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慶熙宮 사적 271호)은 광해군 9년(1617))부터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2년(1620)에 완성하였다
처음,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지만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아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또한 도성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경희궁은 대지의 형세를 반영한 특이한 형태의 궁궐이다
광해군은 새 궁궐을 빨리 짓기 위해 대지의 경계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탓에 땅의 모양이 동서로 길고 건물도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배치되었다
〈서궐도안〉에서 볼 수 있는 전각과 문은 약 190여 개이며 정문인 흥화문은 남향이 아니라 종로와 마주 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경희궁 흥화문(慶熙宮 興化門)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이 경희궁을 말살하는 과정에서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 사업을 하면서 현재 위치에 옮겨 세웠다
서울중 · 고등학교 터 빗돌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이한다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
1946년부터 서울중 · 고등학교가 자리잡아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터로 〈서울고인〉의 영원한 요람이다
경희궁 숭정문(慶熙宮 崇政門)
경희궁이 들어서기 전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터를 몰수하고 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숭정문(崇政門)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는 봉황 답도(踏道)와 계단 양쪽에 왕궁을 지키는 서수(瑞獸)가 있다
숭정전 정문이다
숭정전(崇政殿)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으로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 경에 정면 5칸 ·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특히 경종 · 정조 ·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한 건물이고, 원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다
숭정전(崇政殿)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숭정전 답도(崇政殿 踏道)
두 마리 봉황이 그려져 있는 답도와 계단석 무늬가 아름답다
전설 속의 봉황은 오동나무 위에만 앉고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한다
숭정전(崇政殿) 현판
승정전 내부
임금님의 용좌 뒤에 일월오봉도가 있다
숭정문(崇政門)
숭정전 앞에서 봤다
자정문(資政門)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삼문이다
자정문(資政門) 현판
행각(行閣)
드므
드므란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궁궐에서 주요 건물의 월대와 월대 아래 마당에 드므를 설치하고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았다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1617~20년(광해군 9~12)에 건립되었다
편전이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경희궁에서는 자정전 이외에 흥정당(興政堂)도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정전은 편전으로 지어졌지만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
자정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되었다
자정전(資政殿) 현판
전돌
자정전 서쪽, 발굴을 통하여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었기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복원하였다
서암(瑞巖) 맞은 편에 있는 바위다
서암(瑞巖)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王巖)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두게 하였다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암천(巖泉)
서암(瑞巖) 속에 있는 샘이다
태령전(泰寧殿)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던 건물이었는데 1744년(영조 20) 영조의 어진이 새로 그려지자
이곳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였고, 영조가 승하한 후에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태령전(泰寧殿) 현판
흔적조차 거의 없던 태령전을 서울시에서는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현재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다
영조 어진
태령문(泰寧門)
태령전 앞에서 봤다
행각(行閣)
방공호
경희궁지로 오르는 계단이다
경희궁
영렬천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영렬천(靈冽泉)
위선당 뒤편에 있는 샘으로 바위 틈에서 물이 나와 언제나 마르지 않고 매우 차가워 초정이라고도 불렀다
샘 위의 바위에는 선조의 글씨를 집자한 영렬천이 새겨져 있다
영렬천(靈冽泉) 각자
선조의 글씨를 집자한 영렬천이 새겨져 있다
숭정문(崇政門)
숭정전 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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