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역에서 고종의 길로 경희궁을 만났고
식사를 하고 한양도성길로 구 서울역사(사적 제284호 · 문화역사서울284)를 찾았다
서울시청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쉼터에서 봤다
시청역이 시점이다
코로나 백신 희생자 국민추모 합동분향소
서울시청 앞에 있다
덕수궁 돌담길
경운궁 양이재(慶運宮 養怡齋) / 등록문화재 제267호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인 1905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함희당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싼 일곽은 홍원이라 불렀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인다
사제관
1987년 6월 10일,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진원지다
유월민주항쟁 10년을 기념하여 세운 유월민주항쟁 진원지 빗돌이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한국 전통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조화시킨 성당으로 1978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제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성공회라는 명칭은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Holy Catholic church)」로 한자 문화권인 한국 · 중국 · 일본 등에서 쓰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에피스코팔 처치 혹은 앵글리칸 처치라고도 불린다
덕수궁 · 영국대사관
덕수궁 내부 통행로 가려면 왼쪽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공회에서 봤다
덕수궁 느티나무
주한영국대사관을 지나는 덕수궁 내부 통행로에서 봤다
덕수궁 내부 통행로 문이다
영국대사관 경계지점 사진
과거 사진은 덕수궁 내부 통행로 문이 없다
철대문에서 덕수궁 내부 통행로 문으로 가는 길이다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한국에 구세군이 첫발을 디딘지 40일이 지난 1908년 11월 11일
야주개(현 종로구 당주동)에 위치한 〈홍화경매소〉라는 건물을 임대하여 한국 최초의 구세군교회로 창립되었다
*
구세군 중앙회관과 왼쪽 건물이 구세군 역사박물관이다
관람시간은 평일 10시부터 16시까지 / 토 · 일 · 공휴일은 휴관이다
100주년 비전 선언문 · 구세군영(救世軍營) 빗돌 · 예배당 기초석
구세군영이라 쓰여진 표석은 1915년에 당시의 예배당에 부착되었던 현판이다
구세군 중앙회관 마당에 묻혀 있던 것을 2003년에 발견하였으며 창립 100주년을 맞으면서 선조들의 믿음을 기억하고자 이곳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맨 밑에 있는 기초석은 1915년에 한성부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철거된 예배당을 재건축할 때 사용된 기초석이며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허가두 사관이 낙성식을 인도하였다
상단에 방패에 새겨진 문구는 100주년에 수립한 선교 2세기 비전선언문이며 서울제일영문의 핵심 가치와 목적이 담겨 있다
이 표석은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호렙산 40일 특별 새벽기도회〉에 동참한 군우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건립되었다
*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정문 옆에 있다
조선방송협회 경성방송국
1927년 현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이다
초기에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혼합하여 내보내는 단일 채널을 운영하다 1933년 이후 별도의 조선어 채널을 만들었다
연예 · 오락과 스포츠 중계, 교양 등 종합편성 채널의 모습을 띠고 있었으나 방송은 일제의 지배논리를 설파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1935년 지방 방송국의 개국에 맞춰 경성 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광복 이후, 미군정청 공보부의 방송국으로 사용되다가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였으며 공영방송 KBS의 모체가 되었다
덕수초등학교 온실
1912년에 개교한 덕수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엔 정부청사 온실이 있다
덕수초등학교에서 고종의 길로 오른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고종의 길이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사진 / 1938년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예전 경기여자고등학교
1908년 관립 한성고등여학교로 개교했다
1988년 개포동으로 이전했고 지금은 유물 발굴 작업중인 것 같다
고종의 길 출입문
예전 경기여자고등학교 가림막 오른쪽에 있다
정동공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예전 러시아공사관 탑
1890년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한 르네상스식 건물로
벽돌조 2층 본관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 남아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8년(건양 1) 2월 1일부터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약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역사에 나오는 〈아관파천〉이다
예전 러시아공사관 / 1900년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정동공원
하얀 파고라 뒤로 남산서울타워가 보인다
인왕산
러시아공사관 언덕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내려오며 봤다
경희궁 흥화문(慶熙宮 興化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이 경희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 사업을 하면서 현재 위치에 옮겨 세웠다
서울중 · 고등학교 터 빗돌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이한다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
1946년부터 서울중고등학교가 자리잡아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터로 〈서울고인〉의 영원한 요람이다
경희궁 숭정문(慶熙宮 崇政門)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으로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 경에 정면 5칸 ·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특히 경종 · 정조 ·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한 건물이고, 원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다
태령전(泰寧殿)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는데 1744년(영조 20)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이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영렬천(靈冽泉)
위선당 뒤편에 있는 샘으로 바위 틈에서 물이 나와 언제나 마르지 않고 매우 차가워 초정이라고도 불렀다
샘 위의 바위에는 선조의 글씨를 집자한 영렬천이 새겨져 있다
영렬천(靈冽泉) 각자
선조의 글씨를 집자한 영렬천이 새겨져 있다
숭정문(崇政門)
숭정전 정문이다
새문안극장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
1182년 이태리 아씨시에서 부유한 포목점의 아들로 태여났다
1205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생활을 시작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회칙을 인준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형제회〉가 시작
1224년 라베르나에서 양손 · 양발 · 옆구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고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의 포르지운꿀라에서 하느님 품에 안꼈다
고등학생이 함께 세우는 평화비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님께서 처음으로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라고
용기를 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힌 일년 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의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난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를 맞이하여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소녀상을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
2015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오직, 고등학생의 힘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소녀상은 53개의 고등학교 학생 약 16,400여 명이 만들어 냈다
소녀의 한 손엔 평화의 의지를 담아 세상을 향해 날아갈 듯한 나비가 앉아 있고 또 한 손은 친구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어서각 터(御書閣址)
최규서(1650~1735)의 집터 안에 있던 영조의 어필을 봉안한 곳이다
조선 경종 ·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는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난 무신란을 평정한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이 문서에 기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영조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필을 내렸다
일사부정은 지조와 신의가 하나되어 사직의 안위를 지켰다는 뜻이다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최근까지 성벽 바로 위로 창덕여자중학교 시멘트 블록 담장이 세워져 있었는데
한양도성 순성길을 조성하면서 담장을 성벽 안쪽으로 들였다
한양도성 돈의문 남쪽구간 전경
정동 일대에서 유일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양도성 성벽이다
가로 100cm가 넘는 성돌은 15세기 성벽이고, 60cm 내외의 정방형의 성돌은 18~19세기의 성벽이다
성벽 안쪽으로는 1896년에 프랑스공사관이 세워졌고, 1914년 이후에는 서대문소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1973년 이후 현재까지 창덕여자중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
안내판에 있는 사진이다
농협중앙회 느티나무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서대문정거장 터 빗돌이 왼쪽에 있다
서대문정거장 터 빗돌
서대문 정거장은 경인선 개통 당시 시발역이었다
경인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준공된에 따라 서울~인천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서소문아파트
1972년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형식(부채꼴) 주상복합아파트다
만초천이라는 하천을 덮고 만든 아파트이기 때문에 하천의 모양에 따라 건축하였기에 부채꼴 모양이 되었다
소의문 터 빗돌
한양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로, 서남쪽에 있어 서소문(西小門)으로 불린 소의문(昭義門)이 있던 자리이다
1396년(태조 5) 건립할 당시에는 소덕문(昭德門)이라고 했으나 1744년(영조 20) 소의문으로 바꿨다
1914년 일제가 철거하였다
서울 한양도성
조선 태조 5년(1396)에 축성된 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으로서
옛 성벽의 흔적을 남기고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복원 · 정비한 것이다
서울 한양도성
조선 태조 5년(1396)에 축성된 한양도성의 일부 구간으로서
옛 성벽의 흔적을 남기고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복원 · 정비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서울상공회의소 신회관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상공회의소 표지석을 설립 년도순으로 조성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창립 100주년 기념비
남지터(南池址) 빗돌
연산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조선시대 최고의 간신 김안로가 죽자
성난 군중이 김안로의 집을 부수고 그 터를 못으로 만들었는데 그 못이 남지다
남대문 밖에 남지 · 동대문 밖에 동지 · 서대문 밖에 서지가 있었다
세종대로2나길
예전 자유극장 터
남대문시장 칼치골목 진주집
70년 전통 간판이 있다
남대문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현 세브란스병원)에 부설된 제중원교회가 그 전신으로
선교사 알렌 · 헤론 부부와 의사 스크랜턴의 어머니 등에 의해 1887년(고종 24) 11월 21일에 설립되었다
동자동 방향
서울로 7017에서 봤다
〈서울로 7017〉는 1970년 만들어져, 2017년 다시 태여난 17m 높이의 고가도로다
구 서울역사(문화역사서울284) / 사적 제284호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철도의 남대문역사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1925년 르네상스 풍의 절충주의 양식으로 다시 지었으며 2011년 복합 문화공간인 〈문화역사서울284〉로 바뀌었다
남대문 방향
염천교 방향
왈우 강우규 의사 상
조선에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제거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나오는 그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마차 안에 떨어졌으나 불발탄이었다
이후 은신생활 하던 중 한국인 앞잡이의 고발로 붙잡혀
다음 해 서대문형무소에서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라는
사형집행 직전에 유언을 남기고 순국하셨다
한남방앗간 참기름
국내산 통참깨를 180도 이하 저온에서 전통 방식으로 압착하여 깊고 진한 풍미의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저온 압착 방식의 착유로 오메가6와 불포화지방산, 리그난 성분 등의 영양소가 생생하게 살아 있어
황산화와 노화방지 · 암세포 증식 억제 효과가 있다
320ml 한 병 4만원이다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동판
1899. 9. 18 - 1999. 9. 18
한국철도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2022문화역서울284기획전 · 사물을 대하는 태도
예전 서울역 그릴
예전 서울역 계단 창
예전 서울역 문
예전 서울역 지하 복도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8.75km, 소요시간 7시간 2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