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문학관은 강화 출신의 수필가 고(故) 조경희 선생의 유지에 의한 것으로
선생께서 2005년 8월 타계하시며 강화군에 사전 기증하신 소장품 8,287점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아울러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신 고인의 수필문학에 끼친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강화읍 용흥궁공원에 있는 강화문학관 1층에는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 · 정철 ·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2층에는 조경희 선생의 육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 안경 등과 미술품 40여 점의 유품을 교환 · 전시하고 있다
세미나실은 문화강좌를 개설 · 운용하고 있으며, 북카페 월당을 만들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강화문학관 · 조경희기념관
강화문학관 1층전시실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 · 정철 ·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강화문학관
1층은 유구한 역사문화의 고장인 강화문학을 소개한다
2층은 문학관이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준 고 조경희 선생의 문학세계와 생애를 전해주는 기념관이다
강화의 문학
고려시대 한때 나라의 수도(1232~1270)였을 때는 우리 민족의 대문호인 백운 이규보 선생이
강화에 머물며 수많은 글들을 남겨 우리들이 문학과 풍류와 평화를 사랑하는 후손임을 알게 해 주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송강 정철 · 석주 권필 · 선원 김상용 · 동악 이안눌 등의 문인들이 강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시대 문학
고려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이다
고려 전기는 이전의 신라 문학을 계승하면서, 불교와 유학의 이념을 구현하는데 힘썼으며 한문학이 왕성하게 번성한 시기였다
고려시대 이규보 선생
민족의 대문호 이규보
시 · 술 · 거문고 3가지를 즐겨 스스로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호를 지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규보가 평생 동안 지은 시와 글들을 모아 만든 문집이다
총 53권으로, 전집 41권은 이규보가 살아 있을 때 아들인 이함의 요청으로 손수 편차를 정하고 이름도 지었다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이가 이규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간행하려고 했으나 미처 완성을 보지 못했다
후집 12권은 이함이 전집에서 빠진 유작들을 수집하여 만들었으며, 후에 전집과 합쳐져 간행되었다
시(詩)
이규보가 지은 회문시(回文詩)이다
회문시란 첫 글자부터 순서대로 읽어도 (순독 順讀) 뜻이 통하고 마지막 글자부터 거꾸로 읽어도(역독 逆讀) 뜻이 통하는 시이다
뜻뿐만 아니라 운자(韻字)도 맞아야 하며 고도의 문학적 재능이 필요한 어려운 시인데 사대부들이 놀이삼아 짓던 일종의 유희시라고 할 수 있다
서거정이 「동방의 시호(詩豪)는 오직 이규보 한 사람일 뿐」이라는 칭송을 할 정도로 회문시에 능통했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글로 고려 왕실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사실을 부처님께 고하는 내용이다
1236년에 공식적으로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판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237년에 그 각판이 나오자 이를 경축하고 독려하는 행향(行香)을 하면서 올린 글이다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이며 또한 이규보의 유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뛰어난 산문 작품이기도 하다
함허 · 이색 · 이제헌 · 최자
함허(涵虛 1376~1433)는 고려 말 · 조선 초의 승려로 속성은 유씨(劉氏)이고 당호는 함허이다
21세 때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의 죽음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느껴 출가했다
무학(無學)을 만나 가르침을 받아 지공(指空) · 나옹(懶翁) · 무학의 법통을 이었다
*
이색(李穡 · 1328~1396)은 고려 말기의 유학자이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이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된 이후 재야에 은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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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고려 말기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백이정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했고
같은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 · 조맹부 · 원명선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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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崔滋 1188~1260)는 고려 말기 학자로 시문으로 이규보에게 인정받아 요직에서 활약하였고
1258년 최씨 무인정권이 몰락하자 수상이 되어 난국을 수습하였다
조선시대 문학
훈민정음이 창제되면서 국문문학이 등장하는 한국문학사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나타났다
조선의 건국을 찬양한 왕조서사시 용비어천가와 석가모니의 일생을 다룬 불교서사시 월인청강지곡은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국문문학이다
이후 유교 서적이나 불경을 백성들이 접하기 쉽게 번역 · 제작하면서 한글의 실용성과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한편 한문학은 여전히 지배층의 문학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정철(鄭澈) · 권필(權韠) · 김상용(金尙容)
정철(鄭澈 1536~1593)
고산(孤山) 윤선도 · 노계(盧溪)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조 3대 작가 중 으뜸으로 꼽힌다
단가에 윤고산 · 장가(長歌)에 정송강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제1인자이다
시가집 송강가사 안의 작품에는 관동별곡 · 성산별곡 · 사미인곡 등 장가를 비롯하여 장진주사 · 훈민가 등과 같은 단가(시조) 77수가 실려 있다
강화의 송정촌(松亭村 · 지금의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권필(權韠 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술과 시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았다
동몽교관으로 추천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강화에 있을 때 명성을 듣고 몰려온 유생들을 가르쳤으며 명나라의 대문장가 고천준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혀 이름을 떨쳤다
김상용(金尙容 · 1561~1637)
조선 중기 문신으로 이항복 · 신흠 · 오윤겸 · 이정구 · 황신 등과 사귀었다
1582년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 · 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폭 순절하였다
좌의정 김상헌이 그의 동생이다. 1758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학파 문학과 사상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에 강화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학파로 하곡 정제두를 그 시조로 하고 있다
정제두는 당시 지배 교학(敎學)이었던 주자학에 대한 반발로 양명학을 수용하였으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외형적으로 주자학과 양명학을 절충하는 형태를 취했다
심즉리(心卽理)와 치양지(致良知)설을 따르면서도 이기론이 사상적 기초가 되고 있으며 또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체용 · 본말로서 이해하였다
정제두와 그의 제자들은 사상적으로 왕양명의 양지학과 심학을 토대로하면서도
사학과 정음 · 서예 · 시문 등에서 양명학을 독자적으로 계승 · 발전시켜 하나의 독특한 학파를 이루어 나간 것이다
후기에는 실학파와도 관련을 맺었는데 특히 북학파는 강화학파의 양명학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황현 절명시(黃玹 絶命詩) · 김택영 문안((金澤榮 聞雁)
정제두 초정신거(鄭齊斗 草停新居) · 이건창 만청(李建昌 晩晴)
그리운 금강산 · 정인보의 문학과 생애 · 100년 전 강화마을 답사기
그리운 금강산은 1962년 6 · 25기념식에서 처음 선보인 가곡이다
발표될 당시부터 지금까지 60년 가까이 전 국민이 가장 사랑하고 애창하는 국민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작사자인 한상억과 작곡자 최영섭은 모두 강화 출신이다
*
정인보(1893~ ?)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서지학 · 국사학 · 국문학에 두루 관여했다
양명학자인 이건방 문하에서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했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노래(삼일절 · 광복절 · 제헌절 · 개천절) 모두를 강화학파의 마지막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 작사하였다
8 · 15광복 후 1947년 국학대학 학장, 1948년 초대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6 · 25전쟁 때 납북되어 얼마 되지않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
화남집(華南集)
1906년 봄, 강화에 살던 고재형(高在亨 · 1846~1916)이라는 선비가 여행길을 떠났다
돌아와서 심도기행(沁都記行)이라는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심도'는 강화의 별칭이다
심도기행이란 곧 강화기행이니 고향을 여행하고서 쓴 기행문이다
강화의 거의 모든 마을이라 할 수 있는 200여 곳을 직접 가서 살펴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 마을들을 주제로 모두 256수의 한시(漢詩)를 지었고
거기에 덧붙여 마을 유래와 자연경관 · 풍습 · 주민들의 생활 모습 등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여 지은 기행시문집이다
당시는 일제에 의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였는데 이 책은 저자가 현지를 직접 가서 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기행시문집이지만 강화의 민속지이며 지리지로도 손색이 없다
현대문학
20세기 초 전개된 신문학운동으로부터 8 · 15광복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문학을 칭한다
한국의 현대문학은 20세기 전까지의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서구문학의 기법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발전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1910년 경술국치까지의 문학은 개화기의 문학이라 한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전통을 문학적으로 계승하고 근대문학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통칭 일제강점기의 문학은 최남선, 이광수의 2인문단 시대를 거쳐
1920년대에는 창조 · 폐허 · 백조의 문학동인지와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카프(KAPF)문학이 주도하였다
이후 1930~1945년의 문학은 시문학에서 시문학파와 생명파가 등장하였으며 1939년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청록파 시인들도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전후문학이 유행했고 김수영 등의 모더니즘(Modenism)
문학의 현실참여를 높이 평가하는 참여문학론이 1960년대 이후 제기되었다
강화학파 인물
정제두 · 이광명 · 이광사 · 이광려 · 이충익 · 이면백 · 이시원 · 이건창 · 이택영 · 황현의 10인이다
황현(黃玹 · 1855~1910)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9월 10일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강화학파 인물 중 한 분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강화
다시(茶詩) 함허
2층 조경희 수필문학관
선생의 생애와 대표작 그리고 생전에 선생이 소중하게 지녔던 김기창 · 천경자 · 백남준 등의 작품이 있다
조경희 수필문학관
"당신은 과실로 치면 배 같은 사람이요."
한국수필가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조경희 수필문학관
월당 조경희 약력(月堂 趙敬姬 1918~2005)
강화도 온수리 출신이다
얼굴
"얼굴보다 마음이 고운 미인"
조경희의 대표적 수필이다
처소
"나는 나의 처소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혹시 누가 '집이 어디오'하고 물을라치면 동네 이름만 대어줄 뿐 집의 위치를 이야기하는 일이 없다"
선생의 대표적 수필이다
조경희 선생 서재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 안경 등과 40여 점의 유품을 교환 · 전시하고 있다
작품전시
월당이 강화군에 기증한 작품 8,287점이 번갈아 전시된다
문자추상(文字抽象) / 이응노 작
전시 작품 중 하나다
도자기 작품
미술작품 158점 · 도자기작품 74점 및 서예 · 조각품과 선생이 갖고 있던 8,000권의 책 등이다
물방울 / 김창열 작 · 유어예(遊於藝) · 금석기금(金石其心) / 일중 김충현 작
유어예(遊於藝) / 예(藝)에 노닌다
금석기금(金石其心) / 쇠와 돌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
물방울 / 김창열 作
미술 · 도자기 작품전시
미술작품 158점과 도자기작품 74점 및 서예 · 조각품과 선생이 갖고 있던 8,000권의 책 등이다
미술 · 도자기 작품전시
월당 조경희(月堂 趙敬姬) / 김기창 1962년
사람들 /서세옥 作
장생도 / 김기창 1984년
꽃 / 천경자 作
창포수석 / 박노수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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