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塔谷公園 사적 354호)은 서울에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공원이다
만들어진 시기를 두고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졌다
이 공원은 조선 고종 연간 총세무사로 활약한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건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장 당시에는 빈 땅에 울타리를 둘러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은 정도였으나 1910년부터 점차 시설물을 늘려갔으며, 1913년부터는 매일 개방하였다
탑골공원은 3 · 1독립운동의 점화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일, 4~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여기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79년 3 · 1독립운동 60주년을 맞아 공원을 정비해 넓혔다
탑골공원 ·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에 이름을 탑골공원으로 정했다
이 일대는 세조 때 세운 원각사 터로서 이곳에는 현재 원각사 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가 남아 있고
3 · 1운동을 기념한 독립운동 부조판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다
탑골공원 삼일문
1969년 3 · 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시가 독립선언 기념탑을 세우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해 삼일문 돌기둥 4개를 서울대 법대 교문 기둥으로 기증했다
1975년 서울대 법대가 관악 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삼일문 현판
삼일문이란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이다
2001년 11월 23일에는 탑골공원 정문 현판인 삼일문이 떼어지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민족정기가 서린 탑골공원에 일제시대 장교 출신인 박정희의 글이 올라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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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문 현판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지, 공원 정문 기둥 복원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탑골공원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고려시대에 세운 흥복사(興福寺) 터에다 원각사(圓覺寺)를 지었다
이후 연산군(燕山君)에 의해 연방원(聯芳院)이라는 기생방, 조선 후기 한때는 지식인이 모이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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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이 천막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팔각정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
1902년(광무 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 · 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달성 소나무 삼형제 3 / 2013. 10. 22
대구광역시 달성군 명예달성군민 방송인 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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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달성 소나무 3그루가 들어선 계기는 송해 선생의 주선 때문이었다
탑골공원 소나무 3그루가 죽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명예 달성군민인 송해 선생이 소나무 3그루를 요청했고
달성군은 탑골공원을 관리하는 종로구와 협의해 2013년 10월 22일 심게 되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十層石塔) / 국보 제2호
세조가 세운 원각사 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 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興福寺)」 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견해로는 십층 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十層石塔) / 국보 제2호
亞(아)자 모양의 기단은 삼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 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 저팔계 ·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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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 용을 휘감은 기둥 · 목조구조 ·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독립선언서 비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1861년 청주 출생, 1882년 동학에 입도, 1883년 동학의 제2교조 해월 최시형의 수제자로 수도에 전념
동학군의 통령으로 경기 · 충청지역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과 합세한 뒤 공주 이인에서 관군 격파
우금치전투에서 현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혁명이 좌절되자 함경도 · 평안도로 피신
1897년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3대 교조가 됨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꿈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전국적으로 30여 개의 학교를 인수 · 운영하거나 지원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을 주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1922년 5월 19일 순국하였다
대원각사비각(大圓覺寺碑閣)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 보물 제3호
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 2)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고려시대에 세운 흥복사(興福寺) 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 13)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 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케 하였다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 보물 제3호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울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이 앞면 글을 짓고, 성임이 그 글씨를 썼으며 · 서거정이 뒷면 글을 짓고, 정난종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우물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성역화)사업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행한 시굴조사 때 발견된 우물 가운데 하나다
당시 우물 내부는 바닥까지 모래와 마사토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 4대문 안에서 민간용 우물이 발견된 사례가 드문 사정에 비출 때 이 우물은 조선 후기 한양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물 매립 표지석
탑골공원 재정비사업 시행으로 인한 문화유적 시굴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의 일부를 매납, 보호한 곳으로,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무단 굴토 및 훼손을 금한다
용운당대선사비(龍雲堂大禪師碑)
산중불교를 도시로 끌어내어 대중화하고, 아울러 쇄망하는 국운을 만회하여 민주사회를 실현하려던 만해의 비다
동문
3 · 1운동 기념부조 · 3 · 1운동 찬양비
3 · 1운동 찬양비
젊은이들이여 보라 한국의 지성 높은 젊은이들이여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이 나라의 주춧돌인 청년학생들이여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히 주위를 살피고 둘러보라
민족자결의 고함치는 독립만세 소리 그대의 귀에 쟁쟁하리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는 정재용의 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수천 명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가니
서울은 순식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대로 파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3월 2일 함경도 함흥 고을 민중들은 역사 깊은 만세교위를 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왜경의 총칼이 번뜩일 수록 만세소리는 더 높았고
그 중에서도 조영신이란 소년의 입을 찢었을 적에 더욱더 거센 만세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평양기독교 신자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장댓재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고종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이어 거리로 달려나가 천도교인들과 합세하여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왜경의 총탄을 무릅쓰고 만세시위를 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에 황해도 해주에서는
문월 선동 기생들이 선봉이 되어 만세시위를 하자 잔악한 기마경찰들은 우리 민중을 마구 짓밟고
여자의 머리채를 말꼬리에 잡아매어 끌었지만은 그들은 왜경 앞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했다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철원 고을 민중들은
학생들을 선두로 모두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물밀 듯 거리로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악독한 왜경들은 총을 모두 쏘며 칼을 휘둘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행진할 뿐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일본군 1개 소대가 수원 제암리에 와서
예수교인들과 천도 교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총으로 난사하며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나오는 부인은 칼로써 잔인하게 죽이고 창문으로 내 보내는 아기들마저 죽였다
1919년 3월 1일 천안 고을 병천시장에 수천 명 군중이 독립선언식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모자 유중천 등 20여 명은 현장에서 참살되고 유관순 처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넘어가 혹독한 고문에 항쟁하다 마침내 옥사했다
1919년 3월 2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 가를 행진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려 했으나
그들은 아우성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
1919년 4월 3일 남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수천 명 군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다가 방모씨 등 10여 명이 일본경찰의 칼 아래 쓰러지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 마저 달려와 거기서 자결하며 독립을 이루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19년 3월 23일 저 멀리 제주도에서도 남녀 군중과 학생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한라산 정기를 타고난 그들은 맨손으로 달려나가
일본 경찰의 무서운 총칼과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행진을 계속하며 한 사람도 굽힘이 없었다
탑골공원사적비
역사가 길면 곳곳이 이야기가 많은 법이니 탑골공원이 바로 그 중의 하나다
본시 이조 태조 때에는 여기에 불교 조계종의 본사이던 흥복사가 있었는데
그 것이 세종 때에는 관습도감 예장도감 및 중학유생집회소 등이 있었더니
세조 9년에 왕이 효령대군의 신앙심에 감격하고 또 스스로도 뜻을 일으켜
여기 있던 관청들을 모두 딴 곳으로 내어 보내고 민가 2백여 호를 더 사들여
도장을 널리 닦고 옛 터에 새 절을 다시 이룩하니 그것이 바로 원각사이었다
북문 · 탑골공원사적비
서문
탑골공원 석재유구
탑골공원 일대의 도시개발과정에서 출토되었던 부재들과
도성 내에 가설되어 있었던 옛 돌다리의 부재(귀틀석 16점 · 멍에석 1점 · 엄지기둥 1점)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이곳에 모아둔 각종 석물들은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형편이나 전통석조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물상
대리석으로 된 인물상(3점)은 원각사 탑(圓覺寺塔)의 주위를 호위하던 신장상(神將像)이나 보살상으로 추정되고
연화문이 새겨진 난간석은 원각사 탑 외곽을 둘린 부재가 아닌가 여겨진다
탑골공원 석재유구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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