1월12일특명정려
(上之七年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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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이 사도세자와 말다툼 끝에
사도세자가 던진 벼루에 맞아서 죽자 화순옹주는 화를 삭이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한다
7일째 되는 날 영조가 알고 찾아와 미음을 권했지만 옹주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묘막터(墓幕址)
영조의 첫 후궁이었던 정빈 이씨의 딸로 태여난 화순옹주는 이듬해 어머니를 여의었고
친언니는 화억옹주는 태여나기 전에 죽었고, 한 살 터울인 친오빠 효장세자는 아홉 살에 요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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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막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고, 둘레 담장은 근래에 설치한 것이다
백송공원(白松公園) 빗돌
자연속으로 / 박수광
송풍취선대 산월조탄금(松風吹鮮帶 山月照彈琴)
나무와 솔바람에 나부끼는 옷고름 · 달에 비취인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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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 이종용
아름다운 백송과 산의 이미지를 형상화하였다
김흥경(金興卿) 묘역 · 예산 용궁리 백송(白松) / 천연기념물 제106호
백송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우리나라에 몇 그루 밖에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이 백송은 추사 선생이 25세 때,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생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를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의 묘소에 심은 것이다
김흥경(金興卿) 묘역
조선후기 이조판서 · 우의정 ·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추사 김정희의 고조부이고
아들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영조와 사돈간이 된다
또 조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에게는 7촌 아저씨가 된다
예산 용궁리 백송(白松) / 천연기념물 제106호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으나 두 가지는 말라 죽었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있다
백송은 어릴 때는 껍질이 담회색이었다가 40년이 지나야 큰 껍질 조각이 떨어지며 특유의 빛깔이 나타난다
흰색을 좋아하던 조선사람들은 백송을 귀하게 여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번식이 어려워 몇 그루 없는 희귀한 나무다
현재 남아 있는 백송은 대부분 조선시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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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높이 14.5m · 가슴 높이 둘레 4.77m · 나이 약 200년
김흥경신도비(金興卿神道碑)
백송공원버스정류장
16시 25분 예산행 406번버스를 탔다
버스는 정확한 시간에 왔다
예산천
버스에서 내려 식사할 곳을 찾으며 걸었다
예산서부교회
새서울사진관
예산역버스정류장
출렁다리 방면 버스시간표
내일 걸을 곳이다
예산역
동행길 1922 역전 여관 골목이다
예산역 사진
동행길 1922 역전 여관 골목에 있다
I 호텔
숙소를 잡고 식사하러 간다
왕궁 참숯석갈비
저녁을 했다
동행길 1922 역전여관골목
식사하고 숙소로 가며 봤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6.71km, 소요시간 5시간 1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