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의 궁궐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 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 건물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 영역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의 영역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또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 남아있다
이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승평문(昇平門)
강화 고려궁지 삼문이다
승평문(昇平門) 현판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 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인조 16년(1638)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하였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겹처마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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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느티나무 보호수는 조선 인조 9년(1631)에 여러 전각과 행궁을 세울 때 심었던 나무로 추측된다
나무 높이 20m · 둘레 4.3m · 나이 약 400년 · 지정일자 2016
명위헌(明威軒) 현판
현판은 영조 대 명필인 백하 윤순(尹淳)이 쓴 것이다
강화유수
외규장각(外奎章閣)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위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으로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住紙)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병인양요때에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 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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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양헌수장군에세 패하자 후퇴하며 불태웠다
이 결과로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여 책의 문서 및 은궤 수천 량이 약탈되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외규장각(外奎章閣) 현판
복원배경 · 외규장각 발굴과 복원
조선의 보물창고 외규장각 · 병인양요
조선의 보물창고 외규장각
장녕전 · 외규장각
병인양요
현장기록화 반차도
영조정순후 가례도감 의궤
1759년 행한 영조와 15세의 꽃다운 신부 정순왕후의 결혼식 준비 상황과 실제 현장의 장면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의궤 말미에 그려진 반차도에는 혼례식에 참여한 사람과 가마 · 의장 · 말들의 모습이
행사 당일의 모습 그대로 표현되어 있어 그 당시 왕실의 혼례문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왕의 가마
국왕 영조가 타고 있는 개방형 가마의 모습이다
왕비의 가마
보행나인, 상궁, 시녀 등 여인들이 부쩍 늘었다
별감 2인의 인도를 받고 있는 왕비의 가마가 보인다
프랑스군의 의궤 약탈
강화 외규장각 의궤 반환 · 강화 외규장각 의궤 귀환일지
종묘의궤(宗廟儀軌)
조선의 종묘와 영녕전에 관한 의절을 적은 책으로 원편(原編)과 속록(續錄)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실 주요 행사와 의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의궤의 제작과 보관
의궤의 뜻과 자료적 가치
회화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0m · 둘레 6m · 나이 416년 · 지정일자 2001. 8. 6
외규장각(外奎章閣) ·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
강화부동종(江華府銅鐘)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숙종 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했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줄이 둘러 있고, 그 아래에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
1999년 10월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강화부동종(江華府銅鐘) 현판
강화부 동종(江華府 銅鐘)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守府 吏房廳) / 유형문화재 제26호
강화유수부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정조 7년(1783)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1915년 이후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강화유수부 이방청 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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